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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원 Oct 24. 2021

누가 번역을 무시하는가

문명과 지성을 선도하는 사람들


“번역은 별반 차이가 없으니 시중에 나와 있는 아무 번역본이나 읽으면 됩니다.” 저자 특강을 진행하는 S가 『논어』를 추천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는 고전을 몇 권 더 추천했는데, 번역서의 차이나 번역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독서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안내일지 모른다고 마음을 달래봐도, 그의 인문 소양을 신뢰하기 어려웠던 이유들이 눈에 밟혔다. 과학서나 실용서를 추천했거나 인문학 특강이 아니었다면,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S는 인문학 전도사를 자처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문학도에게 번역은 흥미롭고 중요한 탐구 주제니까.      


번역의 중요성을 인식하려면 언어의 가치부터 살펴야 한다. 언어는 인문학의 토대다. 문학인들은 적확한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언어 감각을 벼리고 문체를 연마한다. 세상과 인생의 단면을 다름 아닌 ‘언어’로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념어 없이는 사유를 전개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는 철학의 도구이기도 하다. 역사가들 역시 과거사의 복합적인 인과관계를 기술하기 위해 ‘언어’를 정교하게 다룬다. 언어가 이토록 요긴하기에 두 언어를 매개하는 번역의 가치도 드높아진다. 언어가 인문학 꽃이 피어나는 대지라면, 번역은 대지를 튼실하게 다지는 토양이다.      


사람들이 자국의 문화만 좋아하거나 세상에 하나의 언어만 존재한다면 번역이 불필요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나라의 문학과 사상을 사랑한다. 카프카, 베르베르, 줄리언 반스를 읽는가 하면 예수와 부처를 따르고 소크라테스를 공부한다. 이러한 작품을 원어로 읽는 이들은 소수다. 사상이든 종교든 선진 문화든 대부분 번역서로 읽는다. 번역이 문명을 이끈다. 두 언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세계관도 만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번역가들은 문명의 매개자다. 번역이 없다면 문명은 얼마나 옹졸해질까?!      


학문 세계에서는 번역이 더욱 중요해진다. 개념어 하나도 소홀히 번역할 수가 없다. 가령, 한양대 사학과 강진아 교수가 번역한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를 보자. 세계 체제론자 조반니 아리기의 마지막 저서인데, 출간 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공개 비판이 제기됐다. 아리기의 주저를 앞서 번역한 백승우 교수가 강진아 교수의 오역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지엽적인 오역이 아니었다. 백승우 교수의 전언은 이렇다.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체제 분석이나 아리기의 논의와 관련된 용어에 관해 연구자들과 함께 적절한 용어를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 합의에 이른 개념어가 정착된 상황에서 강진아 교수가 “기존의 개념어와 다른 번역어를 제시”해 혼란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타당한 비판이라고 느끼면서도 ‘혹시 백승우 교수 측의 기득권 지키기나 졸렬한 밥그릇 싸움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오역 논쟁 중에는 무의미한 시비도 적지 않다. 베테랑 번역가 노승영은 한 오역 논란에 대해 “오역을 지적하는 문장 중에는 오역으로 보기 힘든 문장도 있었고, 오히려 훌륭한 번역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백승우 교수의 비판은 타당했을까? 실상은 이내 드러났다. 출판사가 나서서 책을 회수했고 강진아 교수는 문제 제기를 반영해서 수정하여 재출간했다. 당사자의 심정은 모르지만, 나로서는 정직하고 신속한 학자적 양심과 출판사의 상도에 감동했던 일화였다.      


우리 학문의 뿌리가 튼실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수많은 개념어와 단어들이 근대 일본의 번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민주주의, 개인, 문화 등이 모두 일본이 번역한 단어들이다. 영어 ‘소사이어티(society)’는 일본어로 동료, 집회, 교제, 조합, 여반(侶伴) 등으로 번역되다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사회’로 정착되었다. ‘인디비주얼(individual)’은 독일자, 일물(一物), 인가(人家) 등으로 옮겨졌다가 근대 일본의 스승으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람 각각’ ‘국민 한 사람’으로 번역하면서 지금의 ‘개인’으로 수렴됐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비로소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어를 대체할 우리말 개념어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일본을 거친 번역어가 왜 문제일까? 일본의 태도로 인해 본래의 개념이 왜곡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영어 데모크라시(domocracy)를 근대 일본인들이 번역한 말이다.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ια)’에서 온 단어다. 데모크라티아의 어근은 민중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데모스(δημοσ)’다. 데모크라티아는 구체적인 ‘정치 체제’이지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다.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두는 다른 개념들, 이를테면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플루토크라시(plutocracy) 등이 귀족정치, 금권정치로 번역되듯이 domocracy도 ‘민중정치’로 옮겨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리스학자 유재원 교수는 말한다. 일본의 출중한 번역 실력을 감안한다면 ‘민주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기는 어렵다는 게 그의 견해다.    


