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보다 생각
보통 여행을 가면 '인생샷'을 찍어 온다고 한다. 나도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서로 사진 찍어주는 시간이 여행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독일 여행은 조금 달랐다. 나를 찍은 사진은 두 장이 전부다. 함께 여행한 친구가 미국인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두 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한 것 같다.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사진 찍을 시간보다 보고 듣고 생각할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로 넘어갔던 이유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엄마 친구의 딸이지만 나에게는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 아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인이 된 그 친구를 미국보다 조금 가까운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그 아이가 교환학생을 간 학교는 독일의 담슈타르트(Darmstadt) 지역에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서 버스로 30분 정도 가면 있는 작은 도시다. 관광지가 아니어서 그런지 길에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와 친구 둘 뿐이었다.
독일에 도착한 첫날, 친구의 동네를 구경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나는 외식보다 직접 산 음식으로 요리해 먹는 것이 좋다. 그래서 친구와 레스토랑에 가지 않고 파스타를 만들어 가볍게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좋은 식사 후에 각종 치즈와 함께 술상을 차리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여느 이십 대가 그렇듯이 우리는 인생과 그 당시 우리가 품고 있는 고민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된 주제는 '진로'와 '감정'이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을 졸업한 상태고 이미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보다 세 살 어린 나의 친구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친구의 고민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금전적인 문제가 있다는 거였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독립하고 싶지만 부모의 금전적 지원 없이는 공부를 지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고 했다. 친구의 불안감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친구가 부러웠다. 현실의 제약을 다 극복하고서라도 추구하고 싶은 본인의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이미 직업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라고 물었다면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직업에 대해서도 '그냥 재밌으니 한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만큼 스물여섯의 나는 많이 어렸다.
불안한 이십 대였지만 우리의 결론은 나름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었다. 현실만 즐기며 YOLO(You Only Live Once)하는 인생이라면 이런 고민도 없을 거라고. 그래서 계속 이렇게 고민하자고 했다. 고민하고 생각하는 힘을 믿자고. 그리고 이렇게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나 또한 너의 나라를 방문할 수 있음에 감사하자고.
친구가 학교에 간 날 혼자 기차를 타고 하이델베르크(Heidelberger)에 갔다. 프랑크푸르트 근교 여행지로 검색하면 나오는 곳이다. 하이델베르크 성과 칸트가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을 걸어볼 참이었다. 일주일간의 유럽여행에서 처음으로 혼자 사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낯선 여행지를 걷고 또 걸으면서 내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 나의 삶, 나의 과거 그리고 내가 살아가야 할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삶은 모든 순간이 조금씩 모여 변화한다고 한다. 감사하게도 이 날 성을 향해 걷던 길, 산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생각들이 나를 꽤나 많이 바꾸었다. 여행은 모든 순간이 깨달음이다. 매 순간순간 새로운 풍경, 새로운 생각이 들어온다. 모든 감각이 열리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독일의 성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날 노트에 흔들리는 감정을 안정시키고 불안한 미래를 달래는 글을 길게, 아주 길게 적었다. 앞으로 어떤 책을 읽을 것이며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물론 그때 정답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나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점점 삶의 전부가 되어가고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는데 다시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알아가는 중이지만 이 날이 그 여정의 계기가 되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오프라 윈프리, 2014)이라는 책을 보면 오프라 윈프리가 인생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신념에 대해 나온다. 저자는 어린 시절 가슴 아픈 일들을 겪었다. 그 시간을 견뎌내면서 그녀는 인생과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하는 인생에 대한 결론을 책으로 남긴 것일 테다. 웬만한 확신 없이는 '내가 확실히 안다' 고 말할 수 없다. 독일 여행 이후, 내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이후에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하이델베르크에 다녀온 뒤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독일에서 사진을 찍을 새가 없었다. 프랑크푸르트에 가서도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명한 관광 명소보다도 하이델베르크에서 혼자 보낸 시간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인생 샷이 필요 없는, 되려 샷(shot, 순간)이 아닌 미래로 이어짐을 만들어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