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이 3년 가까이 지속될 때, 아무에게도 내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내가 힘들다는 걸 말하고 싶었나 보다. 개한테 털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집 안에서 귀여운 푸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름은 ‘제니’였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제니에게 자주 이 한 마디를 했다. “제니야, 아빠가 힘들어” 그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내 심장 한 켠이 살짝 아렸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말할 때마다 제니의 귀가 쫑긋 움직였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때 누군가에게 내가 힘들다는 걸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의 응어리가 남지 않고 말끔히 씻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개한테 슬쩍 내비치는 정도 뿐이었다. 물론 개한테라도 하소연한 것이 전혀 말하지 않는 것보단 나았다는 생각도 든다. 개와 사람이 친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는 동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개가 사람의 언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자주 반복하는 단어의 의미는 알아차린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주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인간과 교감이 가능한 동물이기에 개는 반려동물(伴侶動物)의 대표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누구나에게 위로의 온기가 필요하다
개와 사람 사이의 교감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가 19세기 영국의 브리튼 리비에르(Briton Rivière, 1840–1920)이다. 그가 그린 개와 관련된 그림들은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개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나는 사람들을 모델로 쓸 때보다 동물을 모델로 쓸 때 더 솔직하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남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위장하거나 숨기기도 한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으로 사회적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동물은 마음을 포장하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리비에르는 동물에게서 더 진실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동물을 통해서 인간의 감정도 표현했다.
그의 그림 ‘신뢰’(Fidelity)는 슬픔과 고뇌에 잠긴 주인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채 쳐다보는 개를 그렸다. 주인은 혼자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 남자의 팔이 부러진 걸로 보인다. 일을 못해서 생계에 곤란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다친 팔이 너무 아파서 통증으로 힘들어하는지도 모른다. 개는 주인의 고통과 번민을 안다는 듯 연민에 어린 눈빛으로 주인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개의 눈빛과 표정이 마치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해요”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
남루한 옷과 창고처럼 보이는 실내 풍경을 볼 때 이 사람은 매우 가난한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위로할만한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같이 힘들고 외로운 날, 오직 개만이 그의 곁에 머물러 있다.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 말로 다독거려 주는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은 위로의 말 한 마디이다. 그리고 힘들고 지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어쩌면 매일 매일 외롭고 지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위로의 말만큼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양약도 없다.
나 자신은 자존감이 높은 축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에는 마음이 콩콩 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아내가 칭찬 한 마디 하면, 그 칭찬이 내 마음을 춤추게 한다. 그 칭찬 한 마디를 나 스스로 자주 곱씹으면서 빙그레 미소짓는다. 나 스스로가 내가 하는 일에 긍지도 갖고 있고 보람도 늘 느끼지만, 다른 사람이 칭찬할 때 더더욱 에너지가 샘솟는다. 칭찬 한 마디에 몸의 피로가 싹 풀리고, 마음에 의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면서, 말 한 마디의 위력을 체험한다. 내가 힘들다는 걸 알아주고, 내가 수고 많았다는 걸 이해해주고,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은 지친 하루를 감싸 안는 어머니의 품과 같다. 격려와 위로의 마음을 누군가가 말로 표현해줄 때, 그 위로는 남은 삶을 다시 달리게 만드는 에너지원이 된다.
이 그림 속의 남자에게 개마저도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얼마나 더 힘겨웠을까? 그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개의 진지한 표정 때문에라도 그는 잠시나마 웃으면서 고통을 잊을 수 있었으리라. 개만이 아니라 그의 곁에 그를 보듬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땅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일어서서 걸을 수 있듯이,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은 마음에 안전판을 놓아준다. 누군가가 나의 고통을 알고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가 있으면 아픈 상처는 따사로운 붕대로 싸매어진다. 밥은 우리의 육체에 힘을 공급하지만, 위로는 우리의 마음에 온기를 제공한다.
