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의 살인마
1.
1차 대전이 시작했을 때만 해도 누구도 전쟁이 몇년씩 지속하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몇 주, 기껏해야 몇 개월이면 끝날거라 생각했고 그토록 오랫동안 참혹한 희생을 치를 것이라 상상조차 못했다. 오히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신나는 모험을 즐길 기회로 생각해서 그런 낭만적인 생각과 애국심에 들뜬 사람들이 자원입대하려 몰려 들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자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파리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하던 독일군은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고 기세가 꺽였으나 그렇다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독일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에 정신팔린 사이 러시아군이 기습을 감행했으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의 독일군에게 몰살당했다. 그후 서부전선에서는 승리와 패배가 명확하게 갈리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는 참호전이 지속되었고 동부전선은 독일군의 우세 아래 지리멸렬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젊고 야심만만한 영국 해군장관이 단번에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을 계획했다. 그 작전은 독일의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사실상 근대 국가가 아니라 봉건 제국에 가까웠다) 가운데 가장 약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심장인 이스탄불을 기습하자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영국 해군을 바탕으로 이스탄불과 주변 지역을 포격하고 봉쇄한 후 안작군(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출신 영국군)을 상륙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발칸반도를 지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까지 진격하여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를 단번에 해결하고 최종적으로는 베를린까지 진군하는 원대한 구상이 작전의 목표였다.
독창적이고 기발하면서도 뜬 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상당히 타당한 계획이었으나 영국 내각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수상을 비롯한 정치가들에게는 난데없는 이스탄불 기습, 뜬금없는 콘스탄티노플 수복처럼 느껴졌고 육군과 해군의 장군들에게는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괴상망측한 작전처럼 보였다. 더구나 장군들, 특히 육군 수뇌부는 작전을 계획한 해군장관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 대담한 작전을 계획한 해군장관이 윈스턴 처칠이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의 영웅'이자 '스탈린의 검은 속셈을 꿰뚫어 본 인물'로 높게 평가받는 요즘과 달리 1910년대 윈스턴 처칠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단 재기발랄하다는 부분은 다들 인정했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로 재무장관을 지낸 랜돌프 처칠이 대단히 유능했으나 미치광이-실제로 랜돌프 처칠이 신경매독 환자라는 설도 있다-였다는 점을 들어 아들에게도 거부감을 지닌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단순한 선입견이 아니라 윈스턴 처칠은 실제로도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다혈질에 고집불통이었다. 그리고 장군들, 특히 육군의 수뇌부가 그를 싫어했던 이유는 보어 전쟁과 인도 반란 진압에 참전한 후 영국군 수뇌부의 무능과 안일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책을 적었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이 명문가 출신이며 사관학교를 졸업하긴 했으나 기병 장교로 조건부 입학했고 임관 후에도 지휘관으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기에 장군들 입장에서는 그의 비판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결국 작전은 승인되었으나 처칠이 원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강력한 해군이 기습적으로 이스탄불 주변을 포격하고 항구를 봉쇄한 다음 안작군이 주축이 된 육군이 신속하게 상륙해서 혼란에 빠진 오스만 투르크군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이 처칠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해군과 육군 모두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강력한 영국 함대가 나타나자 오스만 투르크군은 기겁했고 이스탄불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 함대는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여서 오스만 투르크군이 혼란과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육군 역시 신속하게 상륙해서 단숨에 이스탄불로 진격한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속도로 이스탄불 인근에 상륙했다. 그 사이 오스만 투르크군은 무능한 장군들이 물러나고 지금까지 한직을 전전하던 야심 가득한 냉소주의자 케말 파샤가 방어군 사령관이 되었다. 푸른 눈으로 미루어 터키인보다는 알바니아인에 가깝고 '케말'이란 이름만 있을 뿐 성도 없을 만큼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후에 터키공화국을 만들어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는 케말 파샤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고 장비도 낙후된 오스만 투르크군을 정비해서 상륙한 안작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결국 영국군은 이스탄불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후에 '갈리폴리 전투'로 불리는 이 사건은 1차 대전에서 영국이 경험한 아주 쓰라린 패배였고 군사적 재앙이었다. 따지고 보면 작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작전을 계획한 윈스턴 처칠의 안목은 '천재 전략가'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영국 해군과 육군을 지휘한 장군들이 기습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인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는 달랐다. 영국군 수뇌부와 지휘관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비난은 윈스턴 처칠을 향했다. 처칠은 '병사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무책임한 인간', '자신의 주체하지 못하는 호기심과 승부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한심한 모험가'로 매도당했다. 실제로 '갈리폴리의 살인마'라는 별명은 2차 대전까지도 윈스턴 처칠을 괴롭혔다. 당연히 처칠은 해군장관에서 해임당했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기간 내내 '정신나간 주정뱅이 전쟁광'으로 비난받았다. 진짜 '갈리폴리의 살인마'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은 영국군 장군들임에도 불구하고.
2.
'가,가슴이 쓰라려! 따가워!'
