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안녕> 유월
독특한 경로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라 얼떨떨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관심을 가졌던 책이어서 내심 기분은 좋았다. 비교적 신간인 데다, 유명 엔터사에서 기획한 소설이었다. 드라마로도 제작이 확정됐다고 하니,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어느 월요일 오전, 문화센터 수업을 마치고 나올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 평소 같으면 집에서 할 일을 했겠지만, 기분 전환을 위해 이 책과 노트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문화센터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로 향했다.
언젠가 주말에 봤을 때 그 카페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했었는데, 평일 오전에 가니 꽤 한산했다. 통창을 앞에 둔 자리에 앉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책을 읽기 편해야 한다는 생각에 좀 더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통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마침내, 안녕>의 주인공은 가사조사관 도연이다. 그의 일은 이혼 소송을 위해 법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사와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마주하는데, 도연 자신도 인간인지라 그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곤 한다. 자신이 겪었던 큰 아픔과도 마주하면서.
도연은 깊은 관계를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보여준다.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와주는 동료, 도움을 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방어에 급급한 상사, 너무 다르지만 어울리고픈 성향을 지닌 내담자의 가족 등. 나 또한 도연의 시선에서 그들을 바라보거나, 또 주변 인물들의 시선에서 도연을 바라보며 크고 작은 공감과 위로를 얻었다. 한편 나를 찔리게 만드는 에피소드도 있어 살짝 괴롭기도 했다.
읽을 때마다 고민이 되는 책들이 있다. 재밌어서 술술 읽히는데, 빨리 읽기에는 금방 끝날까 봐 아쉬운 그런 책들. <마침내, 안녕>도 그랬다. 공감과 위로가 있어 얼른 읽고 싶지만, 깨우침도 있어 읽기 조심스러워지는.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으려고 했다. 그만큼 이 소설에 몰입하는 나의 지금 상태를 스스로 다독이고, 응원해주고 싶었다.
이번에는 남겨두고 싶은 문장을 손으로 직접 필사했다. 그렇게라도 마음에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손으로 직접 쓰면 마음에도 남고, 마음에 남기면 내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거라는 작은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달라진 내가, 지금의 상황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다 용기 있게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냥 발생하는 일들 말입니다.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 견디는 것보다 도움을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오랜만에 전화한 걸 보니 오늘 좀 힘든 날이었나 봐요?" ...
"백 선생은 잘 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그걸 의심하지 말아요. 그 생각이 흔들릴 때면 전화해요. 내가 매번 얘기해줄게요." ...
"그런데 백 선생, 잘 안 해도 돼요."
_'#2. 아이는 늘 어른들을 용서한다' 25, 27쪽
도연은 유림에게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법원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지, 법원이 어떻게 굴러가는 곳인지 알았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걸 조금 망설였을까. 하지만 미리 알았다고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그저 자신의 선택을 감당하며 사는 수밖에. 무엇보다 누군가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휘청일 수 있는지, 그 가벼움을 때로는 얼마나 무겁게 느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도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_'#3. 요란한 법원 생활' 33쪽
"나는 진짜 대충 살 거거든요. 절대로 열심히 살지 않을 거거든요. 이상한 사람들 말 듣지 않을 거거든요. 그런데 열심히 살지 않으려면 매일 이렇게 다짐해야 해요. 자꾸자꾸 나에게 말해줘야 해요. 잊어버리지 않게. 그래서 열심히 살지 않는 게 너무 힘들다."
_'#4. 건강한 감자' 54쪽
농담처럼 주고받던 질문이 점점 무거워져 도연은 그만 내려놓았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시재에게 아직도 터널을 건너는 중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아직도 지나는 중. 그래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전보다 나아요."
시재가 가볍게 웃었다.
"아직 꽃이 피기 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언니가 그랬잖아요. 언젠가 때가 되면 다 핀다고."
...솔직함이 모든 걸 다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솔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 마음속에 느닷없이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들이닥칠 때도 최선을 다해 모른 척했다.
..."그런 마음도 이제 좀 밖에 내놓으려고요. 햇볕이든, 바람이든 잘 말려주면 좋겠다."
_'#14. 바람이 지나가는 거리' 157~158쪽
"비난이든 조언이든, 그건 하는 사람의 것이지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받을지 말지는 김 선생이 선택하는 것일 테고."
..."김 선생, 지도는 영토가 아니에요. 너무 가까이 있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조금 떨어져 있어야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지요."
_'#15. 지도와 영토' 169쪽
하지만 도연은 간절히 바랐다. 마음속 자책을 털어내다 보면 조금은 줄어들거나 옅어지지 않을까. 조금씩 밀어낼 때마다 흔적이 사라지는 오래된 스티커 자국처럼.
_'#16. 한여름 밤의 우진' 177쪽
"...주는 사람은 언제나 사소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사소한 게 더 크게 남더라고요. 큰 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사소한 건 관심이 있어야 보이니까. ..."
...도연은 그제야 알았다. 누군가를 받아들일 줄 아는 선이 덕분에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었다는 걸. 자신이 선이를 생각해 레스토랑에 데려온 게 아니라 선이의 마음이 쌓여 자신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걸.
_'#17. 우리는 동료니까' 185~186쪽
지원을 닮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더는 누군가를 지향하지 않아서 도연은 조금씩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밖에 없었다.
_'#18. 지원과의 재회' 190쪽
도연아, 가족은 가장 편안한 사람이지. 늘 너의 편이니까. 그래서 소중한 거야.
..."잘했네. 가족들 사정 생각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걸 먼저 생각해. 네가 잘 사는 게 가족을 지키는 거야."
...매일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듣는 게 도연의 일이었지만, 생의 어느 구간에서는 그들의 이야기에 감정이 이입되곤 했다. 삶은 다양하지만 또 대체로 비슷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해본 적이 없다고,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도연은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사람들은 어디까지 외로운 걸까 생각했다. 도연 역시 선뜻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라 스스로 어디까지 외로운 건지 짚어보았다.
...괜찮은 것 말고, 괜찮지 않은 것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자고. 징징대고 싶은 것, 힘든 것, 견딜 수 없는 것,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것, 무엇이든 입 밖으로 나오면 그만큼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_'#19.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것들' 195, 196, 198~199쪽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도연은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게 변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했다. 다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다. 좋은 방향으로 키를 맞춰두지 않으면 더 쉽고 편안한 나쁜 방향으로 이끌려갔다. 매일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곁에 어떤 사람을 두는지에 따라 삶의 모양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서 최소한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대안을 찾는 게 인생의 미션 같았다.
..."원래 나는 평온한 사람이고 싶었어요. 중심을 아주 잘 잡아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런데 평온함을 유지하려면 싸움꾼이 되어야 하더라고요. 싸움이라고 해봐야 방패나 휘두르는 일이었지만. 근데 그게 너무 피곤해서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그냥 일희일비하려고요.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고.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럼 도움 청하는 연습을 좀 해요. 무거운 건 같이 들지고 하고, 휘청일 때는 팔도 좀 빌려달라고 하고."
"도움 받으면 돌려줘야 하는 게 번거로워요. 제때 돌려주지 않으면 그것대로 불편하고요."
"때로는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도 필요해요. 그게 선의든, 뭐든. 그 안에 어떤 기대가 있건 그건 그 사람의 몫이죠."
_'#20. 마침내, 안녕' 207, 208~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