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창업주 이동찬
코오롱 창업주 이동찬
허울좋은 양반자식
나는 晦齋의 16대 손이다. 아버지(李源万)와 어머니(李渭文)의 외동아들로 경북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서 1922년 4월1일 태어났다. 아버지가 물려받은 재산은 약 5백 석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보다 열여덟 살 위다. 열여섯에 가장이 되셨고, 열아홉에 산림조합 기수보로 10년간 요직에 계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29살 아버지는 아무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으신 채 가산을 정리하여 일본으로 가버리셨다. 일본으로 단신 날아가신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유림 양반댁 자손에서 장사꾼으로의 변신도, 어머니가 여자로서 겪는 한평생 인고도, 본격 고생길에 들어선 내가 지식 탐구욕과 투지로 피끓게 된 계기도, 모두 아버지의 <가출>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빚에 쪼들리던 어머니는 볼품없이 남은 가산을 정리하여 흥해읍으로 나와 동네 삯바느질감을 얻어서 밤새 그 일을 하셨다. 덕분에 신광보통학교 4년을 수료하고 빈둥대던 나는 흥해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끼니 잇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1년도 못 견디고 어머니 친정 기계면으로 다시 옮겨 갔다. 방 하나 토방하나, 부엌으로 된 작은 초가에서 기계공립소학교 5학년 2학기에 편입하였다.
지게 진 양반 자식, 오 원짜리 상점 점원으로
아버지가 그냥 산림기수보로 쭉 계셨으면 산림 관계 핵심 공무원이 되셨을 테고, 우리 신분과 지체도 보장될 수 있어 편안하게는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개선은 이루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양반댁의 몰락사를 보면 대개의 경우, 그 집안 적자가 안주하게 되면 망하고 서자가 현실을 극복할 때 새로운 신분으로 성공하고 있다. 즉 안주한 양반 자식은 자립심을 잃고 경쟁력을 못 갖춘 채 시대 변화에 낙오되는 반면 「가만있으면 내게 남겨질 토지 한 뼘 없다」고 입술 깨물고 바둥거린 서자는 스스로 변화에 적응하게 된다는 것이, 사회 변동과 신분 변화에 관한 내 소견이다.
우리 부자의 경우는 상기 이론과 다르지만 현실의 껍질을 깼다는 점에서 그 정신은 비슷하다. 아버지는 물론 나도 보통학교를 세 군데나 다니면서 1등을 하려고 버둥댔고, 남의 집살이하는 동안 자생력을 키워서 일본에 가서도 야간 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기계소학교 졸업식 땐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했다. 그날 어머니와 껴안고 많이도 울었다. 대구사범을 진학하라는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으나 내 형편으론 그림의 떡이었다. 그때 착실한 애가 아깝다고 봤는지 마을 순사가 찾아와 나를 일본인이 경영하는 포항의 대하 상점에 추천해 준 것이다. 당시 포항에서 제일 활발한 대형 잡화상점이었다. 얼마 전 그 자리를 찾아 보니, 어떤 분이 아디다스 스포츠 용품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오시다 상점에서 혹독하게 배웠다. 꼭 10개월 7일간 일했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 내가 하는 일은 판매, 배달 등의 본업 뿐 아니라 주인집 설거지, 목욕탕 청소와 물데우기(일인들 특유의 욕조). 불때기, 주인방 및 주방 청소, 빨래······모든 걸 열심히, 그리고 빈틈없이 해냈다.
처음 수습 점원으로 소개될 때, 그 주인이 너무 위대해 보여 ‘나도 커서 이 사람처럼 큰 상점 주인이 되겠다’고 심호흡을 크게 했던 기억이 난다. 하도 빠릿빠릿하게 일하는 것이 가상했던지, 보통 다른 점원들은 1년 수습을 지내고 봉급을 받았는데 나는 4개월 되던 때 봉급이 지급되었다. 첫 봉급, 일금 오 원이었다. 전액을 어머니 손에 쥐어 드렸다.
