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코노피슈테(Konopiště), 용의 기사가 잠든 곳.

황태자의 금지된 사랑

by 인선규

용(龍, Dragon)은 동양과 서양의 인식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어 중 하나다. 서양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며 영웅이 물리쳐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지만, 동양에서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존재이자 영웅에게 행운을 주는 존재로 인식된다. 나 또한 용은 어렸을 적부터 신비의 대상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인지 다른 근교보다 용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코노피슈테(Konopiště)를 가장 먼저 가고 싶었다.


코노피슈테는 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지역들과 다르게(예를 들면 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 지명 이름이 아닌 베네쇼프(Benešov)라는 지역에 속한 성 이름이다. 그래서 표를 살 때 '베네쇼프'라는 지명 이름을 얘기해줘야 문제없이 오늘의 목적지에 갈 수 있다.

베네쇼프는 프라하에서 서남쪽으로 25km 정도 떨어져 있는 비교적 가까운 근교 도시로, 기차를 탈경우 40분밖에 걸리지 않아 부담 없이 갈 수 있다.

베네쇼브 역

가까운 근교라는 생각에 여유 있게 출발했고 역시나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진 역의 풍경은 한산함 그 자체였다. 보통 어딜 가더라도 역 앞에는 식당과 펍,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이곳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은 무작정 ‘i'라고 쓰인 표지판을 찾아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했다. 한적한 유럽의 시골 도시 느낌이 물씬했다. 시내가 별로 크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나와 아이들이랑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한껏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가득했다. 오늘도 많은 곳을 돌아다니려고 계획 아닌 계획을 짰는데 유럽 사람들의 여유를 보고 있자니 나만 바쁘고 나만 급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시간도 되었겠다!' 인포메이션 센터 앞 공원 벤치에서 점심으로 싸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현지에서 사 먹는 것도 좋은 경험이고 음식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기회지만 가끔은 내손으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여유롭게 여행지를 즐기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점심을 먹고는 앞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어가서 마을에 대한 정보와 지도를 얻었다.

IMG_3766.JPG 베네쇼프(Benešov) 시내
아기자기하게 만든 마을 지도
페르디난트(Ferdinand) 맥주 공장

마을 지도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표시되어 있어서 상당히 마을이 클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다녀보니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어 걸어 다니기 수월했다.

관광할 곳은 교회와 탑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특이하게 공동묘지가 하나 있었는데, 대낮이어서 그런지 으스스한 느낌보다는 쓸쓸한 느낌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찾아가다 보니 페르디난트(Ferdinand)라는 맥주회사의 공장을 지나치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도 몇 번 봤던 맥주라 호기심이 생겨 공장 옆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정말 우리나라 시골의 막걸리 공장에서 막걸리를 팔 듯, 굉장히 작고 조촐하고 허름한 가게였다. 딱히 구경할 것도 없어 페르디난트 맥주만 한병 사서 나왔다(사실 체코어로만 안내되어있고 직원도 체코어 밖에 하지 못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 구경을 끝내고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용의 기사가 잠들어 있는 코노피슈테(Konopiště) 성으로 향했다. 동행이 없어 심심했던 나는 페르디난트 맥주를 친구 삼아 천천히 걸었다. 베네쇼프에서 성까지 거리는 지도상으로 대략 20분~30분 정도로 걷기에 멀게 느껴지지만 가는 길 내내 초원이 펼쳐져있어 천천히 풍경을 느끼며 걷다 보면 어느새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도착하게 된다.

IMG_3781.JPG 코노피슈테 성(Zámek Konopiště)으로 가는 길


앞서 말했던 것처럼 코노피슈테성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용의 기사'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나 중국 즉, 동양권 문화에서는 용이 굉장히 신성시되고 선한 이미지이지만, 서양권에서는 대부분 악한 존재로서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래서 보통 전설이나 신화를 보면 어떤 기사가 용을 물리쳐 나라의 영웅이 되거나 왕이 되는 이야기가 많다. 14성인 중의 한 명인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e)의 전설도 비슷한 맥락이다.


용을 무찌른 기사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e)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e)

성 게오르기우스가 리비아의 작은 도시를 지나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이 나라의 공주로 용의 제물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실 얼마 전 이 도시에 사악한 용이 나타났고 매일 양 두 마리를 제물로 요구했는데, 양들이 거의 바닥나자 사람과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이 날이 공주가 제물로 선택된 날이었다.

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성 게오르기우스는 달아나기는커녕 공주와 함께 기다리다 용이 나타나자 거대한 창으로 용을 찔렀다. 그리고 공주의 허리띠로 용의 목을 묶어 도시로 데려온 그는 도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죽이겠다고 하자 왕과 백성들이 기꺼이 동의하였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고, 왕을 비롯한 2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는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교회들을 잘 돌보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후에 그는 사람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성으로 이어지는 숲을 통과하자 서서히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입구를 통과해서 바라본 코노피슈테성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름다운 성의 이미지라기보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요새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코노피슈테성은 예식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는데, 마침 운 좋게 결혼식 장면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와 다른 서양의 결혼식 문화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와서 결혼을 축하하기보다는 가족끼리 조촐하게 의미 있는 날을 보내는 느낌이었다. 성문 앞에는 꽃과 레이스로 장식된 차들이 신혼부부를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었고, 성 안으로 들어가니 막 결혼한 신랑 신부가 가족, 친구들과 결혼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 아래쪽에는 결혼식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줄 장미정원이 있는데, 1989년에 조성되어 200종의 장미들이 재배된다고 한다. 아쉽게도 내가 방문했을 때는, 장미 재배시기가 아닌 까닭에 결혼식을 위해 장식해 놓은 꽃들을 볼 수 있었다.

