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느긋해져도

닭갈비

by grape

오전에 마쳐야 할 일을 하던 중, 어느새 새로 갈 만한 카페가 있는지 찾고 있었다. 날씨는 무척 뜨거웠지만 그만큼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집에서는 그저 늘어져 있을 것만 같아서. 나를 내던지고 싶었던 기분이 도졌다.


그렇게 새 카페를 찾아가 책을 읽고, 생각난 드라마를 보며 나를 달래주다가. 저녁 메뉴로도 맛있는 걸 먹고 싶어졌다. 뭔가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하고도 싶어 카톡 메모를 뒤졌다. 언젠가 만들겠다고 남긴 레시피 링크들이 있었다.



닭고기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운 날씨에 몸보신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찜닭도 후보였지만, 최근 배달시켜 먹었던 것이 꽤 괜찮았어서 굳이 직접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 내가 목표한 것보다 손이 더 가는 메뉴여서 힘이 더 빠질 것만 같았다. 빨갛고 매콤한 맛이 당겼던 오늘. 그리고 닭고기. 그렇게 슬쩍, 메뉴를 닭갈비로 정했다. 다행히 과거의 나도 닭갈비 레시피를 메모해 뒀었다. 내 기억력을 칭찬하면서 카페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닭고기를 포함해 부족한 재료가 몇 가지 있어, 집으로 가는 길에 장을 봐야 했다. 그런데 웬걸. 가까운 마트에 닭다리살 정육이 없었다. 뼈가 붙은 채로 손질된 것뿐. 좀 더 걸어가면 정육점이 있긴 한데, 오늘 날씨가... 그냥 뼈를 손질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내 솜씨로는 살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트에서 오락가락 망설이다가 결국, 정육점으로 비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또 웬걸. 정육점까지 겨우 왔는데 닭고기가 없단다. 그렇게 뜨거움을 견디며 약 10분 정도를 더 걸어 다른 마트까지 도착했다. 닭다리살이 이렇게 귀했구나. 집에 갈 때도, 오늘 나설 때처럼 결국 버스를 타고 말았다.




장보기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집에 가자마자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더운 날씨 탓에 늘어질 수도 있었으니.


먼저 (애증의..) 닭다리살을 손질했다. 흐르는 물에 씻어주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다음, 잡내를 없애고 육질도 부드럽게 해 주기 위해 우유에 재웠다.



이어서 채소들을 손질했다. 깻잎, 당근, 양파, 양배추, 대파, 버섯까지. 채 썰고, 어슷 썰고, 돌돌 말아 썰고, 네모나게 썰고. 온갖 모양으로 칼질한 채소들을 알록달록 모으면서 묘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떡 사리도 물에 불렸다. 식당에서는 채소가 고기보다 많으면 불만이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채소가 더 많은 스타일을 바랐다. 라면 사리를 넣거나 볶음밥까지 만들 계획이었으나, 분량 이슈로 접었다.


다음으로 양념장을 만들었다. 설탕, 고춧가루, 통깨, 카레가루, 다진 마늘, 고추장, 맛술, 간장, 물엿, 소금을 레시피대로 넣고 잘 섞었다. 아까는 손질해서 색깔별로 놓은 채소들에 뿌듯하더니, 양념장을 만들 때는 따로 모인 재료들을 섞는 순간 또 뿌듯했다. 따로 놓거나 섞는 어떤 법칙에 의한 게 아니라, 그냥 요리하는 것 자체에 뿌듯했던 걸까. 양념장 자체의 맛이 좀 더 매콤해 단맛을 추가하려다, 채소들과 어우러지면 간이 맞을 것 같아 그냥 두었다. (미리 말하자면, 매우 잘한 결정이었다.)


밑준비를 생각보다 빨리 마쳤다. 가족들이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그래서 닭고기와 양념장을 잠시 냉장고에 넣어두고 기다렸다. 미리 볶아둘까도 생각했지만. 갓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었다.


이때 느꼈다. 역시 나는 계획적이고, 그걸 최대한 빨리 해내고 싶어 하는구나. 물론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지만, 그 안에서 조급하고 분주해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서두르는 것에 비해 생각보다 시간이 여유롭게 남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요즘은 특히 더 많이. 좀 더 느긋해질 필요가 있었다.




잠시 시간을 갖고, 식사시간 20분 전에 다시 재료들을 꺼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닭다리살과 양념장의 3분의 2를 먼저 넣고 볶았다. 이때 불이 너무 세면 기름이 많이 튀고 양념도 타기 때문에 중불로 맞춰줘야 한다. 고기의 표면이 익을 즈음(양념장의 빨간 색깔로 인해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당근, 양파, 양배추를 넣고 계속 볶았다. 버섯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넣었다.


이제 레시피에서는 나머지 양념 3분의 1과 물을 조금 넣어 고기의 속까지 익혀주라고 했지만, 이미 채소에서 나온 수분으로 국물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서 양념만 더 넣어줬다. 좀처럼 국물이 졸지 않아 잠시 머뭇했으나 잘 참았다. 떡과 대파를 넣으니 그 재료들이 익으면서 국물의 양이 어느 정도 맞춰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재료들이 알맞게 익을 정도로 충분히 볶아준 다음, 마지막으로 깻잎을 올리고 불을 껐다.


닭갈비를 볶는 시간이 생각보다 걸렸다. 국물을 졸일 때 채소들까지 오래 익어 무르지 않도록 센 불로 했던 것만 빼면, 중불로 계속 볶아가며 천천히 익혔다. '기다림'에 대해 또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기다림은 곧 정성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소중함을 느끼고, 또 표현할 수 있는 시간.


단순히 먹고 싶어서 만들기만 한 음식이었는데 기다림의 의미까지 돌아보게 되다니. 요리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이런 뜻이 있는 시간이었다는 걸. 지금 이 글을 쓰며 깨달았다. 행동과 기록으로 얻는 소중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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