그 즈음 나는 죽음과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한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형산강 물을 보면서, 오오시다 상점에서 고되게 일하던 어느 여름날, 형산강변을 지날 때였다. 나는 일본산 물건들이 입항함에 따라 달구지에 받은 물건들을 잔뜩 싣고 오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날씨도 찌듯이 더웠지만 몸도 천근만근이었다. 꼭 아이스케키 하나만 먹었으면 싶은데 그 일 전이 없었다. 짜증이 극도로 솟아 형산강 물을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공부도 못 하고, 당시로선 시간 낭비 같은 잡일만 해대고, 당장 목타는데 단돈 일 전이 없어 아이스케키도 못 사먹는 신세, 불쌍한 어머니······누구 때문인가? 갑자기 강물에 원망스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이 무너지는 억장을 저분에게 알릴 수 있을까 하다가 불현 듯 죽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달리 알릴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죽었다고 하면 무심했던 아버지라도 가슴 아파하실 거야! 그래도 외아들인데 투신 자살을 했다······그러면 조금이나마 후회하시겠지?’
나는 아버지에 대한 앙갚음으로라도 죽는 길이 최선책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사춘기의 가장 민감한 때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강물이 가볍게 일렁이더니 아버지 얼굴 위로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지는 게 아닌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서늘해졌다. 미운 사람 볼 때는 가슴에 불 같은 것이 치밀었는데, 너무나 안쓰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물위에 떠오른 어머니의 표정은 준엄했다. 그렇다. 어머니를 위해서 살자---아버지가 밉다고 몸을 던지면 내 몸은 어머니 가슴에 못으로 박히게 된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하여튼 형산강에서 나를 투신 직전까지 몰아넣으셨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일본으로 건너오는 게 어떻겠냐?」--그래서 나도 결국 현해탄을 건너며 ‘아, 누구든 죽을 기운이 있는 사람은 살아서 생명력을 키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 땅에 첫발을 딛고
37년초, 막상 4년 만에 찾아뵌 아버지는 「동찬이 왔나? 애썼다」 그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의 공장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29세의 나이에 도일하셨던 아버지는, 이것 저것 모색하느라 논밭 팔아 마련해 간 돈마저 다 떨어지자 나중엔 신문 배달까지 하셨다 한다. 다까다라는 작은 알미늄 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가셨는데, 바로 거기서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기발한 사업거리를 발견해 내셨던 것이다. 당시 공원들은 공장 이름이나 상호를 등에 박은 짧은 겉옷을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일했는데, 작업 도중 쇳가루가 머리에 하얗게 내려 앉아서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작업 능률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챙이 달린 작업모를 쓰면 편할텐데...’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다. 기왕에 작업모를 만들 바엔 거기에 공장이나 상품의 이름을 인쇄한 광고모자를 만들자는 쪽으로 그 아이디어는 발전되었고, 아버지는 마침내 오사카 일대의 공장들을 일대로 수주를 따내는 데 성공하셨다. 아버지가 사장인 아사히 공예사는 37년 그렇게 광고모자 회사로 처음 출발했다. 원중, 원갑, 원천 세 분의 숙부가 아버지를 도왔고, 종업원으로는 조선인 세 명과 일본인 한 명, 작업용 미싱 여덟 대가 전부였다.
내가 찾아간 때는 창업 2년째로, 바야흐로 확장 일로에 접어든 공장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졸라 고꼬꾸상업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상업학교에서 배우는 부기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데 꽤나 쓸모가 있었다. 그때부터 아사히 공예의 장부 정리와 금고 관리는 나의 몫이 되었다. 내 나이 열여섯, 그때부터 우리 집안의 사업을 맡아 온 셈이다.
와세다대 정경부 대동아공영반
「니 정말 학교 졸업했나? 우등했다는 게 사실이가?···」
상업학교 4년을 졸업하고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물어 오셨다. 나는 모처럼 보여 주신 아버지의 관심에 목이 메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43년, 나는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합격했다. 당시 조선인 합격생은 7~8명에 불과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선 사상이 불온하지 않은가? 학비를 댈 능력은 있는가?를 살핀 다음, 일본인 학생들과의 점수 비교를 통해 더 높은 사람만 합격시키는 게 상례였다. 나는 하숙집을 얻어 독립해 나왔다. 마침내 내 청춘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기가 물을 만난 듯 나는 각종 서클과 학회에 가입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내가 속해 있던 와세다대 정경부 대동아공영반, 거기에는 대만과 중국, 만주, 싱가포르, 몽고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까지 이민족 출신의 학생이 반, 그리고 일본인 학생이 반 섞여 있었다. 우리 타민족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만 빼고 똘똘 뭉쳐 다니곤 했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대동아동영권>을 부르짖으며 동남아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점령해 가던 광포한 역사의 주인공이었다. 그 일본의 공동피해자인 우리들은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함께 뭉쳤던 것이다. 그때 같은 반 친구였던 중국인 학생의 이야기가 내겐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침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일본이 이긴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漢족일 뿐이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해도 그들이 도리어 우리 민족에 동화될 것이다. 그들은 점과 선을 점령할 뿐이지, 결코 한족 전체를 통솔하진 못할 것이다.」 그의 민족적 자부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때까지 <민족>이란 것에 대해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내게 대동아공영반은 오히려 더 큰 자극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방학때, 경성에서 만났던 한 여학생은 나의 의식을 더욱 새롭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때 친구의 주선으로 경성 나들이 안내역을 해주었던 경성고등사범의 여학생은 경복궁 뜰에서 내게 남쪽의 총독부를 5분간만 바라보라고 얘기했다. 나는 총독부의 웅장한 5층 건물과 낡은 지붕에 잡초까지 자란 경복궁의 모습을 바라보며 멸망해 버린 조선 왕조의 비애와 일제의 질곡에 움츠린 민족의 현실을 생각했다.
