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나를 향해, 인생이여 만세!

-그림에세이.8.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함께 ‘고통’을 곱씹다

by 강물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 한가운데 오래된 멍울이 잡히는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 생각에 울 때가 많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오버랩되는 단어가 ‘고통’이다. 고통과 어머니의 인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이었다. 결혼한 지 6년 만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생계 대책이 없는 무일푼으로 어린 자녀들과 함께 길가에 나앉았다. 그 때부터 20대 여인의 몸으로 생존을 위해서 청춘을 던져야 했다.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가내수공업이 망하는 바람에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내가 중학교 시절 집 안의 모든 가구에 딱지가 붙은 적도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집을 잃고 친척 집에 6개월 더부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중병으로 수술도 몇 번 하셨다. 어머니의 고단한 일생을 회고하다 보면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에 가슴을 칠 때가 많다.


1. 고통받는 나를 안아주기로 하다


이 세상에 고통의 삶을 살다 간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림 감상에 입문하고서 내 어머니보다 더 기구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 화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화가가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이다.


그녀는 평생 지독한 아픔과 동반자로 살아야 했다. 그녀는 18살 의대생 때에 큰 사고를 겪는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버스와 전차가 충돌했는데, 버스 안의 쇠파이프가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해서 척추와 골반을 부순 것이다. 그녀는 그로부터 평생 서른 다섯 차례 수술을 받았다. 손상된 골반으로 인해 세 번이나 유산을 했다. 죽기 1년 전에는 오른쪽 다리마저 절단했고, 37살 때부턴 몸에 강철 코르셋을 착용하고 지내야 했다. 강철 코르셋을 착용한 그녀의 자화상이 유명한 그림 ‘부러진 기둥’(The Broken Column)이다.



프리다 칼로는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다. 그녀의 척추는 콜로세움의 대리석 기둥 같은데, 곳곳이 부서져 있다. 몸은 강철 코르셋으로 둘러 싸여 있다. 그리고 몸 곳곳에 못이 박혀 있다. 여인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그림을 보며 이 여인이 얼마나 아플까? 탄식이 터져 나온다. 몸에 못이 박힌 것처럼 그녀는 평생 전신을 칼로 찌르는듯한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생 동안 쿡쿡 찌르는 통증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이 안 될 정도로 그녀의 삶은 지독한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이런 그녀의 고통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프리다 칼로는 약 143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55점이 자화상이다. 그녀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은 “나는 나 자신을 그린다. ‘나’라는 주제가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 그대로이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그대로 다 화폭에 표현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의 불행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자신에게 닥쳐온 고통을 그림으로 드러내면서 고통을 회피하기보단 응시하는 법을 배워갔다. 고통을 객관화시켜 예술의 원동력으로 만들면서 고통과 공존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고통을 긍정적으로 여기며 끌어 안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 박사는 고통가운데서 불안, 우울, 자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비’(Self-Compassion)를 보일 것을 호소한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아픔을 겪으면 사람들은 대개 현실을 부정한다. 하필 내가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된 데 대해 분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도 하고,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불행을 안고 산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지금 가장 힘겨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데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돌을 던지기 일쑤이다. 가뜩이나 아파서 괴로운데, 자기 자신마저 자기를 비난하면, 얼마나 더 괴로울까?


하지만 태도를 바꿔서 지쳐 쓰러진 자신에게 친절한 말을 하는 것이 ‘자기 자비’이다. “너 얼마나 고생이 많니? 정말 힘들겠다”고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판단이나 비난을 유보하고 현재 자신을 짓누르는 아픔에 그저 공감하고 동정을 베푸는 태도이다. 아파하는 상태나, 분노하는 마음이나, 원망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알고보면 프리다 칼로는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자기 자비를 실천한 셈이다.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아파하는 자신을 부드러운 붓으로 쓰다듬어 준 것이다. “이렇게 온 몸에 못이 박혔으니, 네가 얼마나 아프니?” 하면서 자신에게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이렇게 고통받는 자신에게 다정한 눈빛을 주면서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을 밟은 것이다.


이하이의 ‘한숨’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읊는다.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고통 속에서 한숨 쉬며 생의 의욕조차 상실한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면서 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게 상처입은 자신을 안아줄 때, 상처는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요동치는 감정도 서서히 가라앉고, 다시 생각을 차분히 정돈해볼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될 것이다.


