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큐레이션> (에디터 관찰자 시점으로 전하는 6년의 기록) 이민경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터넷이나 SNS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을 찾는 것. 또 하나는 무작정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목의 책을 찾는 것이다. <도쿄 큐레이션>은 두 번째 방법으로 만난 책이었다.
사실 <도쿄 큐레이션>은 그 첫 만남이 헷갈린다. 직접 손으로 만져본 것은 몇 주 전 동네 도서관이었지만, 예전에도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글도 빼곡하지만 사진 자료도 풍성해 500여 페이지로 이뤄진 이 책은 제법 두꺼웠다. 그래서 처음 대여기간 동안에는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아 한 번 더 빌렸다.
읽을수록 아까운 책들이 있다. 재미있어서 빨리 읽고 싶지만, 또 금방 읽기는 아쉬운. 이 책도 그랬다. 일단 나와 공통점이 많았다. 작가의 직업이 에디터라는 것. 업무든 취미든 이곳저곳 탐방을 즐긴다는 것. 특히 일본어를 전공한 내게 익숙한 도시인 도쿄가 그 무대라니. 1년도 채 안 된 기간이지만 잠시나마 살았던 도시. 그 순간들을 회상하며, 책에 쓰인 일본어 단어들의 의미가 와닿아 더욱 반가웠다.
배우고 싶은 표현. 공감하는 마음들. 가고 싶은 도쿄의 곳곳들이 담겨 있었다. 가끔 나는 일상을 소재로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특히 다녀온 곳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혼자 찔리기도(?) 했다. 나 이러고만 있어도 되나. 이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혼자만의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미 있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은 물론 자신의 느낀 점들도 솔직하게 쓰는 그런 사람. 마침 도쿄 여행도 앞두고 있는 시기라, 작가가 소개한 곳들 중 맘에 든 곳은 따로 저장해두기도 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작가는 여행객이 아닌 거주민으로서의 관점으로 글을 썼다. 외국인인 만큼 여행하는 기분으로 바라보며 자유롭게 썼을 수도 있겠지만. 읽다 보면 그 대상들에 대한 놀라움과 남다른 애정이 느껴진다. 공간, 풍경, 브랜드, 음식 등 주제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사람을 들여다봤다.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부터 퇴근 후 아지트인 식당 주인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도 담겼다. 에디터로서의 관점과 필력은 물론 도쿄와 일본을 향해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그들만의 강점을 정리한 내용들을 보며 감탄했다. 여러모로 즐길 것도 배울 것도 많은 책이었다. 무엇보다 신념이 뚜렷하고, 자신감과 매력 또한 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소중히 지켜온 나만의 것이지만, 그래서 모두에게 알리고 싶을 것들이다. 상품을 넘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으려는 자세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처음 읽은 지 한 달은 족히 되었을 프롤로그를 다시 한번 읽어봤다. 그래, 이 책이 이렇게 쓰인 책이었지. 내용들에 푹 빠진 나머지 이 책의 탄생 계기를 잊고 있었다.
결국 당신만의 도쿄, 아니 어디라도 떠날 수 있는 용기와 추진력에 보탬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이 글을 쓰며 다른 꿈을 꿔본다. _시작 '이야기를 시작하며' 13쪽
사실 지금 햇살 좋은, 꽃이 가득 핀 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이 리뷰를 쓰고 있는데 묘하게 우울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마주하며.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이 프롤로그를 다시 읽고 '어디라도 떠날 수 있는 용기나 추진력'이라는 단어를 보며 살짝 힘을 내보고 싶어졌다. 적어도 나도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기록하고, 쓰기 좋아하니까. 여기서 힘을 다시 얻어봐야겠다.
그는 매장에서 긴장과 완화 사이의 차이를 느껴보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눈으로 그릇을 고르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났으면. 그것은 단지 관심 있는 작가의 정보를 알아가는 일이 아니라 물건을 보는 안목, 세상을 바라보는 미감을 쌓아 가는 경험이다. … 일상 생활에 소소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양상은 세분화될수록 반갑다. 하루를 소중히 다루는 다양한 시선이 존중되고 또 전방위로 확장되는 기분이 든다. _133쪽
의도적으로 차별화를 꾀하지는 않고 다만 지금 유행하는 것과는 가급적 떨어지려고 생각한다고. …유행에서 어쩌면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 비주류가 주류의 방향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근사해 보인다. _140쪽
“감도가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
…관상용 미술품에는 없으나 사용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건강한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업계 상식이나 시스템에 현혹되지 않고, 우리의 평범한 오늘에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제안에 저절로 맞장구를 치게 되는 곳. _170~172쪽
무언가에 단순한 고집을 넘어 신념이 담겨있다면 세상 어딘가에서는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남을 동화시키려면 먼저 내가 나를 믿어야 한다. _176쪽
어쩌면 일본의 힘은 이렇게나 작지만 강력한 브랜드들이 서로 응원하고 연대하는, 관계의 에너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엔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_178쪽
다독가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한다. 사실 영화보다 책을 선호하는 것은 영상보다 문자 속에서 나만의 해석과 상상의 여지가 더욱 풍부해서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작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의식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글을 읽고 있으면 노래를 듣는 것처럼, 나도 같이 문장의 파도를 탄다. 때로는 나만의 반론이나 흩날리는 생각을 문장으로 적어 내려가곤 한다. 오롯이 혼자 차지하는 디저트 타임 같다.
…하지만 결국 자주 찾는 곳은 좋은 책을 발견한 곳이었다. 좋은 책이란 남들 다 읽는 화제의 책, 베스트셀러, 유명인이 홍보해 준 책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의 관점에서 발견한 책이다. _184~185쪽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혹은 시시껄렁한 추억의 조각들이 공기 속에 떠다니며 공간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_335쪽
“디자이너의 역할이랄까… 글쎄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요즘이야말로 오래 함께하고 싶은 좋은 품질의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쓰기 편하고, 우리의 시선이 오래 머물고, 그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물들을 만들고 싶을 뿐이지요.” _384쪽
손님에 대한 으레 친절한 대우가 아니라, 도쿄에 살고 있다는 일종의 안락한 소속감을 안겨주는 곳. _387쪽
"요즘은 SNS에서 자기 홍보를 열심히 하는 작가들이 '잘 팔리는 작가'가 되는 시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기가 두렵더라고요. 매일 정해진 루틴이 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쥐어짤 수가 없어요. 지금 제 그릇들을 위탁 판매해 주는 갤러리와 숍을 좀 더 소중히 하고, 천천히 저의 속도대로 집중해 작업하고 싶어요." _403쪽
단순히 레코드를 틀어주는 가게를 소개하거나 레코드나 오디오 사양 같은 걸 파고드는 잡지가 아니라, 재즈 음반이 있는 삶의 즐거움과 라이프스타일을 말하고자 한다. 실제로 읽어보니 그가 지향하는 콘텐츠의 성격은 재즈 그 자체에 있기보다는 일상에서 재즈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했다. _433쪽
오늘 보내는 하루, 오늘 만나는 사람, 오늘 너와 내가 먹는 것들. 먼 미래보다 내 앞에 놓인 현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여유 있어보였던 걸까. 그렇게 일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비결들을 조금씩 터득한 것이 아닐까. _4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