어머니를 위해 결혼하라
대학 2학년을 마치기 전, 나는 군 지원을 종용받게 되었다. 만약 입영를 거부할 경우 후떼이센징이라는 학대를 면키 어려울 테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서 사업하시는 아버지께 어떤 피해가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정은 모르고 살았지만, 도전의식이나 경쟁 의식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력적인 사업가 부친을 원망도 하고 선망도 하다가 나도 무엇인가 해보이겠다는···결국 입영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입대 전에 장가부터 들거라.」
아버지는 뜻밖의 제의를 해오셨다. 하기야 내가 전사라도 한다면 가문의 대가 끊길 일이었다. 그런데 「네가 군에 가고 없으면 네 어머니가 쓸쓸하실 테니 며느리가 말동무라도 되어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름으로 기계 마을 삯바느질 신세를 면하고 일본에 와 계셨지만 여전히 아버지와는 별거중이셨다. 자식인 나에게 무심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께 마져 무관심한 아버지에 대해 적잖이 불만을 품어 왔던 나에게 어머니를 위해서 결혼하라시다니! 나는 감격으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44년 1월의 추운 겨울날, 나는 당시의 포항의 申炳玉 어른의 무남독녀와 맞선이란 걸 보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申규수에게 장가들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호감을 사고 싶었다. 그리고 입대일이 너무 촉박했다. 1월 20일, 결혼 1주일 만에 나는 조선학도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왜 일본 군대에 입영할 수밖에 없었는가?」
나는 가장 나다운, 평범한 답변밖에 할 수가 없다. 살아 남기 위해서, 부러지지 않고 살아 남기 위해서였다고. 결국 살아 남는 자가 이긴다. 그 점은 아버지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나는 훈련생 중에서 1등을 하려고 무진 애들 썼다. 특히 하사관에게 잘 보이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같은 조선인 훈련생 중 더러는 그런 나를 아첨꾼이니 반역자니 하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 아니, 다나까 우끼오는 왜 훈련에 최선을 다했던가? 그것은 나대로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 성적과 내무반 성적을 잘 받아야 간부후보생에 뽑힐 수 있었고 간부후보생이 되면 다시 사관학교에서 1년간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될 가능성이 줄어드는 셈이었다. 어쨌든 나는 2차대전의 막바지, 일제의 단말마적 몸부림 속에서도 용케 위험을 피해서만 다녔다. 사관학교를 마치고 나는 미도의 동부 37연대로 배속되었다. 그때 나는 전투연습을 하던 중 동료의 기관총에 국소를 스치는 부상을 당했다. 그날 이후 나는 훈련에서 제외되었고, 그 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질 때까지 한 번도 연합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습을 당해 본 적이 없다. 어느 상황에서나 살아 남는, 경쟁에서 이기고 보는 투지, 그것이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장사꾼 정신의 근거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일제말 상황이 그러했고, 또 나 개인으로선 아버지의 입장을 감안한 지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군 지원은 어쨌든 나의 부끄러운 과거다.