2. 고통에게 의미를 물어보기로 하다


고통은 한 가지만으로도 벅차다. 만약 한꺼번에 몰려 온다면 그 태풍을 견딜 장사가 어디 있으랴?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인생에는 설상가상으로 온몸을 찌르는 불화살이 쏟아졌다. 프리다 칼로는 쓰디쓴 표정으로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사고를 겪었다. 하나는 버스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였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그녀가 언급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프리다 칼로가 22살 때 디에고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져버렸다. 디에고는 이미 그 당시 멕시코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21살 연상에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했었고, 희대의 바람둥이로 소문난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마음을 바쳐 버린 프리다 칼로는 그와 결혼하여 총 24년을 부부로 지낸다. 디에고는 결혼하고 나서도 바람기를 버리지 못해서 칼로의 가슴에 못을 여러 번 박았다. 계속되는 남편의 불륜을 참고 견뎌냈으나 남편은 가장 강력한 상처의 폭탄을 칼로의 마음에 던졌다. 남편 디에고가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도 바람을 피운 것이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배신으로 칼로의 가슴엔 피멍이 맺혔다. 결국 둘은 이혼했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그녀는 디에고를 잊지 못했다. 자신의 영혼을 짓밟은 남자를 미워하면서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프리다 칼로의 마음은 갈기 갈기 찢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프리다 칼로가 남편 디에고와 이혼한 직후 발표한 작품이 ‘두 명의 프리다’(The Two Fridas)이다. 오른쪽 프리다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고 있고, 왼쪽 프리다는 서양 옷을 입고 있다. 오른쪽 프리다의 손에 작은 메달이 있는데, 그 안에 남편 디에고의 얼굴이 있다. 그 메달은 혈관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어 있고, 왼쪽 프리다에게도 연결된다. 그런데 왼편 프리다는 가위로 그 혈관을 자른다. 가위로 잘린 혈관에서 흐르는 피가 드레스를 빨갛게 적신다.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래도 다시 잊지 못하는 그 남자와의 관계를 이제는 정말 끊어내야지, 하는 결단이 그림에 서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지 얼마 안 되어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와 재결합을 선언하고야 만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프리다 칼로의 삶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 정도의 하중은 견디기 어렵다. 생을 포기하거나,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리거나, 폐인처럼 시간을 연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이 엄청난 고통에 짓눌려 쓰러지지 않고, 20세기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를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린 것이 바로 그녀를 괴롭힌 고통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그림은 사람들의 감정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그녀의 예술의 주된 소재가 되었고, 그녀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흔적이었다. 고통은 프리다 칼로라는 화가의 삶을 채운 의미가 되었다.

프리다와 같은 맥락에서, 극한의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의미요법(意味療法, Logotherapy)’을 설계한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다. 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고, 그의 부모, 형, 그리고 임신한 아내까지 모두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 안에서 두려움, 절망감, 우울, 분노 등에 시달리다가 죽었지만 같은 환경 속에서도 버텨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차이는 바로 ‘삶의 의미’였다. 왜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역경도 이겨낸다는 사실이었다.

프리다 칼로에게는 예술이 삶의 의미였고, 존재의 이유였다.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나는 살아있음이 행복하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표출하면서, 그녀는 고통과 부둥켜 안고 씨름할 수 있었다. 시련과 직면하여 부대끼는 가운데, 그녀는 고통이 자신을 힘들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에 영감을 부여하는 원천임을 깨달았다. 고통을 통과하면서 그녀의 그림에 창조성이 더해졌고, 아픔이 그녀의 예술혼을 더 치열하게 만들었다. “고통과 죽음 없이는 인간의 삶이 완전해질 수 없다”(Without suffering and death human life cannot be complete)는 빅터 프랭클의 말 그대로이다.


고통이 인간의 삶을 완성하는 데에 기여하는 이유는, 고통이 올 때 질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고통이 왜 나에게 왔을까? 이 고통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 고통을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새로운 선택의 길을 찾게 된다. 외적인 고난 자체를 바꿀 힘은 없지만, 그 고통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꿀 수는 있는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이전에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선택과 도전을 감행할 계기가 주어진다. 그래서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 빚어진 새로운 삶의 목적과 의미가 남은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이준관 시인은 육필 시집 [저녁별]에서 ‘넘어져 본 사람은’이라는 시를 노래했다.

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넘어져서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

땅에 박힌 돌부리

가슴에 박힌 돌부리를 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 박힌 돌부리가 나를 일어서게 한다고


인생을 걷다 보면 돌부리들을 만난다. 그 돌부리들이 나를 넘어지게 해서 상처를 안긴다. 상처는 아프지만 지나고 보니 그 돌부리가 나를 일어서게 한다. 넘어져 보니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가 보인다. 아픈 상처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물어보게 된다. 내가 고대하던 문이 닫힌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보니 저쪽에 새로운 문이 열려 있다. 그렇게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새로 열린 문으로 들어간다면, 고통은 인생의 적이 아니라 인생의 자산이 될 수 있다.