IMG_3814.JPG 코노피슈테(Konopiště) 성의 전경

이런 고즈넉한 곳에서 결혼을 한다니, 정말 영화와 같은 상황이라 넋 놓고 결혼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성 구경은 결혼식이 끝난 뒤에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용의 이야기 때문인지 성의 정원 한가운데에는 용을 본뜬 우물부터 용을 잡으러 가는 창을 든 기사 동상과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물건 또한 용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사실 이곳이 유명해진 까닭은 용 때문이 아닌 맥주에서 언급되었던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때문이다. 이름을 들으면 생소할지 몰라도 세계 제1차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이라 하면 누군지 감이 잡힐 것이다.

잠깐 세계 제1차 대전의 발발 원인을 살펴보자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그의 부인인 조피(Sophie Chotek)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887년 Konopiště 성을 사들이면서 미래의 황제에 걸맞은 성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성이 용의 기사가 잠든 성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 게오르기우스를 동경했던 페르디난트 황태자

페르디난트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ranz Ferdinand d’Este)은 야심가로서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위 후계자이자 코노피슈테 성의 소유주였다. 그의 야심은 끝이 없었는데 한 가지 예로, 그의 명령으로 하루아침에 수 천 마리의 사슴이 사냥되어 그 뿔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성 복도에 진열되었을 정도다(현재도 각종 사냥감이 성에 보관되어있다.)

그러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새롭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용을 무찌른 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성 게오르니우스의 유물 보관 장소를 따로 만들었고 이는 곳 갖가지 유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유물이 본격적으로 모으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영국의 왕 조지 5세가 성 게오르기우스의 유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영국 왕의 콧대를 꺾기 위해 조지 5세 왕을 자신의 성으로 초대했다. 그 당시에 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유물을 수집했는데, 그의 수집품에는 파이프, 무기, 동전 등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사라예보에 방문한 1914년 6월 28일,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비록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불행한 운명으로 본인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집착 아닌 집착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이 성 게오르기우스의 소장품을 한곳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는 위 이야기에도 언급되었듯 사냥을 워낙 좋아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집트, 남아프리카,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가서 사냥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코노피슈테성 내부 복도에는 수많은 동물이 박제되어 빼곡하게 전시되어있다. 성 내부 투어를 통해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모았던 성 게오르기우스의 유물과 사냥을 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박제동물을 볼 수 있다.

한 번쯤은 성 내부 투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느긋하게 장미정원을 거닐며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그의 아내 조피처럼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된다. 바로 이곳이 옛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그의 아내 조피(Žofie Chotková)와의 비밀 연애 장소이기 때문이다.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조피의 금지된 사랑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조피의 첫 만남은 황태자가 프라하의 군인으로서 복무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날씬한 몸매에 검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 그리고 귀족적인 품격을 가진 조피를 보자 그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조피의 가문은 호테크 백작의 가문으로서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 가문이었으나, 당시 조피는 황태자와 결혼을 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이 둘의 연애는 큰 스캔들로 퍼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법, 결국 황태자는 황제 앞에서 그들이 결혼할 것임을 선언하게 된다.

이 소식은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황제 또한 이를 황권에 대한 반역으로 매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사랑을 굽히지 않고 차기 황권을 내려놓을 작정으로 결혼을 진행했다. 결국 황제는 황태자에게 1년의 말미를 주었고 1년 후에도 조피와의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결혼을 시키겠노라 하고 약속을 했다.

1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황제는 1899년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피는 귀천상혼이라는 이유로 가문에서 푸대접을 받게 된다. 결혼식에는 소수의 인원만 참여했고 황태자의 ‘정식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피는 이러한 냉대에 기죽지 않고 왕궁 생활에 적응했다. 조피의 헌신적인 내조로 인해 다혈질적이었던 황태자도 온화한 성격으로 변하고 황태자로서의 업무도 잘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 1914년 6월, 14년간의 노력을 통해 마침내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첫 번째 방문지가 사라예보였는데, 안타깝게도 결혼 14주년인 그날 그들은 사라예보에서 암살을 당하게 된다. 황태자는 죽는 순간에도 죽어가는 아내를 향해 “아이들을 위해 제발 살아 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사망하게 되고 이는 세계 제1차 대전의 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배경지식을 알게 되면 이에 대한 폭넓은 생각과 상상을 하게 되고 좀 더 깊이 그리고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코노피슈테 성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성 자체는 화려하거나 볼거리가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설이나 숨겨진 이야기를 모른다면 시시하다고 생각했을 법한 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알고 둘러보게 된다면 벽에 새겨진 장식 하나하나, 그리고 정원에 있는 동상 하나하나에 의미가 실제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성을 뒤로하고 역으로 향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처럼 화려한 볼거리나 호화스러운 성이 있지는 않지만 여러 전설과 성 게오르기우스의 유물, 그리고 비극적이지만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있게 한 장미정원을 거닐며 페르디난트 맥주를 홀짝인다면 프라하 근교에서 즐길 수 있는 이보다 좋은 데이트 코스가 있을까?

오늘도 옆자리를 차지한 가방을 바라보며 외롭게 프라하 역으로 돌아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