“데모스는 민중이라고 제대로 번역하면서 왜 데모크라티아의 번역에서는 ‘민주(民主)’라고 번역했을까? 민중과 민주의 차이는 무엇일까? 민주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뜻한다. 추상적 주권을 가졌다는 ‘민주’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낱말의 차이는 엄청나다. (…) 그리스어를 비롯한 서양 말에는 ‘민주주의’란 말이 없다. ‘민중정치’라는 뜻의 ‘데모크라티아’가 있을 뿐이다. 민중정치 체제에서는 민중은 그저 주인이 아니라 진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다.”        

  

정교한 번역어를 갖거나 훌륭한 번역서가 많아질수록 외국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기 수월해짐에도 불구하고 번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높지 않다. “잘못된 번역이 학문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번역이야말로 중요한 학문 활동”이지만, 학계도 번역의 가치를 폄하하기 일쑤다. 비평가 오창은의 말을 빌자면, “번역의 가치보다 원전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후진 학문 사회”다. 해외 유학의 가치가 절대화된 사회도 마찬가지다. “유능한 교수가 번역에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제자를 자신이 유학한 외국 대학으로 보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해외 유학파 교수의 권력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상징 권력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해외 유학을 다녀온 제자일 수밖에 없고, 유능한 번역가는 해외 유학의 상징 권력을 위협하는 잠재적 위험 요소이기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다.”      


두 언어 사이에서 원저자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적확한 우리말을 찾기 위해 사전을 샅샅이 뒤지는 번역가들! 중요한 개념어를 최적의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단어 하나와 씨름하는 학자들! 이들은 현장에서 번역의 가치를 드높이는 동시에 인문학이 어떠한 학문인지 보여주는 지성인들이다. 번역이 우리의 지적 세계를 넓힌다는 사실을 아는 독서인들 역시 번역 문화를 가꾸어갈 주인공들이다. 이처럼 가치 있는 번역을 도대체 누가 무시하는가? 어쩌면 일부의 개인이나 일개 집단이 아니라, 한 사회의 의식 전체가 번역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번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기 위해 또는 번역 문화를 고양하기 위해 어떡해야 할까? 학계는 번역을 학문 성과로 인정하지 않는 시선부터 극복해야 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이니만큼 그만큼 절실한 과제일 것이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가야트리 스피박 교수는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어로 번역하고 주석과 해제를 달았던 경력이 학문 업적으로 인정되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술 번역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학계를 생각하면 스피박의 사례는 부러우면서도 속이 쓰리다. 지적 생활을 추구하는 일반 독서가들도 번역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출판 시장에서 번역물 비중이 높아서가 아니다. 번역의 가치에 대한 자각과 진지한 관심이 인문학의 토양을 풍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언어나 번역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심도 있는 독서를 논의하기 힘든데, 독서법을 다룬 교양서가 이에 대해 일은 드물다.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이나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와 같은 명저들이 언어의 가치와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훌륭한 독서 문화는 지적인 저자들과 눈 밝은 독자들의 합작품이고, “번역의 가치를 아는가”라는 물음은 독서가의 안목을 평가하는 하나의 잣대가 될 만하다.      


번역의 가치를 알리는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노력도 있지 않을까? 번역서를 소개할 때 저자와 함께 번역자도 언급하기, 옮긴이의 말을 꼼꼼히 읽기, 여러 번역본을 같은 책으로 치부하지 않기 등은 인문학적 관심의 실천이자 번역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일이다. 누구나 다른 언어를 번역할 줄 알아야 하고 여러 종의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읽어야 진정한 독서다, 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 줄의 문장조차 번역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프로야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스윙을 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만, 야구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다른 스포츠와 무엇이 다른지를 알면 경기가 더욱 흥미로워진다. 번역을 아는 재미도 매한가지다.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프로 선수(번역가)의 몫이지만, 번역의 즐거움을 맛보는 일은 모두(독서가)에게 열려 있다. 번역의 가치를 알아갈수록 지적인 희열이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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