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혈당과 진료의뢰서
1.
119 구급차의 붉은 불빛이 응급실 밖에서 반짝였다. 이윽고 구급차 뒷문이 열리고 먼저 내린 구급대원이 이동식 침대를 힘껏 당겼다. 나는 이동식 침대의 접근에 맞추어 버튼을 눌렀고 기계음과 함께 스르르 응급실 정문이 열렸다. 진료용 컴퓨터 앞 의자에서 일어나 무슨 환자일지 약간 긴장한 자세로 바라보는 나에게 구급대원은 '저혈당 환자입니다'고 말했고 '구급차에서 측정한 혈당은 50입니다'고 덧붙였다.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서 응급실 침대로 옮기는 동안에도 환자는 공중에 주먹을 난폭하게 휘둘렀고 정확한 뜻을 알기 힘든 괴성을 질렀다. 간호사가 측정한 혈압, 맥박, 체온,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으나 환자의 손가락 끝을 란셋으로 찔러 측정한 혈당은 역시 50을 넘지 못했다.
정상 범위 이하의 혈당(정상 혈당은 70-110)과 혼란스런 의식 상태, 난폭한 행동은 저혈당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단순히 말해 당뇨병은 혈당이 지나치게 증가하는 질환이며 당뇨병 치료제는 혈당을 낮추는 약물이다. 그래서 당뇨병 환자가 당뇨병 치료제를 복용하면 지나치게 높은 혈당을 어느 정도 정상 범위에서 유지할 수 있으나 때때로 혈당이 지나치게 떨어지는 문제가 생긴다. 지나치게 혈당이 떨어지는 원인은 다양하나 크게 두 가지인데 우선 생명체인 인간이 고정된 상태에 있지 않듯 질병 역시 악화와 완화를 반복해서 때로는 복용하는 당뇨병 치료제가 증상에 비해 너무 강할 때가 있어 저혈당이 발생한다. 다음으로는 어떤 이유든 환자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다. 의사는 당연히 환자가 정상적으로 식사한다는 전제 아래 당뇨병 치료제를 처방하기에 식사량이 확연히 줄거나 아예 한두끼 식사를 건너 뛰면서 당뇨병 치료제를 똑같이 복용하면 저혈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어떤 이유든 혈당이 70 아래로 떨어지면 식은땀과 무기력감 같은 증상부터 나타나고 혈당이 감소할수록 증상은 심해져 괴성을 지르며 난폭한 행동을 하는 착란상태를 보이다가 최종적으로는 의식을 잃는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뇌세포가 당분만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혈당에 빠지면 뇌세포가 에너지를 얻지 못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그러면 몸의 다른 부분을 통제하지 못해 괴성, 난폭한 행동 같은 착란 상태가 나타나며 나중에는 완전히 의식을 잃는다. 물론 정맥주사로 포도당을 투여해서 혈당을 정상범위로 끌어 올리면 증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만 1-2시간 정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저혈당 상태로 방치되면 정맥주사로 포도당을 투여해서 혈당을 정상범위로 만들어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저혈당성 뇌병증(hypoglycemic encephalopathy)이 나타날 수 있다.
(혼자 사는 당뇨병 환자가 밤새 저혈당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겨우 발견되어 응급실로 내원하는 경우가 저혈당성 뇌병증의 전형적인 사례다)
다행히 환자는 오랫동안 방치된 사례는 아니었고 50% 포도당 100cc를 정맥주사로 투여하자 명료한 의식 상태를 회복했다. 여기까지는 저혈당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했다. 인슐린 주사를 맞는 환자라면 꼭 입원 치료가 필요없으나 경구 혈당강하제를 복용하는 환자라면 24시간 정도는 입원해서 지켜보는 것을 권유한다. 물론 저혈당을 몇번 경험한 환자 가운데 상당수는 '혈액검사에서 다른 이상이 없다면 퇴원하겠다'고 우기기도 한다.
