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본 텔레비전 만화영화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캔디’였다. 주제가도 지금까지 외워서 종종 흥얼거린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웃으면서 달려 보자 푸른 들을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캔디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얘기를 나누자 거울 속의 나하고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울면은 바보다 캔디 캔디야
고아로 자라서 고독과 가난, 무시와 냉대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밝게 살아가는 캔디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캔디를 보면서 외로워도, 슬퍼도 나도 캔디처럼 이겨내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했다. 이 노래와 애니메이션이 내 가슴에 다가온 것은 어쩌면 내 모습이 캔디와 비슷해서 공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 나의 고독과 현대인들의 고독
어릴 때의 내 모습을 화가가 그린다면, 아마도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일 것이다. 혼자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며 놀기를 즐겨 했다. 동네 아이들이랑 집 뒤 야산을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혼자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거나, 별 목적지도 없이 동네를 한참 걷는다거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슬픔이 진한 상처가 되어서 말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된 것 같다. 과부가 된 어머니가 집 안에서 20대 초반 이모들 여럿과 더불어 가내수공업을 하셨다. 집 안에 사람들은 항상 많았다. 그러나 나는 별로 말이 없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라갔다.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 나누거나 같이 노는 것 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마음 편했다. 고독은 나에게 고통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내 체질에 딱 맞는 옷이었다.
하지만 탈진에 이어 실직을 하고 나자, 고독이 얼마나 쓰디쓴 맛인지를 알았다.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결혼생활을 하거나, 일을 할 때는 몰랐던 감정이었다. 그동안 혼자 있는 건 나 스스로가 선택한 상태였기에 고독은 유희(遊戲)이지, 나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 두고 집에만 있게 되니, 고독은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로 변했다. 고독이 난생 처음 나에게 싸늘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아무 일도 안 하는 나날이 지속되자,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부끄러울 수도 있는 거구나, 처음 알았다. 고독하다는 것이 무능력하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가서 사람들 틈에 섞여서 뭔가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혼자서 칩거하는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인생으로 보일 수 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오래 계속되면 감정은 점점 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자신감은 더 상실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그라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독이 마음과 몸의 병을 몰고 올 수 있고, 고독한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적인 불안 요소도 가중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5년 6월 30일, 외로움의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2014년부터 2023년까지의 10년 동안 세계 인구 6명 중 1명이 외로움을 경험했고, 외로움은 시간당 100명, 연간 87만 100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밝혔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심뇌혈관 질환, 당뇨, 고혈압, 우울증, 자살 등 사망 위험이 26-32% 증가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13-17세 청소년의 20.9%가 외롭다고 호소해 모든 연령대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우려했다. 젊은이들이 가장 고독감을 호소하긴 하지만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현대인들 전체의 보편적인 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의 고독에 대해서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이다.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화가인 그는 일생 뉴욕에서 살면서 도시의 쓸쓸한 풍경과 도시인들의 고독한 모습을 그렸다. 그가 1932년에 그린 ‘브루클린의 방’(Room in Brooklyn)을 보면, 한 여인이 집 안 의자에 앉아 있다. 책을 보는지, 신문을 보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 큰 창문 너머로 도시의 빌딩 숲들이 아련하게 보인다. 그림에 주로 쓰여진 푸른색과 황토색, 연한 하늘색 물감의 톤이 관람자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이 황량한 빌딩 숲의 한 가운데 저 큰 집에서 저 여인은 혼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이 그림은 누구나의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것 같지만, 방 크기가 워낙 크게 그려진데다 큰 창으로 보이는 풍경에 비해 한쪽 편에 덩그러니 앉은 여인은 유독 쓸쓸해 보인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은은한 빛과 그림자는 분위기를 따스하게 만들기보다는 이 여인의 고적함을 더 부각시키는 것 같다. 황량한 빌딩 숲 한 가운데서 우리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지를 새삼 느낀다.