2. 공감이 담긴 위로는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누군가가 나를 위로하는 동기는 그가 나의 아픔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처지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지 않으면서 다가가서 어루만질 리는 없다. 마음 깊이에서 공감하는 것은 위로의 동기요, 위로의 핵심 요소이다.
브리튼 리비에르가 그린 또 하나의 명작 ‘공감’(Sympathy)은 개가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귀여운 소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현관 계단에 앉아 있다.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았는지 모르지만 기분이 다운되어 있다. 개가 소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어깨에 기대어 있다. 개와 사람의 정서적 유대감에 대해서 이보다 더 리얼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그림이 당대에 엄청나게 복제되어 팔린 이유를 이해할 듯 하다. 특히 화가의 딸 밀리센트(Millicent)를 모델로 그렸다고 하니, 더더욱 실감 나는 그림이 된 것 같다.
리비에르의 그림이 그 시대뿐 아니라 지금 이 그림을 보는 나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공감으로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리비에르는 평소에 “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개를 그릴 수 없다”(You can never paint a dog unless you are fond of it.)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단순히 모델을 보고 그대로 따라 그린다고 해서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를 사랑하는 애정을 담아서 그렸기에 화가의 감정이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화가의 감정이 그림 속 개의 공감 능력과 어우러져서 감상자들의 공감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공감이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요. 상대방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이다.
공감이 사람의 마음을 연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 영화 중 하나가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이었다. 영화배우 맷 데이먼이 연기한 윌 헌팅은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수학 천재이다. 하지만 고아로 자랐고 위탁가정에서 학대받은 트라우마로 인해 마음을 굳게 잠근 채 반항아로 살아간다. 그를 상담해주는 션 교수는 로빈 윌리암스가 연기했다. 처음에는 윌 헌팅이 형식적으로 상담에 참여하지만 점차 윌의 마음 문이 열리고 치유의 단계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 요인에는 절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애인의 정서적 지지도 작용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션 교수가 윌에게 ‘공감적 경청’(Empathic Listening)을 했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션 교수 역시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윌은 션 교수가 자신과 유사한 아픔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유대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싹 트기 시작했다. 션 교수의 눈빛과 태도는 윌에게 “너의 고통을 나도 안다, 나도 너의 아픔을 느낀다”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윌은 자신의 고독과 분노가 진심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감정에 켜켜이 쌓인 견고한 성벽들을 허물기 시작했다. 공감을 바탕으로 상대의 마음을 파고 들 때에 상대의 고통은 서서히 해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나 자신은 이런 영화를 볼 때도 그렇지만 평소에도 공감력을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내가 가끔 자신이 겪은 일을 하소연할 때가 있다. 아내는 남편의 공감과 위로를 기대하면서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건에 대해 해석하거나 판단을 내리려 할 때가 많다. 남성들이 뇌 구조상 여성보다 문제의 해결이나 문제의 체계화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도 한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MBTI 성향에서 INTJ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INTJ는 지적인 탐구, 몰입 경향이 강한 편이다. 주제에 집중해서 연구하고 분석하는 기질이 농후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측면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 같아 반성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도 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염려나 화 나는 일이나 상처 입은 사건에 대해 들을 때, 머리로 분석하려 하기보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를 먼저 고려해야지, 하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상대방의 아픔에 대해 내 가슴으로 공감하려고 할 때, 그 때부터 상대방의 감정은 봄 눈처럼 녹게 되고, 그 위로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발판이 될 것이다.
3. 위로를 통해 겨울을 견디고 다시 피어나다
볼 때마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 그림 중에 영국의 화가 월터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의 작품 ‘슬픔은 끝이 없고’(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가 있다.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한 젊은 여인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슬피 울고 있다. 그 옆에서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그녀를 다독거리고 있다. 그녀의 슬픔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화폭에서 스며 나오는 듯 하다. 고기 잡으러 간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때문에 우는지도 모른다. 위로해주는 나이 든 여인의 얼굴에도 슬픔의 그림자가 짙은 걸로 봐서 그 확률이 높은 듯 하다. 그녀를 위로하는 여인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괜찮다, 기운을 내야지”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랭글리는 영국 남서부에 있는 콘월(Cornwall) 지역의 어촌 마을에 살면서 어촌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린 화가이다. 그는 특히 그들의 삶에 드리운 애환들을 묘사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그의 그림을 보고 ‘아름답고 진실한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감명 깊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 그림에서 독특한 점은 길게 붙은 그림 제목이다. 이 그림 제목은 유명한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In Memoriam A. H. H.’ 제6편 중에서 따온 문장이다.