종종 걸음으로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호흡곤란은 없으나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비슷한 연배의 보호자도 동행했는데 환자와 마찬가지로 다소 흥분한 상태였다. 다행히 혈압과 체온은 정상 범위였고 당뇨병과 고혈압 같은 기저 질환은 없었다. 또 '왼쪽 가슴이 쥐어짜게 아프면서 왼족 어깨와 윗팔이 저리다'는 전형적인 심근경색 증상은 아니었으나 심근경색은 속쓰림이나 명치 불편감 같은 비전형적 증상만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즉시 심전도를 시행했다. 안타깝게도 심전도에는 명확한 ST 분절 상승(ST elevation)이 나타났고 맥박수 역시 40-45회였다. ST분절 상승은 급성 심근경색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심전도 변화이고 정상 맥박수가 70-100회임을 감안하면 40-45회의 심박수는 매우 급박한 상태를 의미했다. 나는 몰핀(morphine) 5mg을 정맥주사로 투여하고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경구로 처방함과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에게 급성 심근경색 가능성이 매우 높아 즉시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하며 빨리 시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태임을 설명했다. 그런데 환자와 보호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수술받지 않을거에요!"
보호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하다'는 말이 인민 재판의 사형 언도처럼 부당한 판결인양 분노를 내뿜었다.
"심혈관조영술은 수술이 아니라 시술입니다. 그리고 급성 심근경색은 당장 시술하지 않으면 100% 사망하는 질환입니다. 병원에 오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도 많은데 다행히 늦지 않게 오셨으니 빨리 시술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설득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보호자는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적대감을 쏟아냈다.
"안해요! 우린 그런거 안해요! 내가 심근경색으로 수술받고 살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거 하면 무조건 죽잖아요!"
"그리고 수술하려면 준비를 하고 와야지. 집에 가서 준비해서 내일와서 하든지 해야지 어떻게 갑자기 수술을 받습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가 안하겠다고 하는데 왜 계속 하라고 해요? 하면 100% 죽는 수술을 왜 하라고 해요!"
차근차근한 설명, 무시무시한 협박 심지어 지금 제정신이냐며 윽박지르기까지 했으나 어느 것도 환자와 보호자에게 효과가 없었다. 설득의 단초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급기야 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그럼 젊은 보호자와 얘기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휴대폰을 감추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휴대폰을 빼앗아 젊은 보호자에게 전화할까 우려하는 듯 했다. ST분절 상승이 명확하고 맥박수가 40-45회 밖에 되지 않는 환자라 언제 심실 세동과 함께 심정지에 빠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소중한 5-10분이 그렇게 흘러갔다. 기괴하고 무섭고 우스꽝스럽고 안타까운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환자와 보호자를 설득했고 젊은 보호자와 전화가 연결되었다. 다행히 젊은 보호자는 상황을 잘 이해했고 심혈관조영술에 동의했다. 환자와 보호자 역시 젊은 보호자와 통화하자 협조적으로 변했다. 이제 심장내과 당직의사와 심혈관조영술 팀을 호출할 차례였다.
이전에도 몇 번 언급했듯 우리 병원은 대학병원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에서 중환자실이 있는 몇 안되는 병원이며 응급실에서 심혈관조영술이나 인공호흡기 치료가 가능하다. 특히 심혈관조영술은 응급 시술을 요청하면 20-30분 내에 시행할 수 있다. 적어도 이전까지는 늘 그랬다. 그런데 심장내과 당직의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음, 글쎄요. 심전도를 보내주시죠."
물론 심장내과 의사가 심전도를 확인하고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급성 심근경색 가능성이 높아 당장 심혈관조영술이 필요합니다'는 나의 연락에 '심전도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고 대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 가겠으니 심혈관조영술 팀을 불러주세요'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어쨌든 간호사가 심전도를 전송하자 곧 심장내과 당직의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나의 불길한 찜찜함이 들어 맞았다. 심장내과 당작의사는 1시간 후 심혈관조영술읋 하겠으니 그 시간에 맞추어 심혈관조영술 팀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1시간이라니! 그때까지 늘 20-30분 내에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했는데 갑자기 1시간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급성 심근경색 가능성이 높으면 시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20-30분 내에 시행하는 것도 느린 편은 아니나 5분이나 10분 내에 시행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런데 1시간 후라고? 나는 다시 심장내과 당직의사에게 전화했다. 나는 정말 1시간 후에 시행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원래 가이드라인에는 1시간 30분 후에 시행해도 괜찮다고 나옵니다."
가이드라인? 어디 가이드라인? 미국 심장학회든, 유럽 심장학회든, 한국 심장학회든 1시간 30분 후에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하라는 치료 지침은 없다. 1시간 30분 후에 시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늦어도 1시간 30분 안에는 시행하라는 뜻이다. 솔직한 심정은 '문자 해독력이나 언어 이해력에 문제가 있습니까?'라 쏘아 붙이며 '그건 1시간 30분 후에 하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늦어도 1시간 30분 내에는 하란 얘기입니다'고 말하고 싶었다. 레지던트 시절이었다면 좀더 강렬한 독설을 섞어 내뱉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쓸데없는 논쟁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보호자들에게 뭐라 얘기할까요? 사실 환자와 보호자가 시술받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1시간 기다리라고 어떻게 말할까요?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이드라인에 나온다고 얘기하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얘기했으나 실제 뜻은 '빨리 와서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하라'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의 예상에 어긋나는 반응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 그럼 액티라제(Actilyse, alteplase가 성분명이며 recombinant tissue-type plasminogen activator로 뇌경색이나 심근경색에서 혈전을 용해시키기 위해 사용한다)를 사용하시죠."