아, 내 땅 내 젊음
‘45년 당시 해방된 조국에서 돈도 잘 벌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치가 한껏 상승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도 나도 자기 주장의 목소리만 높았고, 남에서는 이승만, 북에서는 김일성이 각각 정원을 세우려 하는 가운데 사회는 점점 혼란의 늪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저마다 애국자, 민족주의자라고 떠들어댔지만 정작 일반 국민의 일상 생활을 지켜 줄 치안은 형편없었다. 바로 그러한 혼란을 막고자 결성된 학병 동맹의 취지는 본래 순수한 것이었다. 나역시 당시 교육깨나 받은 젊은이로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되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있었고, 지역 학병 동맹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 경상도 출신 학도병 40명으로 뭉쳐진 학병 동맹은 무엇보다 치안 유지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의 역할이 하루 빨리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당시 경찰 간부들 중에는 친일파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일제 때 애국지사를 고문하던 경찰이 어떻게 해방된 조국의 새 질서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는가?
그 해 12월 경북 학병 동맹이 주동이 되어 경북 경찰학교를 창설한 뒤 나를 비롯한 4명이 교관으로 취임했다. 해방 후 경찰직에 있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대체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안다. 다만, 내가 경찰직에 있으면서 경험한 얘기를 몇 가지 들려주고 싶다. 요즘도 나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데모 소식을 접할 때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하는데, 군중이 너무 과격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경찰이 과잉진압한 결과는 아닐까 하는 점도 생각해 보게 된다.
‘46년 내가 경산 경찰서 초대 보안과장으로 있을 때이다. 그 지방에는 원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한양문 장군의 묘사가 있었는데 매년 단오에 지내던 묘사를 일제 때 강제 폐지당했다가 해방된 후 부활시키게 되었다. 마을 유지들은 그 해 단오를 맞아 집회 신고를 냈고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청은 일체의 민중집회를 금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북이나 징같은 풍물을 치는 행위에 대해서 엄격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니 담당 경찰로선 묘사가 큰 소란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만 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현장 책임자가 나였다.
당일 아침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한 장군의 묘소까지 오고 있었다. 나는 일단 풍물을 금지되어 있다고 말렸지만,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들은 다시 풍물을 치기 시작했다. 「임란 때 한 장군도 풍물을 쳐서 힘을 내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지금 풍물을 안 할 수 있느냐」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얘기였다. 나는 당황했다.
「어르신들, 계속 이러시면 제 목이 달아납니다.」
나는 인정에 호소하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좋습니다. 그럼 약속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딱 한 시간만 치시는 겁니다.」 순전히 현장 판단에 의해 내 멋대로 정한 조건이었지만, 그들도 좋아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풍물 소리가 요란한 것이 아닌가!
「아, 이 사람아, 이제야 좀 흥이 나는데······자넨 풍물도 안 놓아봤나?」 마을 사람들을 거기서 중단시키면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질 것 같았다. 나는 딱 30분만 더 연장시켜 주겠다 했고, 30분 후에는 다시 10분을 더 주어 마무리를 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엔 더 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서에 돌아온 나는 사후보고를 했다. 당시 서장은 젊은 사람이 상황 판단을 잘했다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내가 너무 이상론을 펴는지는 모르지만, 요즘 데모도 그렇게 적절한 선에서 자기 주장도 펴고, 경찰의 통제도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선 정도에서 그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내 생각에 6·25는 한마디로 김일성 정권과 이승만 정권의 싸움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동서냉전 체제가 38선을 만든 결정적 원인이 되었고 끝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까지 치르게 했기에, 누군가는 <강대국들의 대리 전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외적 요인은 어디까지나 외적 요인이요, 우리 민족 내부에 그것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으니, 결국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겠는가!
기업하는 것도 애국이다
아버지가 단신으로 훌쩍 도일하신 후의 그 궁핍했던 어린 시절, 삯바느질로 나와 내 여동생 봉필이를 키우시던 때의 어머니는 밤낮 없이 바느질거리를 잡고 앉아 계셨다. 하기야 그 시절 어느 집 여인네들이 바느질과 길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시절에 아버지를 도와 이른바 섬유 산업에 종사하였으니, 돌이켜보면 새삼 할 만한 일을 하긴 하였구나 싶기도 하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아들이 나는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53년도에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상륙시켰으니…세상에 태어나 정치가로서 또는 학자로서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사업가만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업에 관계하게 된 것은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해방직후 아버지는 일본인으로부터 대구의 한 직물공장을 인수받아 운영하셨는데, 경북기업이라는 이름의 그 공장은 한때 직기 60대를 놓고 뉴똥을 독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제헌의원 선거다 뭐다 해서 아버지는 거의 공장 일에 등한하셨고, 당시 경찰직에 있던 내가 저녁마다 출근해서 돌봐야 했다. 그러다가 전쟁도 끝나고 경찰직에서도 물러난 ‘53년 10월, 내가 사장을 맡고 본격적으로 덤벼들었다. 기술자들과 함께 고장난 직기를 들여다보며 궁리도 하고, 공원들과 밤샘 작업도 했다…그랬어도 전후의 불황을 타개하기른 쉽지 않았다.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 아버지는 제헌의회에서의 낙선에 상심하여 일본에 다시 가신 뒤로 돌아오지 않고 계셨다.
