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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원 Oct 24. 2021

논문을 영어로 쓰라고요?

언어 제국주의와 영어 공용화론

영어가 더욱 강력하게 '세계어'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15만 명에 불과했던 소수 부족이 사용하던 게르만어의 지역 방언이 오늘날에는 약 15억 세계인이 말하고 알아듣는 언어로 성장했다. 그뿐인가! 인터넷의 70% 이상이 영어로 된 텍스트다. 가히 영어의 시대인데도 묘한 역설이 존재한다. 영어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 인구의 1/4뿐이다. 소수의 언어가 '세계어'가 되어버린 셈이다.      


언어는 권력이다. 이를 수긍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해외여행을 할 때 현지어를 할 줄 아는 가이드나 여행자를 떠올려도 좋고, 지적인 대화를 나눌 때 다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의 자료 조사력을 생각해도 되겠다. 언어의 정보 접근성은 지적인 권력으로 이어진다. 절대 권력이 되기 시작하면 다른 권력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다른 언어의 사용을 무력화시킨다. 최소한 영어 비사용자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언어 제국주의 (linguistic imperialism)'가 탄생하는 배경이다. 언어 제국주의라는 말이 허용된다면 21세기의 '언어 제국주의'는 다름 아닌 "영어 제국주의"다.      


제국주의는 때때로 전쟁을 불사한다. 전쟁에는 사상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언어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힘』의 저자 멜빈 브래그는 영어 제국주의로 인해 타격을 입은 첫 번째 사상자로 ‘웨일스어’를 꼽았다. 전사자나 희생자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웨일스어’는 영어 제국주의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니다. 실제로 언어학자들은 영어에 의한 전사자, 다시 말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마는 언어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영어의 엄청난 위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영어 공용화론을 주장하는 글로벌한 시각이다. 1998년 소설가 복거일에 의해 제기된 영어 공용화론은 한국어와 함께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세계화 시대에 발 빠르게 적응하기 위함인데 이러한 주장 뒤에는 민족주의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과 민족어인 국어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이 깔렸다. 이러한 관점을 ‘세계주의’라고 명명하기도 하나, 식견 있는 세계주의자들은 개별 민족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타당한 개념인지 의심스럽다. 명망 높은 세계주의자는 민족어를 배타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 공용화론이 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리라. 언어 권력을 갖추어 국제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수단으로 느껴진다면 말이다. 영어 공용화론에는 언어를 의사소통을 위한 표현 수단 이상으로는 보지 않는 도구적 언어관이 전제되어 있다. 영어 공용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고 해서 국민들의 영어 실력이 증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언어학 박사인 경희대 한학성 교수는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한다고 해서 전 국민이 영어를 잘하게 되리라는 건 망상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영어 사용 능력이 향상된다고 해도 영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국민의 20%에 불과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장 중요한 반론은 아마도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이리라. 언어는 문화와 의식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영어 공용화론은 우리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리라는 지적이다.     


영어를 상류 사회나 고등의 문명으로 도약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관점은 다른 나라에도 존재했다. 메이지 시대의 모리 아리노리(1847~1889) 사례가 그렇다. 일본의 외교관으로 초대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일본 근대 교육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교육의 자유, 종교로부터 독립된 교육, 여성 평등을 주장하며 메이지 시대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모리는 『일본의 교육』이라는 유명한 책에서 ‘영어를 국어로 삼자’고 썼다. 영어 공용화도 아닌 ‘영어 국어화’론을 주창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펼쳐졌다. 당대의 평론가이자 사상가인 바바 다쓰이(1850~1888)는 영어의 가치와 중요성을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기초 일본어 문법』을 영문으로 출간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출간된 이 책의 서문에서 바바 다쓰이는, 모리의 영어 국어화론을 반박한다.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나의 국민이라면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을뿐만 아니라 대다수 대중이 국가의 중대사로부터 소외되고 말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영어가 세계적 지위를 획득하기 시작하면서, 영어의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하는 일은 국제 시대에 대처하는 지식인의 임무이기도 했으리라. 누가 지혜로운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의 몫이다. 어느 시대에나 탁월한 견해와 시시한 견해가 함께 떠돌아다니는 법이다.      


바바 다쓰이의 혜안처럼, 영어 공용화론은 순진한 주장이다. 영어 제국주의를 세계인들의 자발적인 동조 하에 우연히 등장한 현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학자 유재원 교수는 “영국과 미국의 경우, 언어 전쟁에서 승리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고 했다.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민중들에게서 지역이나 경작지를 빼앗거나 그들을 착취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가져온다. 미래의 제국은 정신의 제국이 될 것이다.” 영어 제국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복거일의 주장처럼 순진한 발상은 거듭 재생산될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권력임을 알고 언어 전쟁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지름길임을 간파한 이들의 실상을 알지 못하면 근시안적인 주장을 펼치고 만다.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그 예다.      


‘영어 논문’은 영어 제국주의를 직시하지도, 현명하게 해석하지도 못한 주장이다. 우리의 국력을 키워가는 길도 아니다. 영어 논문을 주장하는 이들과 달리, 유재원 교수는 영어의 절대적 우위가 모국어로 학문하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학자들의 모국어 인식이 중요하다며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한국인이, 한국의 화학자와 물리학자를 위해 논문을 써야 한국의 과학과 집단지성이 발전합니다. 우리끼리 훌륭한 논문을 쓴 뒤 학계에서 평가받아서 영어로 바꿔 발표하면 돼요.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영어로 논문 쓰라고 난리입니다. 대학평가 기준이 영어 논문이죠. 학술진흥재단의 평가 기준이 한글로 논문을 쓰면 120점이고, 세계적인 SGI급 학술지에 등재된 영어논문은 600점을 줍니다. 5배 차이가 나요. 이런 식이라면 한 세대가 지나면 우리나라 학문은 다 망합니다. 후손들에게 뭘 남겨주겠다는 겁니까. 영어 논문을 남기겠다고요?”     

조선은 전 세계가 찬탄하는 기록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뿐만이 아니다. 개인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동시대인 16세기를 살았던 셰익스피어와 퇴계 이황을 비교해 보면 두 거장에 대한 기록물의 차이가 천양지차다. 당대의 유럽은 개인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반면(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생애도 오리무중인 기간이 많다), 비록 선비들만 해당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재산 분재기, 일기 등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정조는 단행본 40권 분량의 『홍재전서』를 남겼고 문인들의 전집도 엄청난 분량이다.      


많은 기록 유산이 전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의 문명에 곧장 접속하지는 못한다. 모든 기록이 한자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한문학자들이 조선의 고전들을 꾸준히 번역해 주지 않는다면 대중들은 선조의 지적 유산에 접속할 길이 요원하다는 의미다. 이유는 분명하다. 조선은 사대주의가 심한 나라였다. 중국을 떠받들었다. 그 결과 백성은 우리말을 사용했지만, 지식인은 한자어로 책을 썼다. 21세기는 영어 제국주의 시대다. 영어의 힘이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작금의 세태가 조선의 사대주의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비슷한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유재원 교수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영어 논문을 남기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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