2. 고독한 방에서 나를 마주 하다
일반적으로 고독이라고 하면, 사람들 없이 나 홀로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고독할 수 있다. 고독은 누구랑 같이 있는가와 상관이 없다. 고독은 사람들 안에 있어도 느끼는 감정이다. 사람들과 떨어져서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고독을 ‘상대적 고독’이라 한다면,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은 ‘절대적 고독’이다. 현대 도시인의 고독은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며, 그래서 도시인은 절대 고독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절대 고독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 호퍼의 작품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이다. 집 안 거실에 부부가 앉아 있다. 남편은 신문을 읽고 있고, 부인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부인은 피아노를 연주하기 보다 그냥 건반 하나를 툭 건드리는 것 같다. 피아노에 딱히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탁하다. 두 사람 사이에 그려진 문 그리고 둥근 탁자가 그 둘 사이에 가로막힌 감정적 장벽처럼 보인다. 그림 좌편과 그림 아래쪽에 드리운 어두운 색깔이 이 부부의 마음 상태를 대변해준다. 이들은 대화의 부재 상태, 즉 각자가 고독한 상태로 느껴진다.
흔히 사람들은 외로워서 결혼을 한다고 말한다. 결혼을 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결혼한다고 해서 고독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고 해서 고독하지 않은 건 아니다. 고독은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내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한 공간에 있어도 서로 먼 거리처럼 느껴지는 그림 속 부부의 모습처럼, 많은 부부들이 함께 부대끼며 살지만 마음의 거리는 먼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인간은 “함께 있어도 나 혼자”라는 실존적 고독감을 피할 수 없다. 한 집에 같이 사는 부부가 각자 고독하다면, 다른 관계들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의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는 그녀의 유명한 시 ‘고독’(Solitude)에서 이렇게 읊었다.
웃으면 온 세상이 함께 웃어주지만
울면 혼자서 울어야 하리
슬픈 이 땅은 기쁨을 빌려 쓰고
스스로 견뎌야 할 고통은 충분하리
.....
기뻐하면 사람들 찾아오지만
슬퍼하면 외면하리니
기쁨은 함께 나누려 해도
고통은 혼자 감내해야 하네
즐거우면 친구가 많으나
슬프면 모두 떠나가고
달콤한 포도주는 나누지만
쓰디쓴 잔은 혼자 들이키리
삶에서 부닥치는 모든 상황에서 인간은 어차피 혼자 버텨내야 한다. 문제도 혼자 풀어가야 하고, 고민도 혼자서 머리 아파야 한다. 누군가 잠깐 도와줄 순 있지만 결국은 내가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철저히 혼자이다.
삶을 혼자서 직면한다는 이치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작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Wanderer above the Sea of Fog)이다. 안개와 비구름이 자욱한 어느 바닷가 바위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 모습이다. 물인지 물안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날은 흐리고, 시야는 광활한 신비에 묻혀 있다. 남자는 바다를 보면서 골똘한 상념에 잠겨 있다. 지팡이를 짚고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뭔가 결연한 결단을 앞둔 사람처럼 느껴진다.
프리드리히는 평소에 자연을 장엄하고 아름답게 묘사했고, 내면세계의 성찰을 유도하는 그림을 그렸다. “화가는 자기 앞에 있는 것뿐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하는 그림을 추구했다.
이 그림은 자연의 숭고미도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처절한 고독을 나타낸다. 어떤 고민인지, 어떤 선택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듯 하다. 산적한 일거리들을 뒤로 한 채, 이 조용한 바닷가를 찾은 그는 혼자 생각해야 하고 혼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홀로 있어야만 하고, 내가 홀로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그래야 온전히 자연을 숙고하고 느낄 수 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나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나는 나의 구름과 바위와 하나가 되어야 내가 될 수 있다. 고독은 자연과의 대화를 위해 필수적이다.”
프리드리히는 누구보다 고독을 깊이 이해한 화가였다. 그의 나이 7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 해에 여동생 엘리자벳도 사망했다. 13살 때 바닷가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중, 얼음이 깨져서 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었다. 형 크리스토퍼가 그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프리드리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났다. 이 사건은 그의 마음에 죄책감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17살 때엔 또 다른 형제인 아우구스트도 사망했다. 어린 시절에 그의 마음에 슬픔을 남겨 준 가족들과의 이별은 그를 사색에 잠기는 아이로 만들어갔다. 죽음, 이별, 슬픔, 침묵, 고독, 불안, 죄책감 등은 그에게 우울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그 고통스런 내면의 경험들을 신앙심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가 경외감 어린 시선으로 대자연을 그리고, 인간 존재가 왜소하고 덧없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의 쓰라린 경험들을 고독한 사색으로 녹여서 작품으로 표현했고,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찰하도록 말을 건네는 것이다. 결국 프리드리히의 인생에 찾아온 가슴아픈 고독은 그의 그림을 철학적 깊이로 이끈 바탕이었다.