일제하에서 대학물까지 먹고 학도병까지 되었던 내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비로소 내 뜻대로 내 젊음을 불살랐던 경찰 생활과 특경대 활동…그러나 그 뒤 이어진 경북기업의 활동은 당시 혈기만만하던 내게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왕 사업을 하는 바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제조업을 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은 줄곧 해오던 차였다. 당시는 전쟁 뒤의 피폐함으로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이 마땅치 않는 시절이었으므로 의식주에 기여하는 사업이야말로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의생활에라도 기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헐벗은 우리 국민, 옷 좀 잘입고 살자’하는 생각이었다.
6.25가 터지기 1년 전, 도쿄에 자리를 잡으신 아버지는 재일교포들의 경제 단체인 재일한국인 경제동우회를 창립, 부회장직을 맡고 계셨다. 그러다가 ‘51년 일본 호양무역의 야마기시라는 사람과 합자하여 삼경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셨다. 앞으로 한일간의 교역이 활발해질 것을 예상하였던 것이다. 사실 나일론은 미국의 뒤퐁사가 ’35년에 처음 창제한 것이다. 일본에서도 ‘39년 비닐론이라는 합성섬유를 발명해 내긴 했었으나 ’51년, 도오요레이온이 미국 뒤퐁과 계약을 체결하고 나일론은 본격 생산하게 된 이후에는 일본 전체가 나일론 붐을 타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소비 패턴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신을 가진 아버지는 당장에 그것을 가지고 한국으로 건너오셨다. 그때가 1953년, 한국 최초의 나일론 상륙이자 의류 혁명의 새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리라. 대구의 한 호텔에 기자들을 잔뜩 불러 놓고, 나일론의 원료와 생산 과정, 특징을 장황히 설명하신 후에 앞으로는 화학섬유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찬란한 내일의 조망까지 역설하셨던 것이다. 「두고 보시오, 앞으로 우리 살림에서도 박바가지 대신에 플라스틱 바가지가 쓰일 겁니다.」
집 팔아 지킨 신용
삼경물산 서울 사무소와 개명상사의 대표로 전후 한일 무역의 선두를 달렸던 나의 생활…그러나 요즘 생각처럼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전화도 1주일에 한 번, 그것도 10분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못 다한 이야기나 세부사항 등은 편지로 주고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 온종일 일을 보러다니다가 밤 11시쯤 집에 돌아와서 그때부터 편지를 쓰곤 했다. 그즈음 내 아들 웅열이가 어디 가서 「너희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냐?」질문을 받고, 「편지 써서 돈 벌어요」했을 정도니 오죽했겠는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던 데다가 학창 시절에도 아버지의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던 나는, 마침내 그 아버지와 당당한 사업 파트너가 되어 밤낮으로 뛸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경쟁심까지 생겼다. 일본에 아사히 공예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온 원천 숙부님이 계시기는 했지만, 한국의 사무소를 책임지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기 때문에 더욱 뿌듯했다.
‘55년 8월8일 우리의 사업에 뜻하지 않은 위기가 닥쳐왔다. 일본과의 경제 단교가 선포된 것이다. 한일 회담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데 따른 이승만 정부의 단안이었다. 한국에서 수출할 인견사와 스프사를 산더미처럼 안고 있던 도쿄의 삼경물산은 당장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한 파운드당 80센트하던 실값이 수출선이 막히자마자 40%로 폭락해 버렸다. 한국의 수입상들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경제 단교 조처를 무시하고 일본 제품을 사들여 올 경우 엄청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국내 굴지의 무역상들은 줄줄이 주문 취소 통보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이미 주문했던 물량은 전량 취소하지 않으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판이었다. 나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께 이 문제를 상의했다.
