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성 바르보라 성당', '뜻밖의 인연'
쿠트나 호라로 향하는 아침,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니 오늘은 왠지 비가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프라하 중앙역에 도착해서 쿠트나 호라 메스토역 까지 가는 왕복 티켓을 구매했다. 쿠트나 호라에는 총 3개의 역이 있는데, 성 바르바라 대성당이 있는 메스토역(Kutná Hora město), 해골성당이 있는 세들레치역(Kutná Hora-Sedlec) 그리고 중앙역(kutná hora hlavnínádraží)이다. 프라하에서는 쿠트나 호라 중앙역까지만 기차가 운행하고 쿠트나 호라 중앙역에서 부터는 메스토역까지 미니 열차가 운행하기 때문에 메스토까지 왕복 티켓을 사면 걷지 않고 편히 미니열차를 타고 내리며 관광할 수 있다.
쿠트나 호라 까지는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라 창밖을 보다 보니 어느새 쿠트나 호라 중앙역에 도착했다. 환승시간도 5분가량 남아 천천히 역 사진도 찍으며 이동하고 있었는데, 마침 동양인이 나한테 쭈뼛쭈뼛 다가왔다.
“日本人ですよ?”(일본인이세요?)
“いいえ。韓国人です.”(아니요 한국인이에요.)
일본어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전부라 이렇게 간단하게 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나마 영어로 조금 소통이 돼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름은 나오미로 방학을 맞이해서 유럽여행을 왔다고 한다. 그중 프라하는 3박 4일 예정으로 오늘은 스카이다이빙을 할 계획이었지만 오전에 날씨가 안 좋아 취소가 되었단다. 그래서 급히 근교를 찾던 중 해골성당이 있는 쿠트나 호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말을 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쿠트나 호라 중앙역에서 해골성당으로 어떻게 가는지 몰라 일본인일까 싶어 말을 걸었단다. ‘직원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했지만 말투나 행동으로 봐서는 조곤조곤하고 소심해서 쉽지 않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방향은 같아 어색하지만 역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다.
나는 미니 열차에 탄 뒤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고자 정말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쿠트나 호라에 왔는지, 여기엔 어떤 전설이 있는지 이러 저러한 얘기들을 했는데, 은 요정 얘기에 흥미를 보이며 같이 가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침 혼자 다니기 심심한터라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우선 성 바르바라 대성당으로 향했다.
메스토역에서 성 바르바라 대성당 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로 그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나이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만 그래도 같은 대학생이어서 그런지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는데, 그중 연애에 대한 얘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일본 남자들은 보통 자상하지 못하고 무뚝뚝해서 길거리에서 손잡고 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워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 남자 배우들의 자상함을 보고 그 모습에 반해 팬이 된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 세대 때는 자상함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 ‘욘사마’나 다른 한국 배우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라고 한다.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성 바르바라 대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쿠트나 호라에서 최고 비경은 해골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아닌 성 바르바라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거 프라하의 부와 경제를 넘보던 이곳에서 까를교를 착안해 만든 다리 형태의 길로 걸어 들어갈수록 점점 성 바르바라 대성당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나오미도 여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성 바르바라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역시 20대 초반 여대생은 나라 국적 불문하고 비슷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 바르바라 대성당은 14세기 후반에 짓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완성된 공사 기간만 무려 6세기나 걸린 성당이다. 6세기에 걸쳐지어 저서 그런 것일까, 시간이 걸린 만큼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만큼 웅장하고 화려하다. 세들렉 성당(해골성당)과 함께 유네스코에 지정되는가 하면, 현재 체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기 고딕 건축물로 뽑히고 있다. 성당의 옆면은 성 비투스 성당의 뒤쪽과 유사하며 그 형태가 기하학적이다. 앞에 있는 잔디밭에 누워 성을 감상했다. 당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는 성 바르바라 대성당. 겉에서 보고 있자니 안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입장권을 사니 한국어로 된 안내책자를 줬다. 구간이 순서대로 나누어져 있어 책자에 순서대로 관람을 하니 이해도 쉽고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다음은 안내 책자의 전문이다.