그런데 환자에게는 전형적인 저혈당 사례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 당뇨병을 치료하지는 않으나 최근 다리 통증으로 신경과에 입원했고 당뇨병성 말초 신경병증(diabetic peripheral neuropathy)으로 진단받은 상태였는데 입원 당시 혈액검사 결과가 조금 이상했다. 빌리루빈(이른바 황달 수치), 간효소수치, 크레아티닌 수치, 전해질 수치, C-반응단백질 수치 모두 정상 범위였으나 헤모글로빈 수치 9-10 정도의 경미한 빈혈(정상은 12-16)과 혈소판 수치 10만 정도의 혈소판 감소증(정상은 15만-40만)이 관찰되었다. 그러나 신경과에서는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이 있을 만한 원인을 찾지 못했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과거 벙력을 조사해도 당뇨와 뇌경색 외 특이 사항이 없어 '인근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에서 진료하라'는 판정과 함께 진료의뢰서가 발부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인근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외래를 예약하고 기다리던 동안 저혈당이 발생한 듯 했다. 그 상황에서는 내분비내과에서 환자를 입원시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정말 환자에게 혈액질환이 있는걸까? 혈액질환이 있다면 그 혈액질환이 저혈당에도 영향을 주었을까? 신경과 입원 중 발견된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 그리고 신경과에서 발부한 진료의뢰서를 보면 내분비내과에서는 환자를 입원시키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저혈당 환자를 대학병원으로 전원할 수도 없었다.
그때 신경과 진료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이 눈에 띄었다. 보호자가 '식도에 혹이 있어 시술했다'고 진술한 부분이다. 식도에 정말 양성 종양이 생겨 시술하는 경우도 있겠으나 대단히 드물다. 보호자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니 '식도의 혹'이라 표현한 질환이 문자 그대로 식도의 혹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다시 환자를 바라봤는데 비만한 체구였으나 유달리 배가 볼록했다.
"원래 배가 이 정도 나왔습니까?"
보호자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최근 1주일 동안 좀더 배가 불렀다고 대답했다. 순간 나는 어느 정도 환자의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 병원에서 치료했다는 식도의 혹 말입니다. 그때 혹시 피를 토해서 치료하지 않았나요?"
보호자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피를 토해서 시술받았고 담당 의사에게 식도에 혹이 있고 치료했으나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혹시 그 혹이란 것이 혈관이 부풀어서 만들어졌다고 하지 않던가요?"
보호자는 다시 한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빈혈과 혈소판감소증의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호자가 말하는 '식도의 혹'은 식도정맥류(esophageal varix)였다. 간경화(liver cirrhosis)가 심해지면 간으로 가야할 혈액이 역류해서 위와 식도 표면의 정맥이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피가 가득찬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정맥이 이른바 위식도정맥류(gastroesophageal varix)이며 그러다가 터지면 위식도정맥류 출혈(gastroesophageal bleeding)이 되는데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어 간경화 환자의 사망 원인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환자는 간경화로 인해 식도정맥류 출혈을 경험한 적이 있고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은 그런 환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혈액학적 이상이다.
그래서 환자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었다. 혈액종양내과 진료가 필요한 혈액질환이 아니라 간경화로 인한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이라 대학병원으로 전원할 필요도 없고 내분비내과에서 입원을 거부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 복부 CT를 시행했는데 복부 CT 결과 표면이 울퉁불퉁한 간과 복수가 확인되어 나의 추측에 부합했다.
나는 내분비내과 당직의사에 연락해서 환자를 보고했다. 신경과 입원 당시 발견된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은 간경화가 원인이며 이전에도 식도정맥류 출혈을 경험한 적이 있어 소화기내과 협진이 필요할 것이란 설명을 덧붙이면서.
2.
식도정맥류 출혈 병력이 있는 간경화 환자였으나 저혈당으로 응급실에 내원했을 때도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을 제외하면 혈액검사 결과는 정상이었다. 신경과 입원 당시 간경화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도 원래 비만해서 복수가 잘 드러나지 않았고 혈액검사 결과가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 보호자는 의학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라 '식도정맥류'란 단어 대신 '식도의 혹'이라 표현했고 그래서 신경과 담당의사는 환자에게 간경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빈혈과 혈소판 감소증을 설명할 수 없어 '인근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진료가 필요하다'는 진료의뢰서를 발부했을 것이다.
응급실을 떠나 내과병동으로 입원하는 환자를 바라보며 나는 유치한 만족감을 느꼈으나 다음 순간 환자의 장기 예후가 그리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