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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그날 아침의 남자


 1.
 인류가 오래 전부터 널리 사용한 금속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재활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백금이나 희토류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마도 금과 은일 것이다. 현대에 접어들어 정밀회로에 구리 대신 은을 사용하고 휴대폰에도 금을 사용하면서 산업적 용도를 지니게 되었으나 아주 오랫동안 금과 은은 산업적 용도 대신 상업적 용도, 그러니까 화폐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이게도 오랫동안 산업적 용도 없이 화폐로 기능한 부분이 금과 은을 활발하게 재활용한 이유다.

 왕과 귀족의 장례를 치르면서 부장품으로 묻는 사례 그리고 운반하던 선박이 침몰하거나 도시가 파괴되면서 소실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한번 채굴된 금과 은은 끝없이 다시 사용되었다. 정확히 확인할 방법이 없고 또 상당히 드물겠으나 현대에 유통되는 금과 은 가운데 중세시대 혹은 로마시대에 채굴된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 않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1500년대 멕시코에서 채굴된 은이 19세기와 20세기까지 국제교역에서 화폐로 널리 사용된 것이다. 

 이른바 '멕시코 은' 혹은 '묵은(墨銀)'이라 불린 이 은은 스페인이 중남미를 정복하면서 채굴하기 시작했다. 당시 스페인 왕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를 겸했고 스페인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적 초강대국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이 멕시코에서 채굴한 은은 국제교역에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필리핀도 스페인 식민지여서 멕시코 은은 동아시아에도 스며 들었다. 후에 스페인의 위세가 꺽이고 영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물려 받았으나 멕시코 은의 지위와 위력에는 변함 없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으나 포루투칼의 방해-대항해시대 초기 스페인과 포루투칼은 곳곳에서 부딪혀서 결국 교황의 중재로 스페인은 아메리카, 포루투칼은 아시아에서 우선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예외적으로 필리핀은 아시아에 있으나 스페인 식민지, 브라질은 아메리카에 있으나 포루투칼 식민지였다-와 네들란드, 영국 같은 강력한 경쟁자 덕분에 동양 무역을 원활히 전개하지 못했던 스페인과 달리 멕시코 은의 새로운 지배자인 영국은 인도를 발판삼아 동양 무역에 주력했다. 처음 영국의 무역 형태는 인도에서 생산한 목화를 영국으로 가져와 가공한 다음 다시 인도에 파는 것이었다. 이런 무역은 2차 대전 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중국과 교역을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영국 상류층이 탐내는 사치품이었으나 정작 영국은 중국에 팔만한 물건이 없었다. 인도의 목화로 만든 면직물이든, 영국의 양털로 만든 모직물이든 중국 상류층의 흥미를 끌기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 무역은 늘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적자로 끝났고 엄청난 멕시코 은이 중국으로 흘러갔다. 당연히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할 방안에 몰두하는데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했다. 

 청나라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약 100년 동안 중국 역사 최고의 번영을 누렸으나 관료제는 비대해져 부패했고 한때 만주를 휩쓸던 군대는 나약해졌으며 산업은 활력을 잃었다. 그러면서 '세기말 현상'에 가까운 퇴폐적 풍조가 유행했는데 아편 남용은 그 정점에 있었다. 황제부터 평민까지, 늙은이부터 아이까지 아편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몇 차례 아편 남용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의 이런 상황을 알아차린 영국은 인도에서 대규모로 아편을 재배해 중국에 팔기 시작했다. 이런 아편 무역은 영국이 이전까지 중국과 무역에서 입은 적자를 만회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영국은 더욱 아편 무역에 열중했고 덕분에 중국의 아편 남용은 심각해져 나라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청나라 황제는 '결코 매수할 수 없는 인간'에게 아편 퇴치 임무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황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고 아편 무역이 이루어지는 광둥에 파견했다. 영국 상인은 처음에는 임칙서의 강경한 태도를 '뇌물을 더 받기 위한 수작'으로 치부했으나 임칙서가 압수한 아편 2만 상자를 폐기하자 자신들의 착각을 깨달았다. 결국 영국은 상인을 보호하고 아편 무역을 지속하기 위해 함대를 출동시켜 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의 굴욕적 패배와 영국의 홍콩 지배로 끝나는 이 전쟁이 바로 '아편 전쟁'이다. 

 청나라 시기 뿐 아니라 아편을 비롯한 마약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의 몸과 마음을 좀 먹었다. 20세기 들어서는 아편 같은 전통적 마약 뿐 아니라 새로운 물질들이 개발되었고 의학적으로 허가된 제품조차 사회 문제를 일으킬 때가 종종 있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서는 '적절하게 허가받고 처방한 약물로 인한 중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1980년대 대표적인 팝스타 가운데 드물게 모범적인 이미지를 지녔던 프린스의 갑작스런 사망도 합법적으로 처방받은 펜타닐(마약성 진통제의 일종)이 원인이었다. 

