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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응급환자 분류기준 

 1.
 최우선순위 : 즉각적인 처치가 필요하며 생명이나 사지를 위협하는 (또는 악화 가능성이 높은) 상태, 심장마비, 무호흡, 음주와 관련되지 않은 무의식
 2순위 : 생명 혹은 사지, 신체기능에 잠재적인 위협이 있으며 이에 대한 빠른 치료가 필요한 경우, 심근경색, 뇌출혈, 뇌경색
 3순위 :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진행할 수도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경우, 호흡곤란(산소포화도 90% 이상), 출혈을 동반한 설사 
 4순위 : 환자의 나이, 통증이나 악화/합병증에 대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1-2시간 안에 처치나 재평가를 시행하면 되는 상태, 38도 이상 발열을 동반한 장염, 복통을 동반한 요로감염
 5순위 : 긴급하지만 응급은 아닌 상태, 만성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거나 악화의 가능성이 낮은 상태, 감기, 장염, 설사, 열상 

 위 내용은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 이른바 'KTAS'에 따른 환자 분류다. 응급실을 방문하는 다양한 환자를 단순히 도착 순서로 진료하면 먼저 도착한 경증 환자 때문에 신속한 치료가 필요한 중증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의료인이 아니어도 상식적 수준에서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중증 환자부터 진료한다'는 말에는 누구나 고개 끄덕이나 '경증 환자'와 '중증 환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똑같이 중증 질환으로 분류된 경우 누구부터 먼저 진료할 것인지는 복잡한 문제다. 특히 응급실이 붐비거나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를 만들었고 이전에도 다양한 응급환자 분류 기준이 존재했다. 

 다만 '분류도구'는 어디까지나 혼란스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대략적인 기준일 뿐이다. 애시당초 완벽한 분류도구 혹은 분류기준은 존재하지 않아 분류도구가 반영하지 못하는 중증 질환의 증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환자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엉거주춤 등을 굽히고 응급실로 걸어왔다. 일반적으로 등을 굽히는 자세는 복통, 특히 명치 부분에 통증이 있을 경우 나타난다. 그런 명치 부분 통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위염이나 위경련 같은 경미한 질환부터 췌장염, 담낭염, 담관염처럼 입원치료와 시술 혹은 수술이 필요한 질환 그리고 복부 대동맥 박리처럼 신속한 수술이 필요한 심각한 질환까지 모두 명치 부분 통증과 함께 엉거주춤 등을 굽히는 자세가 나타난다. 심지어 급성 심근경색에서도 전형적인 흉통 대신 명치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일단 환자의 혈압, 체온, 호흡수, 맥박수는 정상 범위였다. 설사나 구토는 동반하지 않았고 이학적 검사에서 배꼽 윗부분 통증이 있으나 압통(tenderness)은 없고 강직(rigidity)없이 부드러운 복부(soft abdomen)였다. 특별한 과거력은 없으나 나이에 비해 다소 야윈 상태로 심각한 만성 질환 가능성은 높지 않아도 건강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과식했거든요. 원래 배가 잘 아파요."

 환자는 자신이 흔히 말하는 '급체'라 주장했다. 위경련 같은 위장장애나 경미한 장염을 사람들은 '급체'라 얘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급체'라 주장하는 환자 대부분은 증상 치료만 원할 뿐 검사를 원하지 않는다. 물론 환자들이 '급체니까 검사없이 주사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정 부분 의사들의 책임도 있다. 혈액 검사든, X-ray든, 복부 CT든 검사를 시행할 때는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환자에게 그 목적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없이 '일단 배가 아프니까 루틴으로 혈액검사를 시행한다'는 사례가 적지 않고 당연히 그런 경우 환자에게 검사를 시행하는 목적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통으로 응급실을 방문해서 '혈액 검사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니 계속 아프면 소화기내과 외래로 오라'고 진단받는 경험을 몇 차례 반복하면 그때부터 환자는 '예전에도 검사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으니 이번에는 그냥 주사만 달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 환자 역시 그랬다. '위가 약해서 자주 아프다', '예전에도 검사해서 이상이 없었다', '오늘 과식해서 급체했다'고 주장하며 진통제 투여만을 원했다. 물론 환자는 심각한 질환에 해당하는 증상이 명확하지 않았다. 

