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기]Nationalism.
우연히 마주쳤는데 오늘 하루를 지배하는
나는 귓구멍이 꽤 커서, 어지간한 이어폰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빠지기 때문에 걷거나 뛸때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그러다 최근에 싸게 산 무선이어폰이 있어서 출퇴근할 때 껴봤더니, 웬일로 걸을때 빠지지가 않는다. 내 귓구멍에 살이 찐건지 아니면 내가 드디어 맞는 이어폰을 찾은건지 암튼..
조깅할 때 어쩔 수없이 늘 헉헉거리는(디테일하게 말하면 습습후후) 내 들숨과 날숨소리를 듣는데, 오늘은 귓구멍에서 빠지지 않는 이어폰도 있겠다 날씨도 좋겠다 기분도 상쾌하겠다 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어폰을 꼽고 달려보기로 했다.
일단 몇십미터 뛰어봤는데 다행히도 안빠진다. 게다가 달리면서 음악을 듣는게 이렇게 근사한지 몰랐다. 몇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출장갔을 때 묵었던 호텔 앞에서 본, 이어폰을 끼고 멋지게 조깅하던 늘씬하게 키가 컸던 동양남자가 된 느낌이었다.
잡설이 진짜 너무 길었는데, 나는 음악을 잘 모른다. 그래서 멜론에 들어있는 다른 '전문 음악청취자'들이 골라놓은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대부분 너무 잘 선곡되어 있다) 오늘도 그렇게 재즈 관련된 플레이리스트를 아무거나 누르고 조깅을 하는데, 반환점을 돌아 5분정도 뛰었을 때 갑자기 내 귀를 황홀하게 하는 피아노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잠깐 서서 무슨 곡인지 확인해봤다. 예상했던 이름과는 다르게 일본 재즈피아니스트인 Ryo Sonoda라는 사람이 연주한 'Nationalism'이라는 곡이었다. (나는 촌스럽게도 '숲속의 아침' '상쾌한 아침바다' '새벽 비행' 등 경쾌한 이름으로 예상했었다)
일본인이 연주한 민족주의라니.. 뭔가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조깅을 즐기면서 듣기에는 어쨌든 상당히 좋았다. 시원한 공기와 맑은 아침 하늘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경쾌한 피아노곡에 맞춰서 뛰다가, 곡이 끝날 때쯤 무한반복을 누르고 집까지 달렸다.
어쩌다보니 출근길에도 또 들었다. 점심 먹고 걷는 길에도 또 들었다. 아마 퇴근길에도 들을 것 같다. 그런데, 한일전 때마다 애국심으로 역발산기개세하는 토종한국인의 귀에 자꾸만 착착 감겨드는 것이, 아무래도 곡 자체와 일본인이 연주한 Nationalism이라는 이름이 계속 따로도는 느낌이다.
료 소노다라는 재즈피아니스트의 멋진 작곡과 연주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Nationalism이라는 일본인의 작명은 히스토리컬리 센스가 별로인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내 멜론 리스트에서는 Nationalism 대신, Pachinko라 명명하고 싶다. (요새 일본 극우주의자들을 팔짝 뛰게 하는 애플TV의 그 한드 파친코) 어디까지나 내 짧고 유치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