12월 20일, 금요일!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아이들이 하교한 빈 교실에서 길게 누운 보리를 본다. 싹을 내고 키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사랑과 응원을 한껏 받아 자람의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던 보리가 순식간에 누워버렸다.
푸름만 빼고는 보리인지 잡초인지 분간조차 어려운 보리라는 이름의 보리. 분명 씨앗은 보리다. 뿌리도 보리 뿌리다. 뿌리가 읽어낸 땅의 유전자 차이일까. 교실 밖에 뿌려진 보리는 겨울 바람의 마음을 읽느라 손가락 한 마디도 자라지 못했다. 반면 교실에서 팬 보리는 의자 키만큼 훌쩍 자랐다. 분명 한날한시에 흙을 만났고,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모습은 극명히 달랐다.
교과서 이외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숨이 막혔다. 아이들도 누렇게 시들어 갔다. 그들을 살릴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야기의 색깔은 녹색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명이 자라는 녹색 교실 만들기 프로젝트”였다.
계획이 나온 바로 다음 날 조립형 실내 텃밭 화분을 주문하고, 학생들과 조립했다. 그리고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듯 돌과 흙을 넣고 씨앗을 심은 다음 “생명이 자라는 텃밭”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교실에서 볕이 제일 좋은 곳에 자리한 실내 텃밭은 제 역할을 다했다.
땅을 만들고 생명을 싹틔웠다는 성취감에 학생들의 사기는 보리 키만큼 높았다. 하지만 보리 성장 속도에 비례하여 학생들의 마음은 빠르게 멀어졌다. 보리가 세 뼘도 자라기 전에 보리가 팬 텃밭은 박물관에 걸린 오랜 그림처럼 교실 속 액자가 되었다.
학생들의 관심이 떠난 교실의 웃자란 보리는 꽃도 보지 못한 채 누렇게 말라 갔다.죽음을 보고서야 굵은 돌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돌로 층을 내고 다시 그 위에 부토를 얹고 땅이라고 했던 오만함이 떠올랐다. 그 오만함 위에 보리를 심었으니 뿌리가 읽은 건 오만함뿐이었다. 보리가 누렇게 말라버린 나무상자 안은 황량한 사막이었다.
“사막에요? 우리가요? 숲을요? 정말요?”
4년 전 몽골 사막화 방지를 위해 숲을 만들자고 처음 제안했을 때가 생각난다. 중학생에게 지구를 살리자고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막화가 급속대로 진행 중인 몽골에 직접 가서 나무를 심자는 말은 지금의 학교 교육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농담으로 들었다. 여기저기서 장난 가득한 말들이 날아왔다.
“선생님, 호수도 만들어요. 강도 만들면 안 되나요.”
“좋은 생각이다. 너희가 먼저 만들자고 했으니 강과 호수도 꼭 만들자. 그런데 선생님이 너희들을 많이 아끼니까 그것은 다음에 만들고, 이번에는 숲부터 만들자. 숲이 강, 호수보다 만들기가 쉬울 거야. 역시 너희들은 지구를 지키기는 학생들이야. 고마워 얘들아!”
“……!”
처음에는 장난으로 받아들이던 학생들이 진지한 어조에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면서 빠르게 상황 파악을 위한 눈 대화를 시작했다. 말로 할 때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학생들의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는 다양한 표정들이 피었다. 표정의 종류가 봄꽃보다 많았다. 봄꽃 같은 아이들의 모습은 바라만 봐도 좋았다. 그 모습에서 지구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을 보았다.
“선생님. 진짜예요?”
“얘들아, 지금 보는 사진은 선생님이 직접 몽골에 가서 찍어온 사진이야. 이렇게 넓은 곳에 나무 한 그루 없어.”
“……!”
“그리고 이 영상 한 번 봐봐. 선생님이 갔을 때 바람이 갑자기 심하게 불었는데 순식간에 모래바람기둥이 만들어졌어. 저게 좀 더 강한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로 오면 뭐지?”
“황사요!”
“맞아. 황사야. 시간이 지날수록 황사가 심해지고 있잖아. 그 이유는 몽골에 사막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야.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마스크 안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학생들은 또 빠르게 눈으로 대화를 하였다. 대화 내용은 조금 전과는 분명 달랐다. 간혹 ‘우리가 왜?’라고 이야기를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대다수 학생이 그 학생을 설득하였다. 설득 시간은 짧았다.
그렇게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2017년부터 몽골 사막화 방지의 마지노선인 아르갈란트 솜 지역에서 매년 수백 그루의 나무를 직접 심고 있다. 학생들이 나무를 심는 초입에는 “생명•사랑•나눔의 숲”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숲은 대한민국 산자연중학교 학생들과 몽골 쎈뽈 학교 학생들이 1차 5개년 계획(2017년~2021년)으로 몽골 아르갈란트 솜 지역에 5개의 주제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으로 만들고 가꾸어 갈 지금과 미래,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녹색 징검다리 숲입니다.”
보리 심기를 통해 도전의 참 의미와 자세를 익힌 학생들은 자신들이 심은 나무가 누렇게 말라죽은 보리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학생들의 땀을 기억하는 나무들도 큰 숲이 될 준비에 바쁘다. 머지않아 그 숲 사이로 강이 흐를 것이며, 그 강을 따라 많은 생명들이 다시 더 큰 삶의 길을 낼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