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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장치들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by grape

면접을 위한 자료 조사차 교보문고에 들렀다. 정해진 잡지를 보기 위해 갔는데, 입구에서 얼마 안 된 거리에 '화제의 신간'들이 모여있는 코너가 있었다. 시험기간에는 평소 보지 않는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도 재미있는 법. 그런 심정으로 나의 발걸음이 잠깐 그곳에 멈췄다. 시간상 오래 머무르진 못했지만 그래서 더 인상에 남은 책. 바로 <단 한 번의 삶>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김영하 작가님의 신간인 것도 그렇지만. 제목이 더 끌렸다. 단 한 번의 삶이라. 평소 예민하고 쓸데없는 걱정도 많아 현재를 잘 즐기지 못하는 지금. 그런 내게 '단 한 번의 삶'이니 염려하지 말고 즐겁게 살아가라는 응원이 주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책을 직접 사기보다는 주로 빌려보던 나였는데. 이 책은 소장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바삐 이동해야 했던 탓에 서둘러 서점을 나와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마음이 바뀌기 전에 교보문고 바로드림으로 책을 주문했다. 30분 정도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있는 교보문고 지점으로. 예약 구매 후 픽업하는 서비스를 신청해 둔 것이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힐링의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걷고, 좋아하는 문장을 읽고, 감탄하는 그 코스를.



'인생 사용법'이라는 띠지의 문구에도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나와 같은 컨디션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떤 인생 노하우들이 있을까. 어느 조언이라도 간절했던 걸지도. 결과를 단정해버리지 말고 우선 저지르며 시작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책을 들고 저녁 일정을 보낼 동네로 이동해 한 카페를 찾았다. 생각보다 공간이 크지 않았다. 테이블과 의자의 형태도 다양했다. 오래 앉아 있기에는 불편해 보이는 곳만 비어있었다. 그래도 그냥 가기는 싫어서 우선 앉았다. 먼저 일어나는 손님들 자리가 괜찮아 보일 때마다 자리를 이동했다. 유목민 같이.


처음 가본 카페였고, 자리를 잡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나름 커피 맛도 좋고 마지막에 앉은자리도 깔끔해서 좋았다. 간단한 간식도 먹고 싶었는데, 마침 한 약과 전문점이 팝업 행사를 하고 있었다. 약과 하나를 사더라도 커피를 할인해 줬다. 타이밍이 좋네. 달달한 약과에 아메리카노 한 모금씩. 그 와중에 계속 이 책을 읽었다. 여러모로 분주하지만 뭔가 뿌듯했던 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여러 유식한 말들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결국 작가님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임을 느끼며 묘한 위로도 받았다. 굳이 내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읽는 행위를 했던 건지도. 나만 혼자 가진 압박도 다 내려놓으려 했다. 그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도록.


그래서 이번에는, 문장을 따로 옮겨 적은 것이 거의 없다. 핸드폰에 메모해 놓곤 하는데, 속이 시끄러워서 핸드폰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책을 다시 한번 훑어가며 눈에 띄는 문장들을 남겨보려 한다. 처음 읽었을 때와 다른 문장들이 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또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 맘대로 생각해 본다.






모두가 그냥 믿어주었던 그 이야기는 인물을 만드는 게 업인 소설가의 아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중요한 무엇이 숨어있을 때가 많다.
_'엄마의 비밀' 19쪽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생일 축하는 고난의 삶을 살아온 인류가 고안해낸, 생의 실존적 부조리를 잠시 잊고, 네 주변에 너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 것을 부드럽게 환기하는 의식이 아닌가 싶다.
_'아이와 로봇' 31쪽


그때 나와 동생이 빼앗긴 기쁨은 신발 한 켤례보다는 더 중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그걸 왜 못하겠는가? 나도 그랬을 수 있다),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 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_'기대와 실망의 왈츠' 61쪽


그런데 이렇게 여러 가지를 그럭저럭이나마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것은 어딘가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타고난 성격 탓이다.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이라면 일단 시작부터 하고 보는 성격 때문에 얼리어댑터라는 소리도 들었다. 평생 남보다 뭘 먼저 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전에 못 보던 것이 보이길래 이건 뭐지 싶어 재미로 해보다가 그냥 계속하게 된 것들이었다.