「집을 팔아서라도 계약은 그대로 이행하라.」
부친의 답변은 다소 뜻밖이었다. 당시 삼성물산, 화신산업, 천우사 등도 모두 손들고 취소하는 판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바로 그렇게 때문에 이번이 삼경물산의 신용을 지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었다.
그때 삼경물산이 나일론 원사를 주문해 놓은 곳은 일본의 미쯔이였는데 그 주문량을 약속대로 모두 사들일 경우, 집을 팔아서대야 가까스로 그 손해액을 메울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아버지께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신용을 쌓을 기회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해방 이후 모처럼 분출된 내 젊음과 패기와 부끄러움 그리고 아버지의 바람과 조병옥 박사의 추억이 살아 있는 곳---그 진골목의 한옥을 팔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나올 때, 나는 사업가로서 최초의 비애를 맛보았던 것 같다. 잘될 때는 다 좋지만 잘못될 경우 순식간에 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업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일경제 단교 조치는 오래지 않아 풀렸다. 집 팔아서 지킨 신용 덕분에 우리는 미쯔이에 큰 신임을 얻어서, 삼경물산은 미쯔이의 대한 수출 창구로 지속적인 거래 확장을 하게 되었다.
한일 교역 재개 후, 빚을 갚아 가며 경비도 쓰고 당시 돈으로 한 달에 백만 환 정도씩은 저축할 수 있었으니, 그만하면 재미를 톡톡히 본 셈이었다. 장사엔 역시 신용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터득한 사례였다.
뽕밭을 밀고 나일론 공장을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대구시 신천동 수성천변 공장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조그만 건물이 있다. 그 뒤편에 있는 건물자리가 바로 한국합섬공업의 기수, 주식회사 코오롱의 발원지다. ‘57년까지만 해도 거기는 울창한 뽕나무 밭이었다. 57년 11월부터 시작된 스트레치나일론 공장의 설립은 이듬해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나일론 제품의 인기가 날로 치솟으면서 보들보들하게 해놓은 스트레치 나일론의 수입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일개 무역업자였던 우리 부자의 소득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러나 기왕이면 외화도 절약하고 우리 수입도 더 늘리는 게 좋지 않겠는가? 우리 독자적으로 스트레치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시작 당시 종업원 수는 30명 안팎, 조그마한 건물 한 동에 불과했던 그곳을 중심으로 한국 나일론주식회사는 그 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구미 공단에 드넓은 공장을 짓게 될 만큼 뻗어 나가게 되었다. ‘58년 10월 하순이었다. 1년에 걸쳐 작업 끝에 드디어 스트레치 공장이 첫 가동되었다. 시제품을 뽑아 내던 날, 우리는 모두 쓴 오이를 씹은 농부의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투자한 설비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났을 때의 공장주의 심정이 바로 그랬다. 그때 내 가슴속엔 솔직히 숙부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기계 도입, 공장 설계, 김 모 주주의 영입은 모두 숙부의 결정이었고, 그 결과가 결국 그렇게 드러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숙부에 대한 원망도 한 사람의 사업가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싶다. 당시 나는 전무로 있으면서, 숙부나 아버지보다 배움이 많았음에도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결국은 내 탓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최초의 스트레치 나일론에 실패했을 때에도 처음에는 저마다 남 탓만 하느라고 바빴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경우 책임 소재를 따지는 데 급급해 봐야 결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크게 본다면 기업과 정부간에도, 기업은 정부 탓을 하고 정부는 기업 탓으로 서로 미뤄 봐야 죽어가는 경제를 살리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물론 노사간에도 마찬가지다. ‘58년 10월 하순, 나일론 스트레치사의 시제품 실패로 문을 열자마자 도산의 위기를 맞았던 한국 나일론은 삼경물산에서 얻는 무역업의 흑자액으로 명맥만 간신히 유지해 갔다. 그러면서 차츰 재도전을 시도해 나간 결과, ’59년 1월 5일 스트레치 나일론사의 정상 생산에 성공했다. 그 후 30명으로 시작된 종업원이 500명으로 늘어날 때까지 나날이 발전해 갔다. 만약 시제품 실패에 낙망하고 서로를 탓하는 일에만 힘을 낭비했다면 결과는 뻔했을 것이다. 일단은 살아 남아서 다 함께 재도전해야 한다는 의지가 결국은 한국 나일론을 살렸던 것이다. 그때 더 이상 숙부나 또 다른 직원들을 탓하지 않고 참아 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64년 1월 1일, 한국 나일론 원사 공장은 가동을 시작했다. 생산된 나일론 원사는 <나일론 6>, 상품명은 코오롱KOLON---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의 합성어이다. 한국 나일론 주식회사의 제품이란 뜻도 되고, 그야말로 한국의 나일론이라는 자랑스런 뜻도 된다. 코오롱-바로 이때의 상품명에서부터 출발하여 그룹 코오롱이 탄생했던 것이다. 일반인들 생각엔 나일론 회사들이 과거 잠시 반짝햇다가 사라진 것 같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80년대 한때엔 심지어 정책 당국자까지도 「섬유산업이 사양 산업」이라는 당치도 않은 주장을 펴서 기업 당사자인 우리들을 곤혹스럽게 했었다. 그러나 합섬 분야의 시장성은 사회가 첨단화되고 다양화될수록 더욱 넓어져 간다고 나는 확신한다.
