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왜 멈추는가
우리는 모두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스스로의 것’인지는 잘 묻지 않는다.
이 글은 사유의 훈련이 왜 필요한가를 묻기 위해 쓰였다.
물론 이 사회에는 이미 고차사유가 가능하거나,
자기 내면의 중심을 분명히 세우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매우 많다.
그리고 그 수는 결코 소수라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그들의 사유가 더 나은 방향으로 열릴 수 있도록,
우리가 처한 구조적 문제와 인간 내부의 사유 메커니즘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위한 시도다.
사유는 본능이 아니다.
인간은 저절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누군가가 대신 세팅해준 해석 체계 위에서
‘믿고 따르며 판단하는 감각’을 사유라고 오인하며 살아간다.
생각은 자동적이고, 판단은 반사적이다.
뉴스를 보면 감정이 앞서고, 누가 말하면 편이 갈린다.
우리는 “왜 그렇게 느꼈는가?”, “왜 이 판단이 옳다고 믿는가?”를 묻지 않는다.
익숙한 감정과 소속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덜 피곤하고,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멈추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들이 있다.
무지하거나 게으른 탓만이 아니다.
이유는 정밀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가장 먼저, 인간은 인지 에너지를 아낀다.
의식적으로 사유하는 것엔 의외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비용이 훨씬 덜 드는 익숙한 서사와 감정 반응에 기댄 직관적 판단을 선호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심 없는 확신’을 더 자주 선택하게 된다.
둘째, 정치와 종교는 더 이상 논리적 신념 체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투사하는 무대가 되었다.
이념은 정체성이고, 진보나 보수는 사실이 아니라 자아 소속의 선택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 입장이 ‘나 자신’의 일부라고 믿기 때문에 끝까지 고수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변질된 것이다.
셋째, 오늘날 우리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해석할 힘이 부족해서 사고가 멈춘다.
정보는 넘쳐나고, 프레임은 더 빠르게 도착하며,
사람들은 사실을 보기 전에
그 사실을 해석해주는 렌즈부터 받아든다.
결국 우리는 정보가 아니라, 프레임을 먼저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하라리의 주된 통찰중 하나인 '정보와 진실'에 관한 내용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된다.
그리고 넷째, 우리는 사유를 배운 적이 없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 법은 배웠지만,
질문을 구성하고,
스스로 점검하고,
비판과 의심의 회로를 작동시키는 법은 배운 적이 없다.
정해진 것을 믿고 따르는 법만 훈련되었을 뿐,
‘자기 사유’라는 영역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능력으로 남아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왜 믿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감정적 선택이며,
얼마나 무비판적인 확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는 감정으로 도달하는 대상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의심과 겸손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선택을 의심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이 나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 믿음이 감정이 아닌 사유의 결과인지,
소속이 아닌 성찰의 결과인지 묻기 위해서다.
무지성으로 줄을 서는 사람들은 ‘게으르다기’보다,
사고 체계를 한 번도 훈련받지 않은 채,
감정과 소속으로 세계를 해석하도록 방치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결국
‘확신이라는 감정’을 진리의 논리로 오인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끝내기 아쉬운 여운을 담아...
"나는 정답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질문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그 질문을 던지는 힘이야말로,
우리가 사유를 훈련해야 하는 이유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