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그리고 전원
1.
파라켈수스는 '모든 약은 독이다'고 했다. 물론 '용량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는 조건을 붙였으나 대부분의 약이 작든 크든 독성을 지니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주사와 경구약을 처방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일단 주사든 경구약이든 대부분 약물은 간이나 신장에서 해독되고 배설된다. 따라서 간독성과 신장독성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문제라 예를 들어 만성 신장병 환자의 경우 신장독성이 있는 약물을 부주의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할 때 빈번히 시행하는 CT는 조영제가 신장을 통해 배설된다. 물론 조영제의 독성은 크지 않아 신장 기능이 정상인 환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신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에서는 자칫 심각한 신장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조영제를 사용하는 CT의 경우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혈액검사를 통해 크레아티닌 수치가 정상 범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시행한다. 그런데 때때로 정상 범위의 크레아티닌 수치만으로는 신장 기능을 판단할 수 없는 사례가 있다. 크레아티닌은 근육량과 관계 있어 극단적으로 근육량이 적은 노인이나 뇌병변 같은 질환으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지낸 환자의 경우 신장 기능이 심각하게 감소해도 크레아티닌 수치는 정상 범위일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크레아티닌 수치가 아니라 사구체 여과율(GFR, Glomerular Filtration Rate)을 확인해야 한다. 90-100 이상이 정상 범위인 사구체 여과율이 40-50 이하로 감소한 경우 조영제를 투여하는 CT는 대단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날 오전의 환자도 그랬다.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내원한 환자는 혈압과 체온은 정상 범위였으나 이전에 담관 결석(CBD stone, common duct stone)으로 시술받은 병력이 있었다. 이학적 검사 결과 전형적인 우상복부 통증(RUQ pain, Right upper quadrant pain)이 확인되어 담관 결석의 재발이나 담낭염(cholecystitis)이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환자에게는 몇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었다. 인근 대학병원에서 심장질환과 뇌경색으로 꾸준히 진료받고 있는 고령 환자라 우리 병원에서 담관 결석에 대한 내시경역행췌담관조영술(ERCP, endoscopic retrograde cholangiopancreatography)이나 담낭염에 대한 담낭절제술을 시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전에 소화불량 증상으로 소화기내과 외래에서 진료했을 때에도 '복통이 나타나면 대학병원 진료가 필요하다'고 설명한 상태였다. 또 이전에 소화기내과 외래에서 시행한 혈액 검사 결과 크레아티닌 수치는 정상 범위이나 사구체 여과율은 30-40 사이를 오갔던 환자라 조영제를 사용한 복부 CT 촬영이 불가했다. 따라서 환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첫번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인근 대학병원 전원'이다. 이른바 '안돼요, 안돼 전원'인데 대단히 무책임한 결정이다. 고령이며 기저질환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학병원으로 전원하면 전원 과정, 새로운 진찰과 검사, 진단과 치료에 비효율적으로 긴 시간이 소요된다. 우상복부 통증이 있다고 모두 담관 결석이나 담낭염 환자는 아니어서 검사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어 퇴원할 수도 있다.
두번째는 일단 혈액검사를 시행하고 대학병원으로 전원하는 방법이다. '안돼요, 안돼 전원'보다는 낫지만 혈액검사만으로는 질환을 완전히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혈액검사는 결과가 나올때까지 30-4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방법도 환자 입장에서는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세번째는 조영제를 사용하는 복부 CT에 비하면 정확하지 않으나 사구체 여과율이 낮은 환자이니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는 복부 CT를 시행해서 담관 결석과 담낭염을 감별하고 그에 해당할 경우 대학병원으로 전원하는 방법이다.
세번째 방법이 환자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이어서 나는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복부 CT를 시행했다. 복부 CT 결과 담관 결석은 뚜렸하게 관찰되지 않았으나 정상보다 훨씬 커진 담낭(쓸개) 주변으로 염증이 심했고 담낭 결석도 관찰되었다. 전형적인 급성 담낭염에 해당했고 환자의 나이와 기저 질환, 건강 상태를 고려하면 담낭절제술보다는 경피경 간담낭 배액술(PTGBD, Percutaneous Transhepatic Gall-bladder Drainage)이 적절했다. 나는 인근 대학병원에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환자를 전원했다.
그런데 전원할 환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2.
환자와 보호자가 '어제도 응급실에 왔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응급의학과 의사가 매우 싫어하는 상황이다. 굳이 따지면 응급실에 출근했는데 수간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어제 진료했던 OOO씨 기억하시죠?'라고 묻는 정도가 응급의학과 의사가 그보다 더 싫어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두 상황 모두 환자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의 보호자도 '어제 응급실에 왔었는데'라고 말을 시작했다. 다만 의무기록을 확인한 나는 이기적인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데 하루 전 응급실에서 환자를 진료한 의사는 내가 아니라 동료 응급실 전담의사였기 때문이다. 그가 작성한 의무기록에 의하면 1일 전 내원했을 때 환자는 구토와 전신쇠약, 근육통, 명치 통증을 호소했으나 혈압과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그러나 다시 내원한 환자는 40도 가까운 고열과 아주 심한 명치 통증을 호소했고 이학적 검사에서 명치 압통과 우상복부 압통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환은 간 농양(hepatic abscess)이었다.