‘64년 1월 나일론6-KORON의 탄생은 그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끝없는 도약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만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나 개인이나 일개 기업의 역사가 아닌 우리 제조 산업 모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사업을 생업이라 한다면, 어느 정도 집안을 일으키고 자리를 잡았을 때는 가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단계를 넘어서서 직원도 여러 명 두고 수출입까지 하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기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일단 기업의 수준이 되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소비자가 그 물건을 사주고 그 상품을 아껴 주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으므로 의당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회사의 흥망성쇠가 직원과 그들 가족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니, 내 마음대로 운영할 수도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결국 기업가의 주된 사명은 운영을 자해서 이익을 많이 내는 데 있는 것이며, 이익금을 배당받아 주식의 소유지분이 늘어도 그 돈은 어차피 재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하루에 세 끼 밥,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면 족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아예 기업은 내 것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오히려 더 성취감을 얻는 쪽을 책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사십대가 넘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 나일론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두 가지 경영 방침을 사원들 앞에 약속했다. 첫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안정을 바탕으로 발전을 꾀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업자와의 공존공영, 품질 향상과 수요 증대를 통한 안정적 발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다. 71년 3월, 화학섬유의 총아로 일컬어지는 포리에스텔은 그전까지 외국에서 수입해 오던 것을 선경합섬이 먼저 생산을 시작했고 곧이어 우리가 합세한 것이었다. 폴리에스텔사가 나오면서 나일론사는 공업용, 폴리에스텔사는 의류용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아크릴, 폴리프로필렌 등 다양한 합성섬유들과 아세테이트사 같은 반합성섬유들이 등장하여 국내 합섬업계는 심각한 경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정경유착
코오롱 그룹은 정경유착을 통해 이득을 본 적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내겐 그런 일이 없었다. 그러 권력에 두들겨 맞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해 왓다고나 할까? 나는 웬만하면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편이지만 기업가는 모름지기 기업을 일으키는 일에만 최선을 다해야, 그것이 결국은 정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숙질간의 경영권 분쟁
‘57년 한국나일론 설립 당시, 숙부는 일본에서 자신이 따로 벌였던 사업이 망한 뒤 한국 나일론의 사장직에 추대되었다. 아버지께선 당초 삼경물산의 경우처럼 한국 나일론도 내게 맡기시려 했었지만, 삼촌이 조카 눈칫밥 먹게 되었느냐는 숙부의 말에 작정을 바꾸셨다. 그때 숙부는 내게 공장이 1일 2.5톤 생산할 정도까지 크면, 사장 자리를 도로 내주마고 했었다. 그런데 ’73년, 10톤으로 증설될 때까지 숙부는 그 자리를 고수하고 계셨다.
그 해에 엄청난 이익을 남기 우리는 ‘74년에 기업 공개 계획을 세우고, 언젠가는 어차피 자식들에게 양도하게 될 주식을 차제에 아예 양도해 버리고 법이 정한 증여세도 깨끗이 다 물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숙부 쪽에서 결국은 이 회사가 내 아들 웅렬의 차지가 되겠다 싶었는지, 당장에 회사를 쪼개서 각자 나누어 독립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나와 아버지는 한국 나일론 하나로 시작하여 하나 둘씩 늘려 온 그룹을 결코 쪼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내놓은 것이 한국 나일론을 공동농장처럼 보전해 두고 나머지를 각자 독립해서 운영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부는 완벽한 분배를 요구했다. 숙부의 불만스러운 마음을 고려해서, 내가 이제부터는 코오롱 상사만 전담하여 유통 부분만 맡겠다는 합의한을 제시했다. 마지막까지 회사를 깨지 않겠다는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형과 조카가 내가 다 만들어 놓은 회사를 거저 뺏으려 한다」며 숙부는 여론에 호소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숙부가 형님인 아버지를 고소하는 일까지 생겼다.
