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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수수께끼 풀이


 1.
 이른 아침 응급실을 찾은 이유치고는 환자의 증상은 독특했다. 갑작스레 왼쪽 허벅지 뒷편이 통증과 함께 당기면서 펼 수 없었고 10-20분이 지나자 호전되었으나 혹시 뇌경색일까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해 몇 시간 고민 끝에 부랴부랴 응급실을 찾은 상황이었다. 환자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한편에서 바라보면 과도한 불안이기도 했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 가운데 상당수도 어렵지 않게 진단할 수 있는 경미한 근육경련, 이른바 '다리에 쥐가 내린다'고 표현하는 증상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혈압, 체온, 맥박,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고 왼쪽 허벅지 뒷편에 여전히 당기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으며 이학적 검사 역시 뚜렸한 문제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뇌경색 증상은 발음이 어둔해지거나 오른쪽이면 오른쪽, 왼쪽이면 왼쪽, 몸의 한쪽이 마비되고 힘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거나 한쪽 눈이 감기지 않는 안면마비 같은 증상도 나타날 수 있구요. 그리고 뇌출혈이라면 극심한 두통과 함께 심한 구토가 나타나고 그러면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 현재 증상은 그런 질환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뇌경색과 뇌출혈보다는 단순한 허벅지 근육 경련일 가능성이 높고 지금은 증상 자체도 거의 호전된 상태여서 응급실 진료보다는 정형외과 외래 진료가 적절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설명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뇌경색과 뇌출혈에 해당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말에 오히려 눈물이 맺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아팠는지 긴 얘기를 시작했다. 경미한 노년 우울증이나 신체화 장애에서 흔한 반응이었는데 한 가지 부분이 이상했다. 환자는 4-5주 동안 전신 쇠약감으로 개인 의원에서 비타민 치료와 정맥 영양제를 투여받았다고 진술했는데 맨 처음 개인 의원을 찾은 증상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계단을 오르다가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 갔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환자에게 허리나 무릎이 아파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졌는지 아니면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졌는지 질문했다. 환자는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졌다고 대답했고 나는 다시 예전에도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지 못했던 것이 좀더 심해진 것인지 예전에는 계단을 쉽게 올랐는데 4-5주 전부터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차서 단숨에 오르지 못하고 두어번 쉬어야 했는지 물었다. 환자는 몇 달 전까지도 한번에 계단을 올랐는데 4-5주 전부터 숨이 차서 도중에 쉬어야만 계단을 오를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형외과 외래로 보낼 환자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단숨에 오르던 계단을 두어번 쉬어야할 만큼 숨이 차다면 심장이나 폐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폐결핵 같은 과거력도 없고 청진 결과 천명음(wheezing sound, 천식이나 만성 폐쇄성 폐질환에서 흔히 관찰된다)이 없는 정상 폐음이라 폐 병변 가능성은 낮았다. 그래서 나는 심전도부터 시행했다. 어떤 원인이든 최근 심장 기능이 감소했다면 이전에는 쉽게 오르던 계단을 잘 오르지 못하고 예전에는 20분 이상 잘 걸었으나 이제는 5분만 걸어도 숨이 차서 쉬어야 하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전도에는 별다른 이상이 관찰되지 않았다. 흉부 X-ray에서도 심비대(cardiomegaly, 심장은 기능이 감소하면 커진다)나 폐부종(pulmonary edema, 심장 기능이 감소하여 폐에 물이 차는 증상)은 관찰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4-5주 전부터 환자가 호소하는 '계단을 오를때 숨이 차는 증상'은 심장과 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때쯤 심전도를 찍은 후 흉부 X-ray를 찍기 전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시행한 혈액검사 결과가 나와 마지막 남은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예상대로 혈색소(Hemoglobin, 적혈구의 산소 운반 능력과 관계있다) 수치가 7.0으로 심각하게 감소되어 있었다. 혈색소 수치의 정상 범위가 12-16이며 환자의 나이를 감안하면 10-11 정도는 큰 문제없으나 7.0은 심각할 만큼 낮은 수치다. (일반적으로 혈색소 수치가 8 이하로 감소하면 수혈을 고려한다) 환자가 이전에 쉽게 오르던 계단을 4-5주 전부터 중간에 쉬지 않고서는 오르지 못했던 것도 혈색소 수치가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평지를 걷는 것과 달리 평지를 뛰거나 계단을 오르려면 근육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혈액 공급이 많아져 더 많은 산소를 근육에 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폐에 문제가 생겨 외부 산소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심장의 펌프 기능에 문제가 생겨 근육까지 혈액을 충분히 보내지 못해도 달리기와 계단오르기에서 호흡곤란이 나타나지만 폐에서 충분히 외부 산소를 받아들이고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해서 충분한 혈액을 근육에 공급해도 혈액 자체의 혈색소 수치가 낮아 산소를 제대로 운반하지 못하면 역시 호흡곤란이 나타난다. 결국 환자가 4-5주 전부터 호소했던 증상의 원인은 혈색소 감소 그러니까 빈혈(anemia)이었다.

