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이 아니면 어때

by 만재소녀


"세상이 1등만 기억한다면 세상이 기억하는 1등이 되어라"


고등학생이던 내가 스터디 플래너에 쓴 말이다. 공부 자극 글이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1등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모의고사에서 1등급을 받아야 학교 게시판에 이름이 걸릴 수 있었고 1%가 되어야 학교에서 별도로 제공하는 시설 좋은 학습실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1등을 해야 소위 말하는 명문대, SKY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이 원하는 1등이 되기 위해서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급식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시간이 아까워서 밥을 안 먹었고 화장실에 가면 집중력이 흐트러지니까 물도 정해진 양만 마셨다. 당연히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았다. 밥을 조금만 많이 먹어도 체해서 학교나 학원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다. 그렇게 고난스럽던 대학 입시가 끝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며칠 전 대치동 아이들에 대한 기사를 봤다. 학원에 가느라 길에서 음식을 먹고 밥시간이 파괴되어 위염을 달고 산다는 거다. 기사를 읽으면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의 수능이 끝난 지 10년이 다되어가는데 학생들은 여전히 나와 똑같은 이유로 건강을 희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도 분명 10년 전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1등이 되기 위해, 사회가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자의라면 다행이지만 타의에 의한 공부라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228


10대 후반을 쏟아 넣은 대학 입시가 끝나고 후폭풍은 아주 강하게 왔다. 늘 1등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살다 보니 1등이 되지 않으면 틀린 삶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좋은 교육을 받고 똑똑한 친구들을 보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진 것은 물론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1등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감과 열등감도 생겼다. 대학에 오니 나의 존재는 그저 학번 하나 부여받은, 학생 56번에 불과했다. 열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나를 보살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1등을 해야만 행복한 게 아니라고. 2등도 괜찮고, 중간이어도 괜찮다. 1등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행해지느니 2등이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노력하는 삶이 낫다.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조금씩 삶을 변화시키면 된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거니까.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뭐 어떤가. 내가 만족할 만큼 열심히 살고 행복하다면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한창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 에세이가 유행하던 때에 모든 걸 괜찮다고 말하는 사회 분위기가 되려 발전을 막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말이 현실에 안주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발전 없는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니다. 삶을 가득 채워 살되 모두가 일등이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다. 그 누가 우리를 순위 매길 것인가.


10대의 내가 오늘의 나를 보면 왜 치열하게 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에 내가 그리던 20대는 NASA에서 일하는 똑똑한 천문학자, 월가에서 일하는 멋진 애널리스트였으니까. 지금은 작은 항공사에서 일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1등이 아니면 어때. 남들이 '우와'하는 스펙이 아니면 뭐 어떤가. 나는 내 삶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 것을.


위염을 달고 산다는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주어진 환경에서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꼭 1등이 되어야 행복한 건 아니라고. 2등도 괜찮고 3등도 괜찮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고 후회를 남기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비교했을 때 1등이면 되는 거 아니겠나.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때. 내가 만족할 만큼 열심히 살고 행복하다면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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