 일단 약한 진통제와 진경제를 투여하고 지켜보기로 했다. 혈액 검사를 시행할 수도 있으나 심각힌 질환도 초기에는 혈액 검사에 이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아 의미가 없다. 오히려 '혈액 검사 결과가 정상이다'는 잘못된 안심만 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10-15분이 경과해도 증상이 좋아지지 않으면 복부 CT를 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과식해서 급체했다'고 주장하던 환자의 증상은 약물을 투여하고 10분이 지나도 호전하지 않았다. 다시 이학적 검사를 시행해도 복부 강직이나 압통은 명확하지 않았으니 환자는 대단히 불편해했다.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거부하던 환자도 '불편감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몇번 호소하더니 복부 CT 시행에 동의했다. 나는 마약성 진통제인 페치딘(pethidine) 25mg을 정맥으로 투여하고 즉시 복부 CT를 시행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기껏해야 특발성 췌장염(idiopathic pancreatitis, 췌장염은 대부분 지속적인 알콜 섭취나 담관염이 원인이나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혹은 담관염 초기 가능성 정도를 의심했다. 물론 그런 질환보다는 소장의 경미한 염증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부 CT 결과 간, 췌장, 담관, 담낭 어디에도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위와 십이지장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고 양쪽 신장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봐서는 나머지 부분도 정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영제를 사용해서 찍은 화면을 살펴보면 환자의 회장(ileum, 소장의 한 부분)은 위, 소장, 대장의 다른 부분과 달리 어두운 검은색이었다. 조영제는 간단히 말하면 장기를 보다 정확하게 살펴볼수있도록 도와주는 염색약이다. 따라서 간, 비장, 신장 같은 혈류량이 많은 장기는 아주 밝게 나타나고 위, 소장, 대장은 그 정도는 아니나 어느 정도는 밝게 드러난다. 그러나 환자의 회장은 조영제를 사용하지 않은 화면과 조영제를 사용한 화면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자의 회장에는 조영제가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조영제는 혈액을 통해 해당 장기로 흘러가는 만큼 결론적으로 환자의 회장에 혈액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뜻이다. 환자는 회장을 중심으로 한 소장 경색(small bowel infarction)에 해당했다. 

 인체의 세포가 활동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와 영양분이 필요하다. 영양분이야 다소 공급이 중단되어도 생존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산소는 공급이 중단되면 곧 세포가 죽는다. 이른바 괴사(necrosis)가 나타나는데 산소 공급이 중단된 상태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장기마다 다르다. 뇌는 5분만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도 심각한 손상을 입고 심장, 신장, 간 같은 장기도 아주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그나마 위, 소장, 대장 같은 장기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긴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소장 경색 같은 위장관 경색의 경우 괴사된 부분을 절제하는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 시기를 놓치면 복막염과 함께 심각한 패혈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고 그럴 경우 사망 가능성이 있다. 

 나는 급히 일반외과 당직의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아쉽게도 그날의 일반외과 당직의사는 적극적으로 수술을 시행하는 '옛날 외과의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근 대학병원에 전원 문의해서 수용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 인근 대학병원에서는 수용 가능하다고 답변했고 나는 환자에게 질환과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전원했다.

 3.
 최종적으로 환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수술은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회장을 중심으로 해서 상당 부분을 절제했을 테니 환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울러 경색의 원인도 중요하다. 혈관이 막히는 원인의 대부분은 혈전인데 혈전이라면 어디에서 만들어졌으며 만들어진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응급의학과 의사 입장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저절한 치료 계획을 세워 실행해도 꼭 환자가 회복하리라 보장할 수 없는 질환이 적지 않다. 그래서 그런 질환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감을 느끼면서도 환자의 예후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다.

 어쨌거나 분류 기준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고 기본적인 참고 사항일 뿐이다. 분류 기준의 우선 순위에 해당하지 않는 증상을 호소하는 중증 환자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임상의사는 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판단하되 기계적으로 그런 기준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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