3. 고독과 친구하면 자아가 성장한다
고독은 어두운 밤 홀로 쓸쓸한 비를 맞는 것 같은 경험이다. 하지만 그 고독의 비가 그치면 새로운 꽃은 피어난다. 고독은 마음을 아프게 찌르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한 뼘 더 피어난 자아를 만난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Donald Woods Winnicott)이 강조한 대로,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정교한 심리적 성숙의 결과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결국은 혼자 지낼 수 있는 경험이 그 사람을 훌쩍 도약하게 한다.
임재범의 노래 ‘비상’의 가사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고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외로움은 나에게 누구도 말하지 않을 소중한 걸 깨닫게 했으니까
고독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소중한 진리를 깨닫게 돕는다. 고독은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를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얘기를 나누는 것도 필요하고, 주어진 업무에 매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바쁘고 중요한 일들만 하다가 자신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나온 날들을 평가하고, 현재의 감정에 귀 기울이며, 다가올 내일을 준비하는 나 자신에게 오롯이 주목할 시간이 꼭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도 선한 일이고, 일에서 성과를 거두는 것도 멋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선 나 자신이 사는 것이다. 나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 자신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나 자신을 살피려면 물러나서 혼자 머무는 시간을 나에게 선물해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감명깊게 읽었던 책 중에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이 쓴 [팡세](Les Pensées)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구절이 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하나, 혼자 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줄 모르는 데 있다.”
혼자 방에 머물러 있지 않는 습관이 왜 불행을 초래할까?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소홀히 하기에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남을 알 수도 없고, 세상을 알 길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가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먼저 아는 지식이 제일 우선적이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면서 남을 돌보는 데에 에너지를 소진하거나, 일에 빠져 살면 장차 허무와 방황이라는 안개 속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혼자 칩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1회성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규칙적으로,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떼어서, 가족도, 일도, 공부도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관심 가지는 것이 좋다. 짤막하게라도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점검하는 습관이야말로 최고의 습관이다. 오늘 나를 힘들게 한 일은 뭐였나? 요즘 나를 짓누르는 걱정의 정체는 뭘까? 앞으로 5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일기를 쓰면서 이런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져보면 피상적으로 알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오늘 하루에 대해서 감사한 일을 적어 보거나, 반성할 일을 메모해보는 습관도 괜찮다.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써 보는 시도도 많은 유익을 준다. 단 10분의 시간이라도 마음의 양식이 될만한 책을 읽으면서 와닿는 글귀에 밑줄을 긋고, 그 글귀를 필사하거나 되뇌어보는 것도 소중한 저축이 된다. 단 10분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한적한 길을 걸으면서 오늘 하루를 반추해보는 습관도 유익하다. 그런 소소한 습관을 몸에 붙일 때, 자신의 내면이 외풍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전보다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한적한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이 글을 쓴다.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 와서 살게 된 지 8년째이다. 오랜 세월 도시의 번잡함과 빠른 속도에 길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젠 시골의 고요와 느린 속도에 재미가 붙고 있다. 하루가 무척 느리게 가고, 하늘의 별은 무척 영롱하다. 바다 위에 떨어지는 윤슬은 보석처럼 빛나고, 바람은 살결을 간지럽힌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에 침잠한다. 책과 더불어, 그림과 함께, 음악과 벗하며 고독을 즐긴다. 혼자 있으면 외롭지만, 나 자신과 같이 있으니 전혀 고독하지 않다. 나 자신과 도란도란 속삭이니 고독은 오히려 달콤한 대화이다. 과거를 반추하며, 현재를 진단하고, 내일을 꿈꾸면서 날마다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외로움은 외적 자아가 아닌 내적 자아가 조금씩 자라는 요람이다. 그러기에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고독은 피할 운명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는 축복의 선물이다. 이 고독의 복을 누리는 오늘 하루 저무는 노을 바다를 감사한 마음으로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