누구나 다 상실을 경험한다고들 말하지만
그 사실이 내 상처를 덜 쓰라리게 하진 못하네
오히려 내 마음은 더 아프구나
너무나도 흔한 일
누군가의 마음이 부서지지 않고는
아침이 저녁이 되는 날이 없구나
테니슨은 이 시에서 상실(loss) 혹은 슬픔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각 개인이 겪는 아픔은 그 자체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고통이라고 말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지구가 끝나는 그 날까지 고통이 없는 나날은 없을 것이라고 읊는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월터 랭글리는 그의 아내 클라라를 뇌졸중으로 잃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 그림은 어촌 마을의 비극적인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그 속에 화가 자신의 아픔을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그리고 그런 슬픔을 견디게 하는 힘도 결국 가족에게서 흘러나온다.
이 그림에서처럼 결국 마지막까지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다. 남들도 나를 위로할 수 있지만 가족만큼 가까이에서 깊은 애정을 담고 위로의 손길을 드리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가족의 위로가 가장 든든한 지지로 다가온다. 나도 오랜 고민을 거쳐 일터를 사직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두 아들이 마음으로 응원해준 것을 잊지 못한다. 둘째 아들의 경우, 그 시기가 대학 4학년 때였기에 아버지의 실직이 끼칠 경제적인 영향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마음 편하게 하시라고 지지해주었다. 아내도 물론 남편이 어디로 가든 자신도 함께 할 것이라고 어깨에 손을 얹어 주었다. 버스도 한 시간에 한 대 밖에 안 다니고, 동네에 가게도 없는 시골에 와서 같이 있어 주는 아내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든든한 위로이다.
가족들의 심리적 지지,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나 동료의 위로 한 마디를 통해서 사람은 ‘외상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을 맛볼 수 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비록 고통은 쓰라리지만 그 고통이 자아를 성장시키는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이 고통을 딛고 정서적 치유와 인격적 성장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지가 절실히 필요하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베푸는 정서적 공감과 위로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든든한 안정감을 심어준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스트레스 반응을 완화시킨다. “네가 겪은 일은 정말 힘든 일이야, 나라도 그랬을거야”라는 말들을 들으면서, 자신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반응이 비정상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점차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객관적으로 응시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감정도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서서히 자신의 비극을 용납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위로의 이슬이 쌓이면 한 사람의 인생에 다시 꽃이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누구에게나 인생에 겨울은 온다. 춥고 시린 날 외로이 방구석에 웅크리는 날이 온다. 그 순간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얼어붙은 마음을 사르르 녹여준다. 눈길을 밟으며, 눈송이를 먹으며, 동심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추워도 눈이 오면 마음에 따스한 김이 서린다. 따스하게 녹은 그 마음은 어느새 새로운 꿈을 꾼다. 따스한 눈송이같이 아름다운 소망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위로에는 큰 자원이나 많은 시간이 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 길지도 않은 말 한 마디, 애틋한 눈빛 하나로 충분하다. 하지만 소박한 눈송이가 쌓여 겨울이 훈훈해지듯, 작은 위로가 가슴에 스며들어 긴긴 밤을 이기게 만든다. 위로의 말 한 마디가 씨앗으로 떨어져 포근한 겨울을 열어준다.
나도 지금까지 누군가의 위로 덕분에 살아왔듯, 나도 남은 인생길에서 누군가의 위로자로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의 추운 마음밭에 내리는 눈발이 되고 싶다. 혼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의 겨울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함께 이 겨울을 견디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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