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수 없는 슬픔이 차오를 때

-그림에세이.7.고흐의 그림과 함께 '슬픔'을 곱씹다

by 강물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속엔 물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툭 건드리면 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다가, 노래를 듣다가 눈물이 자주 나온다. 혼자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로 노래 듣다가 베개를 적실 때도 많다. 드라마나 노래 들을 때가 아니라도, 혼자 속으로 울 때가 많다. 딱히 울어야 하는 일에만 우는 것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눈물 날 일이 많은 것 아닌가.


어릴 때 제일 처음 만난 시, 그리고 가장 처음 암송했던 시가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마음을 가라앉혀라

기쁜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플지라도

모든 것은 순간이며, 지나가리라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나니


인생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나를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모든 것이 곧 지나갈 것이라고,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다들 위로의 말을 하지만, 현재 겪고 있는 사람은 슬프고 힘든 법이다.


정호승 시인은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푸시킨과 마찬가지로 정호승 시인도 시 첫 마디에 “울지 마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울 수밖에 없다, 울어라!”는 의미로 들린다. 왜 울어야 하나? 산다는 건 외로운 일이고,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슬픈 사건이 없어도 내면 세계 속에 있는 외로움과 아픔이 우리를 눈물 나게 하기도 한다. 완전무결의 대명사인 신(神)조차도 외로워서 운다고 하니, 헛점 투성이인 사람이 날마다 눈물 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슬픔은 인간 누구나의 화장기없는 민낯이다.


1. 눈물이 나니까 사람이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묘사한 그림 가운데 고흐‘슬픔에 잠긴 노인’(Sorrowing Old Man)이 있다.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2024년 겨울에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불멸의 화가 고흐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봤다. 한참 그림을 보노라니 그림 속 노인의 슬픔이 가슴에 느껴졌다.




이 그림은 고흐가 프랑스의 생 레미(Saint-Rémy)에 있는 생 폴 드 모솔(Saint-Paul-de-Mausole)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1890년 5월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그린 이 그림은 사실 8년 전 고흐가 헤이그(Hague)에 거주할 때 드로잉으로 그렸던 작품을 유화로 다시 그린 것이다. 그 드로잉의 이름은 ‘Worn Out’이다. 직역하면 “닳아서 못 쓰게 된, 낡은, 지친”이라는 뜻이기에 ‘지친 사람’ 정도로 번역이 가능하다. ‘탈진한 사람’이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이 노인은 헤이그의 시립 빈민 구제소에서 작은 금액의 노령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전직 군인이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이 드로잉을 8년이나 지나서 유화로 다시 그리려고 마음 먹은 동기는 무엇일까?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이 그림이 그가 죽기 약 2개월 전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고흐의 심경을 추정해볼 순 있다. 이 노인은 희끗희끗한 일부 머리카락만 남아 있다. 푸르고 낡은 옷과 더불어 늙어서 기운도 없고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푸른 색은 주로 우울과 고독을 상징하는 색이다. 낡은 의자와 구두, 그리고 전체적인 톤도 어둡고 차가운 느낌이다. 벽난로에 타는 불도 희미하게 그려져서 생기가 없어 보인다. 노인은 주먹을 쥔 채 머리를 손에 묻고 있다. 펑펑 소리 내어 울지는 않지만 슬픔의 깊이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슬픈 소식 하나 때문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고뇌를 끌어 안고 숨 죽여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노인의 슬픔은 고흐 자신의 슬픔이요, 더 나아가서 보편적인 인간들 모두의 슬픔이 아닐까 싶다.

고흐는 지금 37세의 젊은 나이지만 낡았고 지쳐 있다. 정신병으로 입원한 가운데라 그의 마음은 낙심과 좌절감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 상태나 정신적 상태,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해볼 때 미래를 기약하기란 어렵다. 동생 테오(Theo)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출산한 터에 계속 동생에게 생활비 지원이라는 과도한 부담을 지우기도 미안하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강렬하게 불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 화가일 뿐이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1년여 동안 150여 점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혼신의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지만 문득 문득 그의 가슴은 불안과 슬픔으로 조여든다.