A
이 성당의 건축은 1388년에 시작되었다. 공사감독은 유명한 뻬뜨르 빨레즈의 아들 얀 빨레즈가 맡았다. 교회는 측면회랑 채플이 있는 카테드랄 (프랑스 성당) 방식으로 계획되었다. 원래 카테드랄은 둥앙본당과 2개의 소성당까지 세 개의 본당이 있어야 하지만 곧 2개가 더 추가되어 5개로 계획이 바뀌었다. 1420년 후스전쟁 때문에 공사가 일시 중지되었다. 60년이 지난 후에 유명한 마띠야쉬 레이섹 (프라하 화약탑 건축가)이 교회의 건축을 맡았고 1499년에 그는 본당의 둥근 천장을 완성하였다. 이것의 높이는 33m이다. 1521년부터 1532년 까지 삐스또브출신 베네딕트 레이트가 (프라하성 블라디슬라브 홀 건축가) 교회하층 측면 회랑 위에 완전히 독립된 3개의 소성당을 세웠다. 성당의 높이가 30m, 길이가 70m, 폭이 40m이다. 1558년 서쪽(파이프 오르간 쪽)이 세워지고 건축은 미완성인 채로 중단되었다. (이 지역의 가장 큰 오 셀광산에 홍수가 나고 은 생상량이 줄어들면서 경제 원조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17,18세기 고딕의 쿧트나 호라가 바로크 도시로 바뀌어질 무렵, 바르보라 성당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건축양식의 변화는 18세기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 케이스에서 엿볼 수 있다. 오르간 자체는 새것이고 700개의 파이프, 세 개의 건번과 52개의 조절기가 달려있다. 오늘날 교회의 정면은 1884년에서 1905년 재건축기간 중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중앙제단이 신고딕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성녀 바르보라 (광산의 수호성녀)를 제단 오른쪽에서 볼 수 있다. 책과 탑을 들고 있는 여자이다.
B
이어져있는 세 개의 채플에서 1680년부터 1710년 사이에 만들어진 바로크형 제단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채플에서 1380년에 만들어진 고딕형 마리아상을 볼 수 있는데 마리아상은 오리지널이다. 1700년경 바로크 후기 다색장식화법 (polychrony)로 채색되었다. 창문은 모자이크가 아니라 유리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1898년에 그린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가장 최근 것은 1925년에 그린 것이다. 이것은 역사화가였던 프란티섹 우르반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C
이어져있는 세 개의 체플에서 우리는 15세기 말 후기 고딕 프레스크를 볼 수 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은 1490년 경에 만들어진 스미쉑 채플의 벽화들이다. 창 밑에서 스미쉑의 가족을 볼 수 있다. (스미쉑은 쿧트나 호라 지역의 귀족이었으며 성전건축의 총 감독이었다. 모든 체플의 건축비용을 기부하였다) 왼쪽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오른편에 시바의 여왕이 있다. 이 채플에 있는 작은 성모 마리아 제단은 15세기 말에 만들어졌다. 앞의 채플에서 가장 감동적인 그림은 예수를 어깨에 얹고 물을 건너가는 성 크리스토퍼의 거대한 그림이다. 마지막 채플은 광부의 채플이라고 불리운다. 창문 밑에 광부들의 생활을 그린 프레스크를 볼 수 있다.
D
이 곳의 남쪽 부분을 동전주조자들의 채플이라 부른다. 이 채플의 가장 중요한 유물은 반대편 서쪽 울타리 쳐진 벽에 있다.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 (제수이트파의 스페인 선교사 1506~52)는 서쪽 벽 그림들 끝에 적어도 2개의 제단을 합하여 변경을 시도하였다. 아래 세 개의 흥미 있는 장면들은 15세기 초기 작품이다. 위에는 광부들과 동전주조자들이 작업대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와 함께 있는 이 그림은 약 1463년경 그려졌다.
E
광부의 조각상은 1700년경 작품이다. 광부는 흰색의 광부복을 입고 한 손에 등불을 다른 손에는 연장을 들고 있다. 허리에 두른 가죽 애이프런은 일하는 동안 는 보호대로, 또 광산 밑으로 미 끌어내려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광부들은 일주일에 6일, 하루 10~14시간 동안 일했다. 16세기 쿧트나호라의 은광들은 약 500m 지하에 있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깊은 광산이었다.)