... 신은 나에게 집중력을 주지는 않으셨지만 대신 태평한 마음을 주셨던 것 같다. 지금은 이래도 오 년, 십 년이 지나면 그럭저럭 잘할 수 있을 거야, 라는 마음. 나에게는 그 마음이 있었고, 참으로 다행하게도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 참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_'테세우스의 배' 70~72쪽


캐릭터의 대사와 행동을 오래 보아온 독자도 나름의 통찰력으로 그 인물에 대해 잘, 어쩌면 작가보다 더 깊이 알게 된다고 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일은 캐릭터를 만들어 대사와 행동을 부여한 뒤 출판을 통해 세상에 내보내면 끝이 난다. 그때부터는 독자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창작이 시작된다. 독자는 그렇게 주어진 인물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내면화한다. 그 과정이 계속 이어지면 어떤 순간 독자는 개개의 인물에 대해 그 누구의 해석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만의 판단을 갖게 될 것이고, 때로는 창조자인 작가에게도 맞설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쯤 그 인물은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독자의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_'모른다' 93~94쪽


...제정신으로 고통을 직시하는 것과 내가 나인지조차 잊어버리는 것 둘 중에서 어떤 게 나을까?
...「욥기」를 끝까지 읽어봐도 욥이 이 시련의 의미를 찾은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고통의 원인을 찾는 일의 무의미함을 발견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성서 속 신은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고 묻는 욥을 마뜩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욥이 그 질문을 거둬들이고 그저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에야 신은 그에게 (답이 아닌) 보상을 내린다.
_'스캔들이 된 고통의 의미' 110~111쪽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의 영역이다(오직 죽음만이 확실한 미래다). 이런 불확실성은 당연히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이 극에 달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너무 없다면 위험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한 불안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_'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 137, 140~141쪽


...그리고 남들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실속을 챙기는, 최선을 다해 2등을 하고 있을 얼굴 없는 고수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후로 사람을 보는 관점도 조금 바뀌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크고 우람한 나무처럼 도드라지는 이가 있다. 그런 사람은 그늘도 크다. 그 그늘 속에 존재감 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_'무용의 용' 150~151쪽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려면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첫인상은 전부가 아니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셀카가 남이 찍은 사진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가장 괜찮게 보이는 각도로 찍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아마추어 골퍼들이 어쩌다 한 번 올린 최고의 타수를 평균 타수로 말한다. 자꾸 말하다보면 가장 먼저 자기가 속는다. 최선의 면이든 최악의 면이든 모두 내 안에서 나온 것이다. 나 역시 적당한 온도와 시간에서 최선일 것이고, 반대의 조건에서 최악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 안의 최악이 두려웠다.
_'도덕적 운' 173쪽
그런데 인간만이 꿈이라는 이상한 세계,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휘발되기 시작하는 이 아까운 환상적 질료를 언어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것이 이야기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로 만들어 전파했지만 곧 글로도 적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작심하고 꿈을 꾸겠다는 의미다. 현실이 여기 있지만 나는 문을 열고 다른 세계로 잠시 넘어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라고 결심하는 것이고, 실제로도 독자를 안전하게 제자리로 돌려보내준다.
_'도덕적 운' 179~180쪽


살아보지 않은 인생, 다시 말해 내가 살아갈 수도 있었을 삶이란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상과 비슷하다. 나는 거기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게 전부다.
_'어떤 위안' 185쪽
...그러나 나는 인간이 '살아보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데는 더 근원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앤드루 H. 밀러, 『우연한 생』, 방진이 옮김. 지식의편집, 2021, 29쪽.)
_'어떤 위안'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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