늙은 노인이 죽음의 날을 앞두고 느낄 법한 두려움과 절망감을 고흐도 가슴에 안고 있던 것이 아닐까? 지난 날을 돌아보며 느끼는 후회와 자책, 현재의 답답한 상황, 앞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고흐는 몸을 흔들며 엉엉 울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흐의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린 어두운 그림자가 아닐까? 일상의 고통이 아니라도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절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존재론적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2. 눈물로 살아나니까 사람이다


울고 있는 노인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존재론적인 슬픔으로 눈물이 나건, 눈물 날 만한 일 때문에 눈물이 나건, 눈물이 나면 흘려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자가 울면 안 돼.”라는 말이 가장 어리석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부모들이 보편적으로 그 말을 자주 하는 것 같다. 그 말은 결국 “남자는 울면 안 되고, 여자는 울어도 된다.”는 말이 되니까 비논리적인 말이다. 남자든 여자든 눈물은 참지 말고 쏟아내는 것이 옳다. 서양 속담 중에 “비누가 몸을 씻어주듯, 눈물은 영혼을 씻어준다.”(What soap is for the body, tears are for the soul)는 말이 있다.


박노해 시인의 ‘사랑한다는 것은’ 에도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마음껏 울고 난 뒤의 얼굴이 아름답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핀다


왜 시인은 눈물이 지나고 나면 꽃이 핀다고 말할까? 어떻게 해서 눈물은 얼굴을 아름답게 화장하는 효과가 있는 걸까? 미국의 신경과학자 윌리엄 프라이(William H. Frey II)는 1980년대 초, 감정적 눈물(emotional tears)을 흘리면 코르티솔(Cortisol)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몸 밖으로 배출된다고 발표했다. 눈물이 사실상 해독 효과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또한 눈물을 흘릴 때 마음을 진정시키는 화학물질인 옥시토신(Oxytocin), 진통 효과와 행복감을 주는 엔도르핀(Endorphin) 등 보호 물질이 분비되어 정서적 이완과 안정을 돕는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는 눈물을 “몸과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당장은 마음 아프고 괴로워서 울지만 한참 울고 나면 서서히 정서적 치유와 회복(Catharsis)이 일어난다. ‘카타르시스’란 마음속의 부정적인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서 정신적으로 안정과 정화(淨化)를 얻는 과정이다.

눈물은 마음 아픈 사람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약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슬플 때는 마음껏 울어야 한다. 아무도 없으면 대성통곡이라도 해야 한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휴지를 한 통 다 쓸수록 좋다. 배설을 다 해야 장이 청소되어 몸이 깨끗해지듯, 마음의 응어리는 눈물로 풀어야 마음이 청소되어 건강해지는 법이다. 특히 경직된 교육체계와 획일화된 사고방식, 억압적인 조직 분위기 등에 의해서 억눌린 감정을 발산하지 못한 채 꽁꽁 묻어두길 잘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더욱 남 눈치 안 보고 울 일 있으면 울어야 한다. 울어야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눈물 흘려야 내가 소생할 수 있다.


그래서 박노해 시인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차오를 때

그대는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눈물이 끝내 그대를 살릴 것이다

슬픔을 통해 회복에 이른다는 소망은 동서고금의 지혜에서 자주 발견된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성경 누가복음 6장 21절).


3. 우는 사람을 보고 눈물이 나니까 사람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우는 처지면서 남의 눈물을 보면 마음이 동한다. 우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짠하다. 그럴 때는 내 눈물을 잠시 잊고 우는 사람에게 감정이 이입된다. 드라마에서 우는 사람을 보면 거의 틀림없이 눈물이 나는 나 자신을 봐서 잘 안다. 누군가 울면 나도 따라서 울게 된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냥 울고 있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가슴 한 켠이 시려 오는데, 실제로 슬픈 사연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면,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고흐의 ‘슬픔에 잠긴 노인’보다 먼저 내 가슴을 울컥하게 한 고흐의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은 ‘슬픔’(Sorrow)이다.