F
본 당의 둥근 천장에는 길드(조합)와 시민들의 문장들이 그려져 있다. 교회 위 층의 벽 코너에는 정의, 용감, 조심성, 친절과 같은 17세기 전기 기독교의 덕목을 조각한 커다란 나무조각상이 있다. 높이는 각각 3.5m이다. 돌로 만들어진 설교단은 석조물제작자 레오폴드가 1560년에 만들었는데 나무판벽과 지붕이 부착되어있다. 훌륭하게 조각된 의자들은 17세기 말에 만들어졌다.
G
북쪽 채플은 제수이트 교단의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게 봉헌된 것이다. 고해실은 1679년에 만들어졌고, 정 엄한 반대편 벽의 바로크 프레스코는 1746년에 그려졌다. 이것은 체코제수이트였던 얀 까렐 꼬바즈의 작품이다. 팜펠루나 전투에서 부상당한 성 이그나티우스의 환상을 표현하였다.
H
성물보관실의 문은 17세기 것이나 그 입구는 140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문의 나무틀은 1615년에, 내부(안의 것)는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 성가대석은 1490년에 만들어진 오리지널이다. 의자들의 장식은 성당 외부의 돌 장식과 매우 흡사하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의자들의 장식이 다 다르다는 점이다.
성당 내부는 외부에서 봤을 때 보다 더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다. 대부분의 성당처럼 스테인드 글라스와 파이프 오르간이 있었는데, 다른 성당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벽면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와 천장에 새겨진 보헤미아 왕가와 건축 비용을 부담한 길드의 문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화려한 조형물 까지, 성 마리아 대성당이 듣는 성당이었다면, 성 바르바라 대성당은 눈으로 보는 성당이라고 생각된다.
이곳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가톨릭에서 종교적 목적을 갖고 지어진 게 아닌, 광부들이 그들의 돈으로 그들의 수호성인을 위해지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성당 내부에는 수호성인,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들 모습을 조각화한 상도 있다. 이를 통해 지하 600m의 캄캄한 은광에서 목숨을 걸고 하루 종일 일했던 광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던 성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또한 프레스코화를 통해 그 당시 광부들의 삶과 체코인들의 일상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도 높다.
웅장한 성을 뒤로 하고 우리는 성 밖으로 나왔다. 성 밖에는 성으로 걸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주 멋진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쿠트나 호라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멋진 비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하루 성당 안이나 은광처럼 시야가 좁은 곳에 있다, 탁 트인 전경을 보니 좀 더 시원하고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성 바르바라 대성당까지 보고 나니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마침 오는 기차에서 쿠트나 호라 맛집을 미리 추천받았기 때문에 나오미와 함께 그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 레스토랑의 이름은 ‘다츠스키’라는 곳으로 창업자가 직접 주조하는 맥주를 판매하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명한 점은 바로 적당한 가격에 사슴고기 스테이크를 맛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중세의 기운이 느껴졌다. 점원들의 복장 또한 중세의 옷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다렸던 음식이 나오고 나오미가 한 입 먹는 순간, 일본 특유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웃음을 지었다. 자신 있게 데려왔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라고 생각했던 걱정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문제는 식사를 마친 후에 일어났다. 비가 올 것이란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체코에서 처음 겪어보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산도 없던 우리는 비를 보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식당 처마 앞에서 비 오는 것을 보며 서 있자니 '가을동화'가 생각나기도 하고 나오미에게 나는 잔잔한 라일락 꽃 향기에 설레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던 중 불현듯 '비를 맞으며 같이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슬쩍 물어봤다. 나오미는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내 셔츠를 우산 삼아 같이 뛰기 시작했다. 같이 신발을 벗고 내 셔츠를 우산 삼아 비속을 뛰고 있자니 마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했다. 걸어 올 때는 참 먼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기차역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프라하로 돌아왔고 서로 연락처를 물어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비록 비 때문에 더 이상 같이 쿠트나 호라를 보지 못하고 프라하고 돌아왔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글을 쓰는 지금도 따듯한 설렘에 두근거리게 된다. 문득 '연락처를 받아놓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짧았던 만남이었지만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좋은 만남에 나에겐 비가 왔던 쿠트나 호라가 따듯하게 느껴진다. 현재 우리는 관광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가서 인증샷을 찍고 SNS에 올리는 게 목적이 된지 오래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과 인연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을 혼자만이 간직하는 것, 이게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