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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원 Oct 24. 2021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영웅이라니!

나는 왜 인문학을 공부하는가 (1/3)

“인문학 공부가 삶에 위로가 돼요?” 며칠 전, 식사자리에서 한 문학평론가가 물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강의 평가도 좋다고 들었다), 수십 년 동안 문학과 역사를 공부했을 그가 몰라서 묻지는 않았을 터였다. 연구소나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채 인문학도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을 아는 안부 인사였을까? 나는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그럼요!” 단숨에 내놓은 답변이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경솔한 답변도, 인사치레도 아니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왔다. 여느 사람들처럼 내 삶에도 아픔과 슬픔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인문학의 위로를 적잖이 받았다. 잊지 못할 장면들이 눈앞을 머문다. 인문학 덕분에 살아낸 순간들이.

      

30대엔 사별의 아픔이 많았다. 어느 해 존경하는 선생님이 영면하셨고 이듬해엔 둘도 없는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인생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견디기 어려웠다. 자주 엎드려 울었다. 일상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잊은 채로 수년을 방황했다. 입맛을 잃었고 인생이 무상했다. 불면의 밤을 보낸 적도 많았다. 기쁠 때나 힘겨울 때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상은 쓸쓸한 곳이 되었다.      

망자와의 추억은 느닷없이 소환된다. 그 시절 함께 즐겼던 노래가 흘러나오면 영락없다.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이 너 나 하면서 편히 얘기 나누는 모습도 친구를 생각하게 만든다.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던 시절, 인문학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회상에 잠기고 그리움이 젖어 들면, 『일리아스』를 읽었다. 24권을 펼치면 아킬레우스가 나를 반긴다. “친구, 왔는가!” 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도 같다.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와 전쟁 중에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그도 슬퍼했고 괴로워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새벽을 맞기도 했다.      


“백성들은 저녁식사와 달콤한 잠을 즐길 참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전우를 떠올리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남자다움과 고상한 용기를 그리워했다. 아아. 전사들의 전쟁과 고통스러운 파도를 헤치며 그와 더불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이런 일들을 생각하며 그는 때론 모로 누웠다가 때론 바로 누웠다가 또 엎드리기도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닷가기슭을 따라 정처 없이 거닐었고, 새벽의 여신은 그가 모르게 바다와 해안 위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 천병희 역, 『일리아스』 제24권 中     


2천 8백 년 전에 쓰인 서사시가 나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이 친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나를 위로했다. 이 구절엔 내 삶을 헤쳐나갈 조언도, 고통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도 없다. 그저 시가 내 마음으로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마음을 어루만졌다. 친구가 그립고 힘겨우면 아킬레우스의 눈물(24권)을 읽었다. 때론 그와 함께 울었고, 때론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딱 오늘 하루만 견뎌보자!’ 하루짜리 이 기운이 얼마나 고맙던지!      


한번은 집을 나서다가 현관문 앞에 우두커니 섰던 적이 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집안을 쳐다보았다. ‘오늘 저녁에 내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처연한 날들이었다. 정끝별 시인의 <밀물>은 그즈음 만난 시다.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밀물>의 전문이다.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견디던 날, 이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시는 내 어깨를 도닥였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구절구절마다 공감했다. 그랬다, 하루를 견딤은 나의 공이 아니었다. 인생의 파도가 잠잠한 덕분이었다. 우리나라의 저승사자든, 그리스 신화의 하데스든 삶을 앗아가는 모습은 매정해 보인다. 개인의 딱한 사정을 봐 주지도, 때를 기다려 주지도 않으니(내 친구는 아내와 두 딸을 두고 떠나야 했다). 가끔은 잔혹한 인생이지만, 관대할 때도 많다. 파도가 매일같이 치는 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바다가 잠잠해서”라는 읊조림은 삶의 매서운 맛을 체득했거나,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체험한 이의 고백이리라. 감사함과 겸손함이 깃든 자각….     


나에게 인문학 공부는 이처럼 삶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여정이자, 하루치 기운을 얻는 현장이었다. 모로 눕고 엎드리기를 반복하면서 잠 못 들던 날, 인문학은 나를 구해 준 수면제이기도 했다. 격랑에 휩싸일 때도 잔잔해진 파도에 한숨 돌리던 날에도 삶의 동반자였다. 내 통장에 두둑한 월급을 넣어주진 못했지만, 인문학은 때때로 내 마음을 다독이고 키워 주었다. 잠깐이나마 지난날을 돌아보고 나니, 인문학 공부가 삶에 위로가 돼요? 라고 누군가가 다시 묻을 때 명쾌한 대답을 하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 인문학 공부와 마음의 연관에 대해 정리하고 되새겨 보았다.      


나에게 인문학 공부란, 마음의 역사학자가 되는 여정이다. 역사학이란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무엇이다(고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말했다). 우리는 변한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당히 비슷하고 상당히 다르다. 마음은 상당히 달라지는 쪽에 속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마음의 역사학이란 인생사에 따라 강인해지고 나약해지는, 세월에 따라 선해졌다가 사악해지는 변화를 탐구하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유쾌한 순간이든, 약동하는 영혼의 숨소리를 관찰하는 마음의 역사학자가 될 것! 이것이 내 인문학 공부의 한 푯대다. 때로는 마음의 고고학자가 되고도 싶다. 잠들어 있던 유물을 발굴할 때의 그 섬세함과 신중함을 좇아, 내면의 표정을 살피어 웃음과 분노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밝히는 마음의 고고학자 말이다.      


돌이켜보면 삶의 어떤 순간은 수면제 덕분에 견뎌냈고 어떤 순간은 인문학 덕분에 살아냈다. 살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살아졌다. 아아, 나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고마운 친구와 살아왔구나! 문득 잘 견디어 준 몸과 마음이 고맙게 느껴진다. 몸도 소중하고 마음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간과할 수 없다. 눈물을 흘리던 그 비범한 영웅은 얼마나 단단한 몸을 가졌던가! 아킬레우스는 떠올리니, 마음의 역사학이자 고고학인 인문학 공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 실내 운동을 시작했으니, 오늘이 삼 일째다. 작심삼일을 넘어서는 동시에 이달의 마음 일기를 적고 싶은 날이다.      

“불편하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 이병률 『찬란』, 시인의 말


                                             개빈 해밀턴의 <아킬레우스의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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