쉽게 말해 감염으로 간에 고름이 생기는 간 농양은 경우에 따라 패혈증으로 악화할 가능성이 높은 심각한 질환이나 초기 증상이 명확하지 않아 늦게 발견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초기에는 대부분 발열과 근육통 외 특별한 증상이 없어 '몸살'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쉽고 특히 노인 환자나 당뇨병이 있는 경우 우상복부 통증과 압통 같은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아울러 담낭 농양(gall bladder empyema)이나 십이지장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 같은 질환도 감별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복부 CT를 시행했다.
복부 CT 결과 예상대로 지름 5cm 가량의 큰 농양이 간에서 확인되었다. 나는 즉시 정맥 항생제를 처방했다. 고열이 있으나 의식이 명료했고 혈압은 정상범위에 있어 패혈증 쇼크 단계는 아니어서 우리 병원 중환자실로 입원해서 영상의학과에 의뢰해 경피적 배액술(percutaneous drainage) 시행을 고려할 수 있는 사례라 판단했다.
그러나 혈액검사 결과를 확인하자 나의 판단은 달라졌다. 간농양이니 감염이 있을때 증가하는 C반응 단백질(CRP, C-reactive protein) 증가와 간 효소수치 상승은 예상했으나 환자의 백혈구 수치가 800 정도였고 혈소판 수치도 5만을 가까스로 넘는 상태였다. 백혈구 수치의 정상 범위는 4,000~10,000 사이다. 일반적으로는 감염이 진행하면 백혈구 수치가 증가하나 감염이 아주 심각하면 오히려 감소하는데 환자가 거기에 해당했다. 아울러 15만~40만 사이가 정상 범위인 혈소판 수치의 감소 역시 극단적으로 심각한 감염을 의미해서 아직 의식이 명료하고 혈압이 정상 범위에 있으나 환자는 패혈증(sepsis)이 틀림없었다. 세프트리악손(ceftriaxone)과 메트로니다졸(metronidazole)을 정맥 항생제로 투여했으나 머지 않아 혈압이 곤두박질치며 패혈증 쇼크(septic shock)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내과에 특화된 병원이며 정식으로 허가받은 중환자실이 있어 그런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시설은 아니나 우리 병원에 입원하는 것과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환자에게 좋을지 판단해야 했다. 결국 내과 당직의사와 나는 고민 끝에 인근 대학병원으로 환자를 전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인근 대학병원에 수용 가능 여부를 문의하고 환자를 전원했다.
3.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시절 나는 전원 문의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때가 벌써 8-12년 전이라 현장에서 응급실까지 이송 뿐 아니라 병원 간 전원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중소병원에서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원 문의하며 환자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주지 않는 사례도 많았고 아예 연락하지 않고 무작정 응급실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장중첩증 소아가 초음파를 이용한 정복술을 시행할 시기를 놓치고 수술조차 적절한 시기에 받지 못하며 응급실을 떠돌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해 언론의 관심이 모아 지기도 했다.
대단히 안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건을 겪으면서 다행히 병원 간 전원은 다소 개선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레지던트 시절과 달리 2차 병원 응급실에 일하면서 인근 대학병원에 전원 문의하는 위치가 되었다. 물론 인구 100만 넘는 도시에 정식으로 허가받은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이 3곳 뿐인 독특한 상황 때문에 여전히 인근 병원으로부터 전원 문의를 적지 않게 받으나 그래도 레지던트 시절보다는 다른 병원에 전원 문의할 때가 많아졌다. (우리 병원은 2차 병원이나 정식 허가받은 중환자실이 있는 병원 3곳 가운데 하나다)
레지던트 시절 나는 환자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전원 문의와 아예 거짓말이 가득 한 전원 문의에 분노했다. 의사가 아니라 보호자, 원무과 직원, 간호사, 간병인을 시켜 전원 문의하는 관행을 경멸했고 전원 문의없이 응급실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에는 해당 병원의 의사를 두들겨 패고 싶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병원으로 전원문의할 때 최대한 정확하고 효율적인 정보를 얘기하려 노력하고 환자에게 우리 응급실에서 가능한 최선의 치료를 하고 보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어떤 의사로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원문의하고 환자를 보내는 내가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현장 의료진에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최소한 '욕먹지 않는 의사'에는 해당할까?
글쎄. 나도 그걸 확신할 수 없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