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 에세이) 김창완
유튜브 채널 중 시끌벅적한 예능도 좋지만, 소수의 사람들끼리 잔잔하게 대화하는 토크가 당길 때가 있다. 그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게스트가 원하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다. 최근에는 배우인 김창완 씨가 게스트로 나왔었다. 예전에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책을 읽어야 할 타이밍인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약 15분 남짓의 거리지만 자동차 도로가 많아 횡단보도도 몇 군데 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평소라면 핸드폰을 꺼내 SNS를 들여다봤을 텐데. 이 때는 책을 펴봐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잘 읽지 않는 추천사부터 살살 읽어봤다. 영상이나 이미지보다는 글을 보고픈 마음이었달까. 이 책은 첫인상부터 남달랐다.
23년 동안 아침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던 김창완 작가가 직접 쓴 오프닝 멘트,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듯한 구어체부터 눈에 띈다. 푸근하고 정이 많은, 그렇다고 마냥 무디지도 않은 60대 후반 아저씨가 있다. 작가가 누구인지, 얼굴까지 아는 유명인이어서 그런가. 청자층이 확실했던 라디오의 오프닝이어서 그런가. 일방적으로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마치 샐러드나 샤부샤부를 먹은 듯 속이 편하고 부담이 없었다.
에세이여서 뻔히 예상되는 감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느릿느릿 유연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동화되어 버린 나를 발견했다. 사람이니까 누구든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며 크고 작게 감탄하기도 했다. 노래도 하고 곡도 쓰고 가사도 쓰고. 그래서인지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도 곳곳에 남아있다. (나만의 의견이지만, '글을 쓴다는 것'과 '글쓰기'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글쓰기'는 좀 더 의무감이 반영된 느낌이랄까. '글을 쓴다는 것'은 좀 더 자유롭다.)
준비된 어른이 되기보다는 늘 새로운 어른이길 바랍니다.
준비된 어른을 지향하는 'J' 성향인 데다, 변화는 두렵지만 새로운 건 궁금해하는 나를 건드린 문장. 둥글둥글, 노래와 글로 사람을 울려온, 연륜의 문장들이 이밖에도 참 많았다. 작가가 실제로 읽었던 라디오 오프닝 음원 링크를 담은 QR코드도 곳곳에 있었다. 읽는 동안 일일이 핸드폰을 들이대기 번거로워서 아직 못 들어봤는데. 책을 반납하기 전에 한번 들어봐야겠다.
현재를 즐기고 잘 살아야 한다는데 토 달고 싶지는 않지만 어제가 몽롱하고 내일이 의심스러운 것만큼 지금도 안갯속 같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눈앞의 것만 보면 현재가 다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 큰 세상인 과거라는 추억과 미래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_‘뒤돌아보지 않는다’ 51쪽
아침은 희망의 상징이지요. 아침이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어제의 후회와 못마땅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어제 일에 매달려 있을 필요 없어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이라 해도 지나간 생일 파티입니다. 아름다운 아침은 그 아침도 아니고 저 아침도 아니고 이 아침입니다.
_‘아름다운 아침은 언제나 이 아침입니다’ 59쪽
세상사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 우회 도로가 있고 왕도가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극복의 대상으로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고난은 늘 있는, 동네 언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_‘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지’ 65쪽
기다리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오로지 나하고만 있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지금의 나와 또 다른 나 사이의 다리가 아닐는지. …진짜 버려지는 시간은 누구 미워하는 시간입니다.
_‘사랑이 뭐 대단히 뜨거워야 하나’ 124쪽
마음에도 공복감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뭔가를 해야겠다 하는 마음조차 없는 빈터 같은 마음, 그 정신세계가 얼마나 상쾌해요.
누굴 만나도 첫사랑이고 뭘 해도 첫 발자국이라면 얼마나 설레는 일이겠냐고요.
_‘기쁨이 늘 기쁨일 필요도 없고’ 185쪽
‘어제의 내가 아니라 나도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내가 되어 아침을 맞는 게 어떨까?’ 너무 사춘기 같은 얘기일까요.
_‘나도 만나보지 못한 내가 되어’ 213쪽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 것이 당연하지만 뭐가 그렇게 따져볼 게 많은지. 그러니 맨날 기분이 들쭉날쭉하지요. 평상심은 어디 가 앉아 있을 데가 없고. 날씨야 매일 다르기 마련인데. 오롯이 내 마음 앞에 정좌를 합니다. 낯이 섭니다. 얼마나 본 적이 없으면. _‘오롯이 내 마음 앞에’ 219쪽
맞아요. 세상만사가 그렇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따로 행복할 시간 안 줍니다.
_‘희망이 뭐 대단한 데 있는 것도 아니고’ 243쪽
일이 뜻대로 안 된다고, 그걸 나쁜 징조라고 섣불리 생각하는 것도 좀 경박한 걸지 몰라요. 겨자를 넣어야 냉면 맛이 살고, 그렇게 마셔대는 커피도 쓴 맛이 기본이잖아요. 씀바귀도 그렇고, 고들빼기나 몸에 좋다는 익모초도 얼마나 쓴데요. 잠깐 쌉싸름한 맛이 난다고 무조건 내칠 일이 아닌지 모르니 원인 모를 우울이나 자주 걸리는 빨간 신호에 너무 예민해지지 마세요. 뭔가가 나를 보호하는가 보다 하고 넘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_‘마냥 좋은 일도 주야장천 궂은일도’ 270쪽
저는 아직도 혼자 있는 거에 적응을 잘 못 하는 거 같아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걸 심심하다고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한가하다, 여유롭다 하는 게 마땅한 건지…
_‘역시 함께 사는 게 맞아요’ 283쪽
원고지 가로로는 밭이랑처럼 칸과 칸 사이에 여백의 줄이 있었다. 그 줄은 행과 행 사이의 간격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만약에 그 ‘간격’의 거리감이 없었다면 원고지에 적힌 글이 그토록 우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글은 그렇게 잉크 새듯이 나오진 않는다. 원고지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늘 뛰어내리지도 못할 벼랑 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싶지만 벼랑 끝에서만 보이는 풍경이 따로 있어 쉽게 뒷걸음질 쳐지지도 않는다.
…생각과 생각 사이 떨림과 떨림 사이에서 글이 나온다.
…글은 풀어진 그림이다. 철자 한 획 한 획 그어질 때마다 형태가 생기고 색이 더해진다.
…원고지가 어떻게 종이일 뿐이며, 그 위의 글씨가 어찌 기록일 뿐이랴. 2백자 원고지는 아직 안 적어 내려간 삶이고 아직 말하지 못한 소망이고 아직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다.
_‘두근거리는 기다림도 사치가 되어버렸다‘ 286~289쪽
뭐든 애틋하게 보면 아름답고 귀한 것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내 팔을 뻗어서 잡을 수 있는 건 겨우 책상의 볼펜 정도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겨우 길 건너의 차 소리 정도인데, 내가 볼 수 있는 건 저기 봄이 오는 들녘 너머까지라는 게 새삼 경이롭습니다.
…마음속은 요변덕을 떨고 상상은 우주를 떠다니는지 몰라도 오늘도 나를 지켜주는 건 태곳적부터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는 나의 맥박과 자궁 밖으로 나온 뒤로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나의 숨결입니다.
오늘도 눈부신 계절을 흠뻑 들이켜세요.
…가만히 보면 하루의 무게가 작지 않아요. 오늘은 여태까지 내 인생의 제일 마지막 날인 동시에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의 첫날 아니에요? 그게 오늘이라는 이름의 하루입니다.
_‘오늘은 낙담하기에 이르고’ 292~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