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가 기억하는 한국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오스트리아

by 만재소녀

남들보다 조금 늦게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봤다. 아니 봐버렸다. 대학교 시절 남들 다 가는 유럽여행에 대한 욕심을 가져본 적도 없던 나였다. 대학생들이 유럽 여행을 가려고 돈을 모으고 방학 기간 내내 유럽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자마자 오스트리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영화에 나오는 그곳이 너무나도 가고 싶어 졌다.


영화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에 가고자 하는 명분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에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대학생 때 교환학생 교류회에서 친해진 친구다. 한국으로 오는 교환학생들의 일대일 버디가 되어 한국 적응을 도와주는 동아리였다. 나의 버디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첫 모임부터 친해졌었다. 오스트리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후에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비엔나에서 밥 한 끼 정도 먹을 요량으로 연락했던 것인데 그 친구는 너무나도 신나 하며 나의 여행 일정을 자세하게 물었다. 그리고 본인의 집에 머무르기를 제안하고 나의 3박 4일 일정을 위해 회사에 연차를 내겠다고 했다.


P20170504_173223004_1C829247-CED3-418B-987D-BC944EBB15B0.JPG 그림 같았던 Schönbrunn Palace


오스트리아에 도착하고 하루를 호텔에서 머물고 그 친구를 만났다. 다시 만난 그 친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가방에 막걸리와 소주를 넣고 다닐 정도로 놀기만 하는 이미지였는데 그곳에서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가 한국을 떠난 지 5년이 지났고 그 당시 그 친구는 이미 석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은 잊은 채 내 기억 속에 대학생 이미지만 남아있었던 거다.


관광지에 사는 사람이 그러하듯 그 친구는 관광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보다는 진짜 비엔나 사람들이 가는 곳에 가자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 그 수많은 여행자들이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현지인만 있는 곳에 갔다. 길거리에 아시안은 나 하나였다.


친구와 함께 먹었던 슈니첼, 치즈와 오이만 들어있던 샌드위치, 비엔나커피도 기억에 남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물을 타 먹었던 와인이다. 친구의 설명에 의하면 본인은 이탈리아 남부의 피가 흐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이 즐겨 먹는 방식이라고. 화이트 와인 한 병, 물 한 병을 시켜서 적절히 농도를 조절해서 먹는다. 맹숭맹숭하면서 와인의 향이 도는 특이한 맛이었다.


P20170504_191608666_6F8C5DF4-2450-44B9-BFFE-30C473B71392.JPG 물 타 먹는 와인이라니?!



짧은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한 것 외의 경험을 많이 했다. 오스트리아와 아무 인연이 없는 여행자였다면 가지지 못했을 많은 오스트리아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오스트리아 가정식이 그러했다. 내 친구는 세명의 룸메이트와 생활했고 그들 모두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또 다른 여행자인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과 대화 나눌 공통의 주제가 하나씩은 있었다는 점이다. 항공사에 근무했던 한 명, 건강 식단에 관심이 많던 한 명 그리고 미국에서 잠시 살았던 한 명. 각자 서로의 지구 반대편에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몇 시간이고 함께 나눌 대화가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직접 뇨끼(감자와 밀가루를 섞어 만든 파스타)와 생선 요리를 해주었다. 룸메이트들의 말로는 이 생선 요리가 그의 시그니처 요리라고 했다. 집에 손님이 오면 한 번쯤은 꼭 만들어 준다고. 정말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도대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동 흰 살 생선, 병에 들어 있던 절인 생선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오일 한가득, 슬라이스 한 레몬이 들어갔다. 친구가 음식 이름을 설명해주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김치 먹는 한국인이라면 잘 먹을 수 있을 거라 했는데 그의 예상이 적중했다. 특이하고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지만 내 입에 꼭 맞았다.



P20170505_184753584_6DE64348-62AD-4569-BC82-717CC3BDE605.JPG 친구가 직접 요리해 준 오븐에 구운 레몬 생선 절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 친구의 집에 처음 들어가 그의 방을 보았을 때다. 방 한 면은 한국 지도와 한국에서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한 장도 아닌 수십 장의 사진 속에 잊고 있던 우리의 대학교 시절이 들어 있었다. 한국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모자이크 조각 속에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놀라웠다. 벽 전체가 한국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그 친구는 한국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한 학기를 살았음에도 그는 한국을 늘 마음속에 품고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힘든 시기를 버텨 나가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고 했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고. 한국 사람들이 자기에게 보여주었던 따뜻함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되돌아보면 많이 챙겨주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기억해주니 고마웠다. 그는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한국을 기억했다. 나도 어떤 나라를 들으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몇 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그 나라를 대표하고 나에게는 그 나라에 대한 가장 큰 기억이 된다.


다음 여행지인 독일로 떠나기 전에 그 친구와 나눈 대화가 있다. 아마 우리가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지구는 둥그니까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고. 나에게는 그가, 그에게는 내가 서로의 나라를 한 번쯤 다시 방문할 이유가 되었다.


P20170505_111209535_6EED8049-1E9B-4681-A0B7-7903128E3987.jpg 그 친구의 방에 붙어있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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