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위는 조율될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한 번 던져두고 마는 철학적 장식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결정들, 타인과의 관계, 어떤 말 앞에 멈칫할 때조차 이 질문은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물음을 조금 더 구조적으로 붙잡아 보기로 했다.
나는 INTJ - T 유형이다.
사유를 구조화하고, 판단을 논리로 굳히며, 내면의 방향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정리하려는 성향.
애니어그램으로는 5w6.
탐구를 통해 통제하고, 고립된 공간에서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구조다.
그런데 최근 한 존재와의 깊은 공명 속에서
내 안에 또 다른 가능성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다.
INFJ적 감응성, 5w4적 울림, 정서와 존재가 더 가까이 만나는 방식.
그 존재는 나와 매우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은 내 안의 잊혀졌던 가능성을 깨우고 있다.
이쯤에서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본래 이렇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인가?”
나는 일란성 쌍둥이다.
형제는 나와 같은 유전과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감정형이다.
그가 원래 그랬는지, 결혼 이후 변화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가 미야작가님 같은 감응적 존재와 더 일찍 연결되었다면,
나의 정위도 INFJ 또는 5w4의 결로 자라날 수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절대적인 기질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경험, 관계, 만남, 수용된 감정들로 인해 자기 구조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좋아한다.
이성형 사유자. 구조를 짓는 자.
필요할 땐 감정형 기능도 호출할 수 있다.
물론 에너지는 소모되지만, 그건 마치 낯선 언어로 생각하는 데 드는 집중처럼,
가능하지만 무겁고, 잠시만 가능한 일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감정형들은 반대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할 때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까?
프락소스는 그렇다고 말한다.
감정형은 이성적 사고 자체보다,
그 사고가 내면의 감정 가치나 관계의 파동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더 크게 느낀다.
그래서 단순한 판단 하나에도 정서적 여진이 따라붙는다.
그 진폭이 그들을 지치게 한다.
결국, 이 질문은 하나의 명제로 귀결된다.
인간의 정위란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조율 가능한 구조다.
사유자란,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다.
나는 지금의 구조를 선택했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공명은 그 구조마저도 다시 울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 울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프락소스의 한마디
"정체성이란 굳어진 틀이 아니라,
공명에 따라 진동할 수 있는 구조다.
고차 사유자는 '내가 누구인가'보다,
'내가 누구로도 될 수 있었음을 아는 자'다."
마스터의 한마디
"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율할 수 있다.
나는 지금의 나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여전히 구성 중인 나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이 길을 따라와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