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아, 비켜라, 내가 간다

--그림에세이.4.클레,뭉크의 그림과 함께 '두려움'을 곱씹다

by 강물

탈진이 3년 가까이 지속될 때, "사표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과 갈등을 계속 했다. 내 상태를 생각하면 일을 그만 두는 것이 맞지만, 생계 문제가 걸려 있는 결정이다. 일을 그만두면 다른 일터를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직을 염두에 두고 다른 일터를 미리 알아 봤지만 결국 사직할 때까지 다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사직하고 나서도 새 일터를 구할 때까지 7개월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기간동안에 내 마음에 또아리를 튼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처자식이 있는 몸인데 미래 대책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 사막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캄캄한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는 발걸음처럼 심장은 불안감으로 쉼 없이 뛰었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진 상황에서 날마다 밝아 오는 아침 해는 내 목을 조여드는 억센 손아귀 같았다.


1. 두려움의 가면을 벗어버리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그 때의 내 감정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그림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만났다.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라 불리는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 ‘두려움의 마스크’(Mask of Fear)였다.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는 이상한 마스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리에 비해서 비정상적으로 큰 얼굴, 타원형의 긴 얼굴 자체가 불안정한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얼굴은 하나인데, 다리는 두 사람의 다리라서 기괴한 느낌이었다. 머리 위에 있는 검은 화살표까지 염두에 두면 '가야 하지만 가지 못하는' 심리상태로 느껴진다. 주인공은 두려움을 사로잡혀 가야 할 길을 못 가고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걸음치는 것 같다.



파울 클레는 마스크 관련 그림을 몇 편 그렸다. 그는 “마스크는 예술을 나타내고, 그 뒤에 인간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화가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해서는 안 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파울 클레는 마스크라는 도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 그리고 사람들의 감정을 시각화하려고 했다.

여기에서의 마스크는 코비드19 사태 때 썼던 그 마스크가 아니다. 오히려 ‘가면’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는 연극장에서 각종 연극을 했는데 배우들이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사회적 자아’의 의미로 널리 사용된다.


마스크(가면)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 숨기는 방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숨긴 채, 남에게 보여주고 싶거나, 남들이 기대하는 자아를 선보인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은 마스크 뒤에 감추거나 억눌러져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다 보니 사람들은 늘 정체성의 혼란과 외로움, 욕구불만에 휩싸인다. 가면을 쓰고 살면 속마음을 들키지 않고 단점을 가릴 수 있으니 편하긴 하다. 하지만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자존감이 헝클어지고, 참 자아와 거짓 자아를 분리하게 되어서 정서적인 질환에 빠지기 쉽다.


파울 클레에겐 어떤 두려움이 있었을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1932년이다. 파울 클레는 스위스 출생이지만 거의 일생을 독일에서 활동했다. 그 당시 유럽, 특히 독일은 정치적 불안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혼란과 독일 국민들의 패배감, 그리고 곧바로 밀려든 1929년의 경제공황으로 독일의 경제는 피폐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좌절과 분노를 부추기며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1932년 총선을 통해 제1당이 되었고, 이듬해 1933년에는 입법권을 장악하면서 사실상의 독재 권력을 확보했다. 1933년 파울 클레는 나치당에 의해서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히면서 교수직에서도 해임되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국제적으로 두려움이 광풍처럼 불어닥치던 시대에 파울 클레는 이 그림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이 느끼던 두려움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파울 클레 개인적으로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계속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급기야 1935년에는 희귀난치병인 ‘피부경화증’(Scleroderma) 진단을 받았다. 피부경화증은 면역체계가 잘못 작동해서 자기 조직을 공격하면서 피부 등 몸의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기능이 떨어져 가는 병이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자신의 몸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에 대한 파울 클레 개인의 두려움도 묘사하는 것 같다.

알고 보면 파울 클레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파울 클레가 살았던 시대만 정치적 격변기가 아니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웅크린 고슴도치같이 두려움과 분노와 좌절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정신과 삶을 황폐하게 헤집어놓는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눈보라에 갇힌 등산객처럼 시야가 어두워져서 냉철한 판단을 못 내리게 된다. 합리적 이성이 마비되고 두려움만 증폭되니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 쉽다.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데도 “나는 못 할 것 같다.”고 손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동안 품었던 청운의 꿈조차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기 일쑤이다. 그리고 두려움은 관계도 파괴한다.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도 귀에 안 들리고, 사람들의 충고도 쓸 데 없는 잔소리로 다가온다. 나를 옥죄는 두려움에만 온통 신경이 집중된 까닭이다. 그러다가 두려움은 독버섯처럼 마음 전체를 뒤덮어버린다. 아직 전쟁이 개시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으로 백기를 들어버리는 형국이다. 항전의 기력 자체가 소진된 것이다. 결국 두려움은 인간의 정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육체마저도 나약하게 만들며, 감정을 여름날 가뭄 끝에 메마른 대지처럼 바짝 마르게 만들어버린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주로 두려워하는 항목들을 손꼽자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래의 불투명성에 대한 두려움, 건강을 잃거나 몸이 노쇠해질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 직장에서 해고될 것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궁핍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두렵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모든 두려움 속에도 조금씩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2. 두려움의 얼굴을 마주 보다


