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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세상이 다 있었다

워너 브롱크호스트 : 온 세상이 캔버스

by grape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 필요했다. 잡생각이 많아져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던 날. 그래서 질러버렸다. '언젠가 봐야지' 하고 티켓 사는 걸 미뤘던 전시.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전시였다.



지난 '슈타이들 북 컬쳐' 전시의 후속으로 알게 된 전시였다. 장소도 그라운드시소 서촌.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 소재들을 보니 더 궁금했다. 그러나 많은 인기로 웨이팅까지 있다는 말에 선뜻 나서지 못했었다. 그렇게 비장의 무기(?)처럼 갖고 있던 티켓을 이날 질러버린 것이다. (마침 할인 이벤트도 있어 더 좋았다.)



거친 텍스처의 캔버스를 개발하고, 그 위에 그린 미니어처 그림이 시그니처인 워너 브롱크호스트. 오리지널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를 대체한 사진이었다. 그리고 작품마다 그 과정을 담은 영상들을 보여줬다. 기존 전시들보다 양과 시간도 좀 많이. 이것 자체도 작품인 것처럼. 워너 브롱크호스트는 가족, 특히 자녀를 참 아끼는 작가였다. 왼팔로 아이를 안고서 오른팔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이것 또한 하나의 시그니처였다.



특수 개발한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두껍고 질척한 아크릴 물감을 펴서 바르고 말린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사람, 동물, 사물 등을 미니어처로 작게 그리다 보니 나를 포함한 관람객들은 작품에 더 가까이 설 수밖에 없었다. 작게 그려도 그 안에 세상이 다 있었다. 집요함마저 느껴졌다.



이전 전시로 그라운드시소 서촌을 경험했던 터라 달라진 모습들도 보여 재밌었다. 같은 공간을 이렇게 달리 꾸밀 수 있구나. 이전에는 대형으로 인쇄한 사진이 붙어 있던 곳이, 지금은 워너 브롱크호스트의 캔버스처럼 페인트가 거칠게 칠해져 있었다. 콘셉트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 기획도 또 하나의 전시처럼 구경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오디오 도슨트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핸드폰을 최대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잠시 꺼내 사진을 찍었지만, 최소한으로 사용하려 했다.)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얻는지. 또 어떻게 구현해 내는지. 전시를 볼 때마다 참 흥미로우면서도 부러운 부분이다. 역시 자신만의 표현 수단을 갖고 있는 것은 참 멋지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알고 있지 않은가. 워너 브롱크호스트도 미니어처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작아서 보는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자신은 표현했으니 만족하지 않았을까.



자신만의 캔버스를 만들 때까지 다양한 재료들을 직접 만지며 연구해 봤다고 했다. 그 과정은 단지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됐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고달팠을까. 마냥 즐겁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작은 것에도 감탄하며 나아갔을 거라 생각해 본다. 내게도 필요한 자세라고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거대한 것에도 놀라지만, 정말 작은 것에도 놀란다. 그 작은 것에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은 눈여겨볼 만하다. 보이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시간과 마음들은 비교할 수 없이 클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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