이 그림은 보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임신한 것으로 보이는 마른 여인이 벌거벗은 채 울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축 처진 가슴, 그리고 황량한 정경들이 그녀의 처지가 고단함을 암시한다. 고흐가 제목 자체를 ‘슬픔’이라고 명시했지만, 제목이 안 보이더라도 누구나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고흐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만족감을 느낀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슬픔’은 그 작은 시작이야”(1882년 7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 그림이 고흐의 표현대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그림’이 되는 이유는 이 그림 속에 고흐의 진정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흐가 1881년 헤이그로 이주하고나서 1월경 만난 여자가 그림 속의 여자 시엔(Sien)이다. 그녀는 고흐보다 세 살 많은 32살의 창녀로서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고, 임신 중이었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고흐는 자기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했다. 알코올 중독에다 매독에 걸려 있고, 고흐가 끌릴 정도의 외모도 아니었지만, 고흐는 그녀를 돌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결혼까지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고흐와 시엔의 동거는 1년 8개월 만에 끝났다. 아들을 출산한 후 궁핍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 시엔이 고흐와 다투면서도 다시 매춘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물론 평소에 고흐의 편에 서 있던 동생 테오까지도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테오가 생활비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네 명이 같이 생활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흐는 그녀와 아이들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힘들어했고, 고흐와 헤어진 시엔은 그로부터 21년 후 어느 날 자살로 고단한 생을 끝냈다.


이례적으로 고흐는 그림 밑에다 인용문을 적었다. 그 인용문은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가 1860년에 출간한 [여인 La Femme]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어떻게 이 땅에 여자 혼자 있을 수 있지?”. 고흐의 심경을 그대로 표현한 글이다. 버림받아 오갈 데 없고, 아이까지 있는 가난한 여자를 보고도 홀로 버려두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 고흐의 생각이었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고흐의 성품이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와 결혼하는 것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결혼은 그녀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 가난해지고, 과거의 구렁텅이로 내몰려야 하기 때문이야”.

고흐는 시엔을 이성으로 사랑하기도 했겠지만 또 한편 외롭고 가난한 그녀를 진심으로 돕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슬프고 외로운 고흐 자신의 초상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서 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 주는 힘이 아니겠니?…내가 깊은 좌절을 딛고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쓸모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햇빛 환한 창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자 나는 행복했다”.


고흐는 그녀와 함께 지내는 짧은 기간 동안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불행한 사람끼리 두 손 붙잡고 서로를 다독이는 위로를 느꼈을 것이다. 슬픈 사람이 또 다른 슬픈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자기 눈물이 멈추는 마법을 체험한 것이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그의 처지를 아파할 때에 내 고통이 진정되고 내 눈물이 마르는 신비를 누렸던 것이다.


1890년 7월 29일 고흐가 사망했는데, 숨을 거두기 전에 동생 테오에게 “슬픔은 영원하리라”(The sadness will last forever)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고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에서 슬픔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말은 나 자신만 슬픈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누구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안 슬픈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산다는 것이 나도 슬프고 너도 슬픈 것이라면, 내 슬픔에만 몰두할 일이 아니다. 타인의 슬픔에도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내 눈물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갖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슬픔이 잊혀 지고 서서히 치유되는 것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려고 애쓰다 보면 어느샌가 내 눈에서 흐르던 눈물도 사그라드는 기적을 체험한다. 우는 사람을 보면 같이 울고, 눈물 나는 이웃을 보며 같이 아파할 때 내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부수효과를 얻는다. 나 자신의 아픔 때문에도 당연히 울어야 하지만 남의 눈물 때문에도 울 수 있다면 결국 나도 그 사람도 같이 살아날 길이 생기는 것이다.

슬픔은 살아 숨 쉬는 동안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슬픔은 인생의 동반자이다. 하지만 슬픔을 나눠 가지려는 마음이 있는 한, 슬픔은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실컷 울고 나서 눈을 들어 보자. 혹시 주위에 또 울고 있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지. 그리고 이번에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한번 더 울어보자. 그러다 보면 지금 흘리는 눈물이 언젠가 웃음꽃으로 피어날 날이 올 것이다. 그 사람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 날이 오늘이든, 아주 먼 훗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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