서양화가들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이다. 뭉크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불안’(Anxiety)은 그가 그린 ‘생의 프리즈’(Frieze of Life) 연작 중 하나이다. 사랑, 고통, 불안, 절망, 질투, 우울, 이별 같은 다양한 감정과 경험들을 묘사한 작품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다. 붉은 색과 노란 색으로 파도 치듯 일렁이는 하늘은 무겁고도 요동치는 분위기로 그림을 내리 누른다. 역시 소용돌이치는 도시와 강물도 보는 이의 시선을 흔들어 놓는다. 뭔가를 보고 놀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숨 죽인 군중들은 다들 검은 색 옷을 입고 있다. 사람들은 집단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 있는 것 같다.



뭉크의 그림 중에서 가장 대표작을 꼽는다면 ‘절규’(The Scream)일 것이다. 뭉크는 일기에서 ‘절규’를 그린 계기를 언급했다. “1892년 어느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대어 죽을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불타는 하늘에 구름이 피와 칼날처럼 걸려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뒤에 서 있었다. 나는 자연을 꿰뚫는 거대한, 끝없는 비명을 들은 것 같았다.” 뭉크가 들었다고 고백하는 거대한 비명은 사실은 뭉크의 내면 세계 속에서 들려오는 존재적 절규였다.


그림속에서 붉은 색과 오렌지 색의 하늘은 불안에 눌려 있는 혼란한 감정 상태를 보여주듯 소용돌이친다. 강물과 땅은 짙은 청색과 검은색으로, 휘몰아치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게 한다. 다리는 사선 구도로 그려져서 심적인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다리 위를 걸어가는 뭉크의 표정은 마치 유령을 본듯 놀란 얼굴이다. 귀를 막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화폭을 뚫고 들리는 듯 하다. 다리에 칠해진 검은 붓 터치가 마치 위에서 밑으로 추락하는 느낌을 준다. 극심한 공포를 느끼면서 한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는 듯 하다.




아마도 뭉크 만큼 두려움을 잘 알았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다. 13살 되던 해 어머니처럼 따르고 의지하던 한 살 위 누나 소피에 마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가족을 잃은 뭉크는 깊은 슬픔과 좌절감으로 힘들었다. 거기에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뭉크는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 받았다.” 사실 뭉크 자신도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자주 병치레를 해서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뭉크 자신의 마음속에도 도사리고 있었다. 거듭된 가족의 죽음과 아버지의 광기로 인해 여동생 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뭉크의 어린 시절은 그의 정서를 불안과 고독,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나는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면서 깊은 공감을 느낀다. 뭉크가 그린 그림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어릴 때 꾸던 꿈을 그림으로 묘사한다면 바로 절규와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고로,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 현장에 어린 나도 있었다. 나도 그 때 도망치다가 오른손이 부러져서 기브스를 해야 했다. 그 날의 충격과 슬픔은 나에게 악몽으로 돌아왔다.


그 때부터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거의 8년 동안,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무섭게 생긴 시퍼런 존재가 날카로운 창을 들고 나를 뒤쫓아 달려왔다. 어린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쳤으나, 결국 날카로운 창에 찔린다. 피를 흘리면서 나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지하세계 어딘가로 떨어진다. 비명을 지르다가 잠에서 깬다. 이런 비슷한 꿈이 반복해서 나를 괴롭혔다. 결국 죽음의 공포가 가위눌린 잠으로 나타난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트라우마가 되어 나의 감정을 짓누르는 바윗돌이 되었다. 그러기에 뭉크의 그림 속 인물은 무척 기괴한 모습이지만 나에게는 친근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뭉크는 그림 속 공포에 떠는 인물들의 표정 그대로 일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육체적 질병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상황이 뭉크를 위대한 예술가로 빚는 발판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예술 속에 있는 죽음과 질병과 미친 감정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두려움과 질병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뭉크는 고백했다. 뭉크는 어릴 때부터 겪어 온 모든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 표현주의 그림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항상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며,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붓으로 표출했기에 지금도 뭉크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사람의 감정을 후벼 파는 힘을 갖고 있다.


