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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pe Aug 17. 2022

심심하지만 계속 생각나네

샐러드김밥

퇴사를 한 주 앞둔 마지막 주말, 저녁을 먹은 게 뭔가 잘못되었는지 위경련이 걸려버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증상들이 위경련이었던 것 같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출근 마지막 주를 장식할 계획으로 회사 동네의 맛있는 것들을 먹고자 했었는데. 게다가 변경하기 어려운 점심 약속도 있었고, 3박 4일의 단기선교 일정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컨디션이 이렇게 나빠지다니.


어쩔 수 없이 회사 동료와 먹기로 한 점심 약속의 메뉴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름지거나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했다. 이때 다시 한번 느꼈다.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은 대부분 자극적이라는 것을. 이 조건들을 제외한 메뉴를 찾자니 쉽지 않았다. 약속을 잡은 동료들에게도 너무나 미안했다.


나의 사정을 알았던 동료가 '건강한' 메뉴를 추천해주었다. 바로 샐러드김밥. 바질냉우동과 함께 인기 있는 가게가 있다고 했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갔다가, 아주 맛있게 다 먹고 나왔다. 입 안 가득 들어가는 구운 야채, 닭가슴살의 식감과 쫄깃한 냉우동의 맛이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평가는 상대적인 것일 뿐. 무엇이든 그 자체로 당당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입에 가득 찼던 건강한 식감이 계속 생각났다. 하지만 상대는 손이 많이 가는 김밥. 하지만 재료가 보다 간편한 편이라고 다독이며 마트를 둘러보았다. 파프리카와 양배추, 김밥용 김을 샀다. 그리고 지난번 두부 강된장을 만들고 남은 풋고추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나름 아삭한 식감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파프리카와 풋고추는 씨를 제거한 다음 길게, 양배추는 잘게 채를 썰었다. 특히 파프리카는 에어프라이어로 구워보려고 했는데, 생각한 비주얼(노릇노릇한, 약간 탄 자국이 있는)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굽기를 시도했다가 탄생한 부들부들한 파프리카 반, 안 구운 것 반을 섞어서 써보기로. 닭가슴살은 소시지로 있어서 두껍고 길게 썰어서 준비했다. 입에 꽉 차는 그 식감을 담당해야 했다.


내가 직접 나서서 김밥을 말다니. 어쩌면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식욕은 정말 그 원동력이 대단하구나. 김발에 김을 올리고, 양념한 밥을 조심스레 펴 발랐다. 그리고 채 썬 양배추와 파프리카, 풋고추, 닭가슴살 소시지를 올렸다. 울퉁불퉁하고 재료가 삐져나오기 일쑤. 터질까 풀어질까, 조심스레 달래 가며 김밥을 말았다. 처음 김밥을 다 말았을 때의 묘한 성취감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총 여섯 줄의 김밥이 탄생했다.


마지막에는 참기름을 표면에 발라주고, 다시 한번 칼을 갈았다. 무딘 칼로 내 김밥을 망가트릴 순 없어.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 김밥을 썰었다. 보다 개성을 뽐내는 꼬다리부터 작은 김밥들이 알알이 쌓여갔다.




샐러드 김밥인만큼 간은 심심했다. 그래서 다양한 소스를 활용해보았다. 최근에 돈가스를 찍어먹은 와사비마요소스부터 오리엔탈 샐러드드레싱까지. 조금 남은 두부 강된장이랑도 잘 어울렸다. 개성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고 나름 높은 점수와 함께 경쟁력을 얻지만, 심심한 사람들도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두루두루 어울리는 매력이 있다. 마치 샐러드김밥처럼.


물론 샐러드김밥을 또 직접 만드려고 할지 그건 모르겠다. 가성비를 따지면 사 먹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역시 도전 자체로는 큰 의미가 있다. 슴슴한 샐러드김밥이 언젠가 또 생각날지도 모를 일이다.


노란 파프리카, 색깔로도 심심한 매력을 더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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