3. 고통을 보고도 웃어주기로 하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프리다 칼로만큼 고통을 달고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한 프리다 칼로만큼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숱한 아픔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 남보다 더 강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보인 것이다. ‘회복탄력성’이란 크고 작은 역경과 시련과 실패를 경험했어도 이전의 적응수준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뜻한다.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다. 뜀틀 운동을 할 때, 그 자리에서 그냥 뛴다면 뜀틀을 넘기 어렵지만, 멀리서 달려서 도움닫기를 하면 훨씬 더 높이 넘을 수 있다. 창 던지기를 할 때도 서서 팔만 휘두를 땐 멀리 못 던지지만, 달리면서 던지면 훨씬 더 멀리 던질 수 있다. 인생이라는 길목에서 맞닥뜨리는 숱은 위기들 앞에서, 그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때 위기(危機)는 기회(機會)로 변한다. 역경을 도약대로 삼아서 더 큰 꿈을 향해 오를 기운을 얻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고통이라는 두꺼운 껍질과 사투하다가 그 껍질을 깨트리고 나옴으로 더 높은 예술의 고지로 올라 선 것이다.


껍질 안에서 안주하거나 버티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를 둘러싼 고통의 껍질을 박차고 나오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진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지만, 그 과정을 넘어서면 경이로운 기쁨을 만난다.


시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도 그의 책 [예언자, The Prophet] 안에서 ‘고통에 대하여, On Pain’를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의 이해력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이 깨지는 것이다


과일의 씨앗이 깨져야

그 속심이 햇빛 아래 설 수 있듯이

당신도 고통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일상의 기적들에 대해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간직할 수 있다면

당신의 고통도 당신의 기쁨만큼이나 경이로울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고통으로 가득찬 47년의 인생을 끝내기 8일 전에 마지막 그림을 남겼다. 그림의 제목은 ‘인생이여 만세-수박들’(Viva la Vida, Watermelons)이다. 화폭 가득 수박들이 가득하고, 한 가운데 멕시코 말로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왜 생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수박들을 그리고, ‘인생이여 만세’를 외쳤을까? 수박은 빨간 속살과 초록 껍질, 그리고 흰 부분으로 구성되어 맥시코 국기의 색상(녹-백-적)과 일치해서 멕시코인들이 애착을 가지는 과일이다. 그래서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들이 수박을 자주 그렸다. 수박이 출산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민간 속설도 많이 발견된다.


무엇보다도 매년 11월 1-2일에 열리는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 축제와 연관된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이 축제에서 제단 위에 고인이 평소 좋아하던 음식들을 놓는데, 그중에서 멕시코인들이 즐겨 먹는 수박도 진열되는 경우가 많다. 수박의 초록 껍질은 자연을 상징하고, 붉은 속살은 생명력을 의미하고, 검은 씨앗은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수박은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맞닿아 있다”는 죽은 자의 날 축제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멕시코인들은 죽은 자의 날 축제를 통해서 죽음은 단순히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죽은 자의 날 축제를 통해서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있음의 가치를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다.


프리다 칼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 그림으로 수박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수박의 껍질은 프리다 자신이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라는 ‘외피’를 상징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껍질을 깨고 나면 달콤하고 풍부한 속살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프리다 칼로 역시 고통 가운데서도 강렬한 예술에의 의지를 품고 살아왔다는 의미가 아닐까? 수박을 잘랐을 때 드러나는 붉은 과육처럼, 프리다는 고통의 껍질속에 담겼던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프리다 칼로의 인생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그림으로 ‘인생이여 만세’를 선택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틀릴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남들이 생각하는 인생과 내가 선택하는 인생은 다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여길지라도, 내 인생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은 행복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고통이 있고 없고에 달린 것이 아니다. 불행은 고통이 얼마나 있으며, 얼마나 오래 가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진정한 행복은 고통 가운데서도 견딜 수 있는 용기에 달려 있다. 참된 행복은 고통을 통해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느냐에 있다. 영원한 행복은 고통 속에서도 내가 어떤 태도를 갖고 인생을 사는가? 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죽음을 매일 짊어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오늘 살아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이 고통이 끝나는 그 날까지, 매일 ‘인생이여 만세’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코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당신도 스스로에게 속삭여 보라. 인생이여 만세!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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