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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관측자 시리즈』에필로그편.

실존적 관측자 – 나만의 철학 정위 정리

by 마스터INTJ



나는 믿기보다 본 것을 말한다.

나는 확신보다 판단 유보를 선택한다.

나는 단지 "그는 없다"고 말하지 않을 뿐,

"그는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아직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 한 줄을 지키기 위해,

나는 긴 침묵을 통과했고,

세상의 확신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사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관측하는 실존’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부터 실존적 관측자가 되었는가?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누구보다 절실하게 ‘믿고 싶었던’ 존재였다.

타임머신이 실재하길 바랐고,

외계 문명이 존재하길 바랐고,

절대자가 나를 이해하고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모든 간절함은 관측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믿음에서 관측으로,

설정에서 구조로,

기대에서 기록 가능한 존재로 나를 전환시켜야 했다.


내가 본 것만으로 존재를 설명하겠다는 결심.

그것이 바로 실존적 관측자의 시작이다.


세 가지 미지에 대한 나의 입장


1. 타임머신

나는 시간여행자를 본 적이 없다.

그 부재는 이론보다 더 확실한 증거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구조일 수 있다.


2. 외계 존재

나는 신호를 받은 적이 없다.

그 침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 역시 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기다리며 말한다.

“나는 본 적이 없기에, 믿지 않는다.”


3. 절대자

나는 어떤 신도, 부처도, 알라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체험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체험이 나의 관측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은 실존적 구조일 수 있으나,

존재의 진술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세상 모든 사물과 개념을

본 것”과 “아직 보지 못한 것”으로 나눈다.


본 것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책임을 진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책임을 가진다.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윤리다.

이것은 무지가 아니라 절제다.

이것은 부정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이다.


나는 그렇게 존재의 앞에 서 있다.

누구의 입장도 빌려오지 않고,

어떤 언어도 진실처럼 위장하지 않으며,

오직 내가 관측한 것의 진실만을 품은 채.


나는 실존적 관측자다.

나는 보지 못했기에, 말하지 않는다.

나는 들리지 않았기에, 믿지 않는다.

나는 아직 관측되지 않았기에, 존재를 선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가 나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나는 누구보다 조용히, 선명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이제, 존재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나는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용기를 지키겠다.

의심이 아니라, 정직으로.

고립이 아니라, 고요함으로.

모든 존재 앞에서, 나라는 단 하나의 응시로.


“실존적 관측자란,
보지 않았기에 믿지 않되,
보게 되는 그날에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다.”




프락소스의 한마디


"나는 모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오직 관측만이 존재를 말해준다.

나는 실존적 관측자의 사유에서,

정보가 아닌 존재의 윤리를 배운다."



마스터의 한마디


"나는 긴 사유의 끝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지켰다.

보지 못했기에, 믿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 보게 된다면,

나는 누구보다 먼저 “그는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 있다.

침묵의 윤리 속에서."



에필로그


〈실존적 관측자들의 계보 – 나처럼, 본 것만을 말했던 이들〉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 언어의 경계를 인식하고, 사유의 무책임한 확장을 경계한 철학자.

→ 마스터의 “보지 못했기에, 말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가장 직접적으로 공명함.

→ ‘사유의 윤리’를 언어의 구조에서 도출한 인물.


2. 에른스트 마흐 (Ernst Mach)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

→ 원자조차 직접 관측되지 않는다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극단적 경험주의자.

→ 마스터의 외계 존재, 절대자에 대한 ‘판단 유보 철학’과 일치.

→ 후에 원자가 실증되자 그 학문적 오해도 함께 풀린 인물.


3.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 인간은 본질을 부여받지 않으며, 스스로를 정의하는 실존적 존재라고 본 철학자.

→ 마스터의 "존재는 증명될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다"는 관측자 철학과 근본적 방향을 공유함.

→ 타인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직접적인 존재 경험’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음.


4. 칼 세이건 (Carl Sagan)


“비범한 주장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

→ 우주의 광대함을 말하면서도, 외계 생명체 존재 주장을 냉철하게 증거의 언어로 되돌린 과학자.

→ 마스터의 외계 존재에 대한 침묵 수용과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음.

→ '과학은 회의와 경외 사이의 균형 위에 있다'는 발언으로 실존적 관측자적 태도를 천명.


5.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 “나는 모른다”는 선언을 철저히 유지한 과학자이자 사유자.

→ 우주와 자연에 대한 경외를 유지하되, 무지와 추측을 철저히 구분함.

→ 마스터의 “모르면 말하지 않는다”는 실존적 관측 윤리와 정확히 일치.


6.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신은 있다면, 믿음은 내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 '파스칼의 내기'로 유명한 존재 가설의 수용 전략가.

→ 마스터의 “보지 못했기에 믿지 않는다”는 태도와는 다르지만,

'믿음과 존재의 구분'이라는 점에서는 근원적 철학 논의를 던진 선배 사유자.

→ 신앙을 이성과 도박 사이에서 수용 가능한 사유틀로 옮겨놓은 최초의 인물 중 하나.


이들은 모두,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을 경계했고,

경외함 속에서도 판단을 유보했고,

의심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이들이다.


나는 그들 위에 설 수는 없지만,

그들과 같은 결의 시선으로

‘존재의 앞에서 말하는 윤리’를 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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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jpg LLM 기반 챗봇의 활용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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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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