 빈혈 자체는 수혈로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으나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통사고나 낙상, 날카로운 물체에 의한 복부 손상 따위로 인한 급성 출혈을 제외하면 빈혈의 원인은 크게 혈액질환과 위장관 출혈로 나누어진다. 물론 만성 신부전과 위암으로 위절제술을 시행한 경우에도 빈혈이 나타날 수 있으나 일단 환자는 그 두 부류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백혈병 같은 혈액 질환으로 인한 빈혈의 경우에는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에도 이상이 나타나고 특히 백혈구는 비정상적인 형태가 관찰될 때가 종종 있는데 역시 환자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물론 말초혈액도말 검사(peripheral blood smear, 현미경으로 말초혈액의 혈구 모양을 관찰하는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했으나 그때까지 얻은 정보로도 혈액질환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부 위장관 출혈, 그러니까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으로 인한 출혈로 빈혈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알아보기로 결정하고 위내시경을 시행할 소화기내과 당직 의사를 호출했다. 위내시경에서 출혈 원인이 될만한 뚜렸한 병변을 찾지 못하면 보다 정밀한 혈액내과 진료를 위해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해야 한다는 설명을 보호자에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고서. 

 2.
 의대생 시절 나를 괴롭힌 최악의 악몽은 '평생 좁은 진료실에서 비슷한 환자를 보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었다. 의대생 시절 뿐 아니라 고등학생 무렵 '의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암묵적 지시에 직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인 나는 종군기자, 연극배우, 인류학자처럼 늘 긴장 넘치는 삶을 살거나 간접적으로나마 다양한 인생을 체험하거나 혹은 인간을 한낱 동물로 바라보며 흥미진진한 수수께기를 푸는 직업을 꿈꾸었다. 결국에는 냉정하게 판단해서 현실적 이유로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앞서 말했듯 덕분에 의과대학 시절 내내 '평생 좁은 진료실에서 비슷한 환자를 보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다행히 응급의학과 의사로 일한 지난 10년 남짓한 시간을 돌아보면 나의 악몽은 억지스런 우려에 불과했다. 응급실에서 다양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은 '평생 좁은 진료실에서 비슷한 환자를 보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악몽'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어떤 탐정소설보다도 흥미진진한 수수께끼 풀이에 가깝다. 같은 증상도 원인은 다양하며 환자와 보호자는 의료인이 아니라서 중요한 정보를 이해하기 어렵게 전달할 때가 많다. 심지어 윗 글의 환자처럼 정작 응급실을 찾은 이유는 대수롭지 않은데 다른 부분에서 심각함 문제를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그래서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응급실에서 조그마한 부주의, 잠깐의 태만, '설마'하는 태도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치닫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어쨌거나 나는 같은 이유로 아직까지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삶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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