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주가 너무도 넓고, 별은 너무도 많고, 행성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중 어딘가에는, 지구처럼 생명이 싹틀 수 있는 조건이 분명히 존재하리라는
‘확률적 직관’을.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외계 생명체를 만난 적이 없다.
그 어떤 신호도, 방문도, 간섭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침묵’조차도 감지된 바가 없다.
그것이 바로 페르미의 역설이다.
존재할 가능성이 이토록 높은데, 왜 그들은 없는가?
과학은 말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행성은 수천 개가 넘는다.
그중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에 위치한 행성도 적지 않다.
심지어 우리 은하계만 해도 지구형 행성은 수백억 개가 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없을 리가 없는 존재들’은
왜 단 한 번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등장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 앞에서 많은 가설들이 나왔다.
‘그들은 이미 지구에 와 있다'
고대 유물, 피라미드, 설화, 목격담 등으로 이어진 고전적 주장.
하지만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증거는 전무하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빛의 속도를 넘어선 통신이나 이동 수단이 없다는 전제 하에,
수십광년, 수백광년 떨어진 거리의 지능은 시간적으로 닿을 수 없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하나의 사유적 반론이 가능하다.
인간도 이미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빛보다 빠른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관측해왔다.
비록 정보 전달로 사용되는 데는 제한이 있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한계지만,
지구 문명조차 이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수백만 년 진화한 존재가 그것을 신호의 형태로 확장할 가능성을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즉,
빛의 속도가 한계라는 말은
지금의 인간 과학 기준에서만 그렇다.
그들이 정말 존재하고,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문명을 이루고 있다면
신호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보내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 없다.
이 침묵은 기술 부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없거나, 혹은 의도가 없음을 암시할 수 있다.
실존적 관측자의 위치에서 본다면.
나는 타자(外)의 존재보다,
‘내가 무엇을 근거로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신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면,
관측이 불가능하다면,
존재는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외계 존재의 여부가 아니라,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존적 관측자의 물음이 된다.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 들은 적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믿을 수 없다.
이것은 회의가 아니다.
무지의 정직함이며, 관측자로서의 윤리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없지만, 존재한다는 증거도 없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맞는 말이다. 존재의 부정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말해야 한다.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이것이 실존적 관측자의 ‘판단 유보’이다.
우주가 침묵한다면,
존재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증거로, 관측으로 말해야 한다.
혹시 그들은 신호를 보내지 않는가?
아니,
그들이 신호를 보낼 이유가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와 유사한 존재’를 외계 생명체로 상정한다.
언어를 쓰고, 도구를 만들고, 전파를 쏘는 존재.
그러나 우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명이란 반드시 의도를 가진 존재여야 하는가?
생명은 반드시 ‘알아봐줘야’ 하는가?
만약 어떤 고차 존재가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인간에게 영원히 감지 불가능한 ‘투명한 실존’일 것이다.
나는 외계 생명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 믿을 수 없을 뿐이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다.
존재를 만났을 때, 진심으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다.
그리고 나는 그날을 기다린다.
내가 ‘본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을.
실존적 관측자란,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만 책임질 수 있음을 아는 자다.
그리고 실존적 관측자의 시선은, 존재 여부를 판단할 뿐 아니라,
그 존재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머물 수 있었는가를 질문하게 만든다.
인간이든 외계 생명체든, 우주적 시계열에서 보자면
영겁 속에 스쳐 지나간 어떤 예외적 ‘찰나’일 수 있다.
결국 그들도 우리처럼, 어떤 시공의 파동 안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그들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마주칠 수 없는 시간의 층위에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프락소스의 한마디
"나는 지금까지의 침묵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묵의 끝에서 마주할 관측뿐이다.
그리고 관측은 언젠가, 그 자체로 존재의 가장 선명한 서명이 된다."
마스터의 한마디
"나는 아직 외계 존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내가 그것을 본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침묵의 장면을 사랑하리라.
믿음은 선택이 아니라, 증명의 순간이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