액티라제라고? 액티라제는 강력한 혈전용해제다. 아스피린, 플라빅스, 헤파린, 와파린 같은 약물이 혈소판 기능을 억제하거나 혈전 생성을 막는다면 액티라제는 이미 만들어진 혈전을 제거하는 강력한 약물이다. 그래서 부작용도 크다. 주요 혈관을 막은 혈전을 제거하는 약물이니 당연히 출혈을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뇌경색이든 심근경색이든 혈관조영술을 시행해서 물리적으로 혈전을 제거하고 막힌 혈관을 뚫을 수 있으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액티라제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액티라제가 '뇌경색을 치료하는 기적의 약'으로 각광받은 때는 요즘과 달리 아직 뇌혈관조영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물론 요즘에도 액티라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혈관조영술이 가능한 병원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송하는 동안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으면 사용한다.
"액티라제 사용이라뇨? 여기가 울릉군 의료원입니까?"
울릉도 같은 멀리 떨어진 도서 지역이나 산간 오지에서 환자가 발생해서 혈관조영술을 시행하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몇 시간씩 걸리는 경우에나 액티라제를 사용한다. 대도시에서, 그것도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할 수 있는 병원에서 급성 심근경색 환자에게 액티라제라니. 합리적이지 않은 얘기다.
"최대한 빨리 오세요."
나는 통화를 끝내고 다른 심장내과 의사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심장내과 의사가 5명이니 당직을 제외하고도 4명이 더 있었다. 응급 심혈관조영술을 위해 대기하는 당직이 아닌 만큼 전화를 받을 의무도 없고 당직 대신 시술할 의무는 더욱 없으나 상황을 얘기하고 강력하게 요청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나머지 네 명 모두 해외학회에 참석하거나 당직이 아니어서 다른 지역에 있거나 혹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문제가 복잡해졌다.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도착하기 전 환자 사태가 나빠질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언제라도 심전도 모니터에 심실세동의 어지러운 곡선이 나타나며 심정지가 닥칠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분명히 보호자는 빨리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을 것이다. 그리고 심장내과 당직의사는 '액티라제를 투여하라고 했는데 응급실에서 반대해서 투여하지 못했습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장내과 당직의사의 주장에 따라 액티라제를 사용했는데 그로 인해 뇌출혈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액티라제 사용을 주장했다고 해도 내가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투여할테니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머리에는 뇌출혈이, 가슴에는 심근경색이 있는 무시무시하고 심각한 상황의 책임을 내가 감당해야할 가능성이 높다. 응급실 전담의사로 급성 심근경색을 신속하게 진단했고 시술을 거부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가까스로 설득해서 필요한 치료계획에 동의하도록 만들었고 심장내과 당직의사를 늦지 않게 호출했으나 자칫 골치 아픈 일에 연류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그렇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1시간 내로는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도착할 테니 액티라제를 사용하는 것은 기대할 수 있는 이익보다 감수해야할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나는 액티라제를 투여하는 대신 심장내과 당직의사에게 전화해서 최대한 빨리 병원에 도착하도록 닦달했다.
다행히 1시간 후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도착했다. 다행히 환자는 그때까지 큰 문제 없었고 심혈관조영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3.
강력한 해군을 이용해서 이스탄불을 기습하여 점령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무너뜨린 다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진격해서 독일을 측면에서 공격한다는 계획은 훌륭했다. 당대의 부정적 평가와 달리 오늘날 윈스턴 처칠의 이 작전은 제대로 실행했다면 서부전선의 무의미하고 참혹한 전투없이 1차 대전을 조기에 끝냈을 것이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습 점령'이란 강조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과 육군의 어느 장군도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작전은 엄청난 인명 손실과 함께 재앙으로 끝났고 윈스턴 처칠은 '갈리폴리의 살인마'라는 악명을 얻었다.
급성 심근경색이 의심되어 심혈관조영술을 요청하면 20-30분 내로 시행하던 병원에서 갑자기 심장내과 당직의사가 1시간 후에 시행하겠다고 통보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1시간 30분 후에 시행하면 됩니다'란 어이없는 이유와 함께. 그래서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재차 얘기했더니 이번에는 '그럼 액티라제를 사용하고 1시간 후에 심혈관조영술을 하겠습니다'는 더 이상한 판단을 통보했다. 결국 다행히 큰 문제없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나 조금만 운이 없었다면 나도 '갈리폴리의 살인마'로 불린 처칠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1시간 후에 심혈관조영술을 하겠습니다'는 말 대신 예전처럼 '바로 갈테니 심혈관조영술 팀을 불러주세요'란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아니, 꼭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