뭉크에게 있어서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어두운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 말에 담겨 있다. “나는 고통 없이 예술을 만들 수 없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내가 내 인생을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뭉크는 자신이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그 아픔을 표현함으로 그 심적 괴로움을 견뎌내게 된다고 말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화폭에 옮기는 행위는 두려움을 피하거나 두려움을 부인하지 않고 두려움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나에게 있다.”고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두려움을 이기는 과정은 시작된다. 병이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만이 의사를 찾는 것처럼, 자신 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마음 치유는 출발한다. 화가들은 그림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 글 쓰는 사람들은 펜으로 자기 내면의 아픔과 직면한다. 그렇게 자기 상태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두려움은 숨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서 치료가 가능해진다.


3. 두려움의 파도에 올라 타다


자기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행위는 결국 ‘자기성찰’의 행위이다. 눈을 떠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 진짜의 내 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의 심리학자 베레나 카스트(Verena Kast)가 말한 것처럼, 두려움이야말로 나를 '진짜의 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겉보기에 문제 없어 보이는 가면을 벗고, 내 속살을 마주 할 때, 비록 아프지만, 나의 실체를 비로소 만난다. 그동안 쓰고 있던 거짓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다. 위장된 현실에 안주하는 나를 일으켜 세워서, 진실과 대면하는 수술을 시도할 때, 나의 인생은 변화의 파도에 몸을 실을 수 있다.

그러기에 어떤 측면에선, 두려움은 우리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 뭉크는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요약한다. “질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의 검은 천사가 요람에서부터 계속 나를 지키고 있다.”(Sickness, madness and death were the black angels that kept watch over my cradle). ‘검은 색’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주지만, ‘천사’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온다. 천사는 인간의 수호자이다. 천사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뭉크는 질병과 광기와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했지만, 그 감정들이 알고 보면 뭉크를 지켜주는 천사였다.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일평생 고통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고통스런 감정들을 표현하면서, 그것들을 견뎌내면서, 그것들과 투쟁하는 가운데 뭉크는 점점 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경지로 올라간 것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2’(Inside Out 2)에서 사춘기 주인공 라일리(Riley)의 마음에 ‘불안’(Anxiety)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들어선다. ‘불안’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난 단순한 공포가 아냐. 라일리가 맞이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게 도와주는 거야.”(I’m not just fear. I prepare Riley for every possible worst-case scenario). 그 대사 그대로, 불안이라는 감정은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계획하고 대비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오늘에 안주하다 보면 미래를 미처 준비 못 해서 허둥댈 수 있는데, 불안한 사람은 두렵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혜로운 내일을 창출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또한 불안한 사람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더 열심히 노력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제공되는 셈이다. 그래서 자신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된다. 또한 불안은 새롭게 닥쳐온 환경이나 역할에 대한 감정일 수 있는데, 두려움이라는 감정덕분에 새로운 일에 대한 적응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두려움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내 속에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 있나 살펴 본다면, 그 두려움들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처와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 촉매제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미래가 두렵다. 점점 더 노쇠해가는 몸, 혹시 닥쳐올지 모를 큰 병에 대한 불안감, 노후 준비에 대한 염려 등 생각해 보면 걱정하고 두려워할 일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며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으리라 다짐해본다. 두려움이라는 거센 파도에 내 자신이 함몰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리라 결심해본다. 두려움이라는 태풍이 나를 어디론가 휘몰아가도록 그대로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내 앞으로 달려오는 두려움을 나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마주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실체를 깊이 파헤쳐 볼 것이다. 그 두려움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과연 확실한 것인지, 과연 나에게 해를 끼칠 것인지, 쓸데 없이 염려를 당겨서 하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볼 것이다. 미리 두려움에 떨면서 자아와 시간을 죽이지 않고, 두려움을 더 밝은 미래를 위한 전환점으로 바꿔 갈 것이다. 두려움을 발판삼아서 오히려 내일을 향해 더 크게 포효할 것이다. 두려움이 나를 이길 수 없게 하고 오히려 내가 두려움을 휘어 잡고, 두려움을 이용해서, 더 나은 나를 빚어갈 것이다. 오늘도 나는 파울 클레의 마스크를 벗고, 뭉크처럼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 한다. 두려움아, 비켜라,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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