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젖은 여권
열 번째 방콕 여행이 무산될 뻔했다.
물에 젖은 여권 때문에.
항공사 직원 특혜로 비행기 티켓 가격이 저렴한 덕에 여행을 자주 다녔다. 특히 방콕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3년간 아홉 번이나 방문했다. 2019년 여름, 열 번째 방콕 방문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신체 건강하고 유사시 승무원을 도와줄 수 있는 나는 비상구열을 배정받았다. 따라서 모든 짐은 좌석 윗 선반에 넣어야 했다. 5시간 반이나 되는 비행시간 동안 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잠을 청했다. 기나긴 비행이 끝나감을 알리는 도착 방송과 함께 불이 켜졌고 나는 가방 정리를 위해 일어섰다.
선반 안에서 잠자고 있던 나의 에코백은 축축했고 안을 보니 물통이 새고 있었다. 황급히 꺼낸 여권은 이미 물에 젖어있었고 그 외 지갑 속의 돈, 보조배터리, 포케파이 등등 온갖 소지품이 물에 젖기 일보직전이었다. 시간이라도 많았으면 좋으련만 방콕 도착 30분 전이었다. 그때부터 여권을 말리기 시작했다. 드라이기라도 빌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승무원들이 바빠 보여 그럴 수 없었다.
도착할 때까지 여권은 마르지 않았다. 일단 신상정보가 있는 부분만 대충 말리고 입국장에 들어섰다. 그날따라 유난히 보안당국 직원의 인상이 깐깐해 보였다. 내 차례가 왔고 입국 심사가 시작되었다. 뒤로 길게 선 줄이 민망할 정도로 승인이 나지 않았다. 직원은 입을 찼고 인상을 썼다. 여권을 돌려주기에 ‘다행이다’하고 입국 선을 넘으려는 순간 직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맨 끝으로 가서 다시 줄을 서라고 했다.
다시 줄을 섰고 두 번째 입국심사 또한 똑같이 거절당했다. 이미 입국심사를 끝내고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몇 미터 되지 않는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전 세계 여권 파워 2위라는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입국 거절 위기를 맞이한 거다.
세 번째 입국 심사를 위해 다시 줄을 스러 가는 순간 기계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 라인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그 라인의 직원은 여권이 젖었다라며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그리고 여권을 받아 들고 지문을 입력하라고 했다. 승인이 났다. 세 번의 시도 끝에 태국 입국에 성공했다.
늘 비행기에서 INAD 승객만 보다가 (INAD 승객 : INADMISSIBLE PASSENGER, 여러 사유로 입국 심사가 거절되어 본국으로 돌아가는 승객을 말한다.) 내가 그 입장이 될뻔했다. 입국 심사대에 서 있는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친구는 어떡하지? 내가 돌아갈 비행기는 있나? 방콕에 너무 자주 온건가? 열 번째 방문부터는 별도 비자가 필요한가?
천만다행으로 열 번째 방콕 여행이 시작되었다. 두 번 다시 여권을 나와 떨어뜨려놓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