 2.
 응급실 문이 열리고 키가 크지 않은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40대라 하기에는 어색하나 60대보다는 확실히 젊어 보이는 남자는 양복을 갖추어 입었다. 그러나 셔츠는 구겨졌고 넥타이는 헝클어졌으며 충혈된 눈, 붉게 상기된 피부,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미루어 술취한 상태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의식은 비교적 명료했으나 발음이 꼬이고 1-2미터 곁에만 가도 심하게 술냄새가 풍기는 것으로 미루어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음주를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비슷한 또래이나 4-5살 가량 나이 많아 보이는 여자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짙어 어울리지 않는 화장과 지나치게 화려해서 싸구려 느낌을 주는 의상으로 미루어 여자는 아마도 남자가 술을 마신 업소의 사장 혹은 마담일 가능성이 높았다. 

 간호사가 측정한 혈압과 맥박, 체온,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다. '어디가 불편하시죠?'란 물음에도 남자는 질끈 눈을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제대로 협조하지 않아 제한적이었으나 시행한 이학적 검사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야, 원장, 기록 봤지? 지난 번에 맞은 주사 처방해!'

 이학적 검사가 끝날 무렵 사내는 갑자기 눈을 부릅 뜨고 거칠게 소리쳤다. 사내에게 다가가기 전 의무기록을 살펴봐서 사내가 응급실을 찾은 목적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1-2년 전부터 사내는 빈번하게 음주 상태로 응급실을 방문했고 늘 수액과 안정제를 요구했다. 자신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가 안정제를 요구하는 이유였다. '얼마나 힘들면 술을 마셨겠느냐, 그러니까 빨리 안정제나 달라'는 논리였는데 그런 사유로 지나치게 자주 안정제를 정맥 주사로 투여 받는 것은 사실상 중독을 의미한다. 

 "비슷한 상황이라고 무조건 지난 번에 투여했던 약물을 처방하지 않습니다. 특히 안정제는 의존성이 있는 약물입니다. 특별한 이유없이 단순히 스트레스 많다는 이유만으로 안정제를 정맥 주사로 처방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술취한 사람 특유의 흐리멍텅하고 공격적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환자가 달라면 주지. 무슨 말이 많아! 기록 못봤어? 차트 있을거 아냐! 챠트! 지난번 처방대로 처방하라고!"

 그러나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됩니다. 지난번 의사가 왜 안정제를 처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지금 증상으로는 안정제를 처방할 수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처방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하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대화는 의미 없었다. 나는 진료용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환자에게 수액과 진경제를 처방했다. 환자는 술 때문에 피곤했기 때문인지 간호사가 수액을 연결하자 몇 분 정도는 조용했다. 그러나 곧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야, 원장 불러봐. 저기 저 의사 불러보라고! 안정제 달라니까! 안정제! 지난번에 맞은 주사 달라고!"

 나는 환자에게 다가가 재차 현재 증상으로는 안정제를 투여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아울러 안정제는 의존성 있는 약물이며 일반적으로 하나의 물질에 중독된 사람은 다른 물질에도 쉽게 중독되기 때문에 알콜 중독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는 더욱 안정제 투여에 신중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근데 뭐가 이렇게 딱딱해요! 왜 이리 융통성이 없어요!"

 이번에는 환자와 함께 온 여자가 신경직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상황에서는 융통성보다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지난번 의사는 마음이 물러서 안정제를 처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까칠하고 강팍한 인간이라 원칙에 어긋나게 투여할 수 없습니다."

 물론 대화는 그 정도에서 마무리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 모두 화내고 욕하고 소리쳤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안정제를 처방하지 않았다. 

 3.
 안정제나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하는 환자는 외래보다 응급실에 많다. 그들은 깊은 밤이나 이른 아침 충혈되고 공격적이나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응급실을 찾아 안정제나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한다. '진찰은 필요없으니 이전에 처방했던 주사를 그대로 달라'고 요구하는 부류는 사실상 '미숙한 초보자'에 해당한다. '내가 아프다고 하는데 왜 주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는 부류도 역시 투박하고 어리석은 하수다. 경험이 쌓이면 2-3년 전에 작성된 꼬질꼬질한 진료의뢰서나 그런 질환을 제대로 진단할 수 없는 조그마한 병원의 소견서를 들이미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마약성 진통제나 안정제를 투여할 수 밖에 없는 증상을 교묘하게 흉내내거나 아주 정중하게 차근차근 자신이 왜 그런 약물을 지금 정맥 주사로 맞아야 하는지 간증하는 부류가 가장 전문가다. 

 어쨌거나 불법 약물이 아니라 병원에서 합법적으로 처방한 약물에 중독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이면에는 환자 뿐 아니라 '골치 아프게 설명하며 험한 꼴 당하느니 그냥 주자'는 몇몇 의사의 지나친 융통성도 한몫할 것이 틀림없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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