경영권 분쟁 자체를 가지고 고소한 것은 아니고,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 시절, 방위성금을 1억 원 낸다고 하고서 5천만 원만 내고 나머지 5천만 원은 회장인 이원만이가 떼먹었을 거라고 무고를 했던 것이다. 결재액은 1억원 인데 반해 신문에는 5천만 원만 났으니 그런 오해가 생겼을 만도 하지만 형제지간에 이미 지난 일을 갖고 고소까지 해놓았으니 얼마나 볼썽사나웠겠는가? 결국 나머지 5천만 원도 다른 루트를 통해 방위성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판명되고, 숙부는 그만큼 여론의 지탄을 받게 되고 말았다. 결국 숙부는 회사의 경영에서 손을 떼고 나가, 당신 지분의 주식을 은행에 맡기고 자금을 마련해 <원진 레이온>이라는 새 회사를 설립했다.
그때 부친과 내가 더 많이 양보해서 집안이 갈라지는 대신 기업을 쪼개는 편을 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숙부에 대한 회한이 더 커지는 요즘에 와서 생각해 봐도, 그때 아버지와 내가 한국나일론을 공동농장처럼 살려 두자는 주장을 꺾지 않았던 것이 옳았다 싶다. 왜냐하면 일단 그 정도로 성장해서 기업 공개를 해야할 규모가 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집안 사람들만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업이란, 우리가 키웠다고 우리 멋대로 쪼개고 나누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때 그 복잡한 분쟁의 와중에서 나는 평소에 즐기던 골프대신 낚시를 하게 되었다. 그때의 그 심정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 결국은 조카가 숙부의 세력을 완전히 퇴치해 버린 것이 아니냐는 결과론적인 평판이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그것이 그룹을 살리는 데에 도움이 된 것이라면, 나는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홀로 강 위에 앉아 낚시 드리우고 앉아 있을 때에 내 심정도, 숙부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보다 더 소중한 내 기업에 쏠려 있었다. 그것이 야심이었다고 해도 좋다. 나는 대체로 침착하고 온건한 편이다. 하지만 이거다 싶을 때 밀어붙이는 기업가로서의 근성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근성이 작용한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경총회장 10년
나라는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 방식, 경영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사람이 어떻게 경총회장을 하나?」 할 것이다. 남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편은 더더욱 아니니, 경총회장이난 자리는 나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려 10년간을 경총회장으로 일해 왔다. ‘82년, 처음으로 이 자리를 떠맡을 때 나 자신도 별로 원치 않던 것을 마지못해 맡은 것이었다.
내가 경총회장을 맡고 있던 지난 10년간, 우리 경제계엔 무역수지가 최초로 흑자를 기록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사건과 변화가 많았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수출장벽과 극심한 노사 분규 속에서 다시 곤두박질 친 우리 경제는 이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파란 많은 시기에 근로자 대표들과 협상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그야말로 온갖 놀쟁을 벌여야 하는 경총회장이란 자리는 결코 만만치 않은 참을성과 테크닉을 요구했다. 다행히도 나는 지금까지 「이동찬은 물러가라, 경총회장 각성하라!」는 소리까지는 듣지 않았다. 근로자들이 나를 봐준 것인지, 아니면 경총의 여러 회원 경영인들이 그만큼 잘 협조해 준 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요즘 외국 바이어들 사이에선 이런 얘기가 돈다고 한다. 「한국 상품은 품질도 그저 그런데, 값은 왜 이렇게 비싼가?」. 예전에는 「한국 상품이 일제처럼 그럴듯한데, 값은 꽤 싸네!」해서 많이들 사갔던 나라들이 이제는 우리 상품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해서 수출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이 나라가 지금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간 정말 곤란하다. 이제야말로 네 편 내 편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할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나는 50년간 해온 장사꾼 노릇과 10년간의 경총회장 경험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저력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꼭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섬유가 사양 산업이라니
5공화국 초기, 동남아를 볼아보고 온 당시 상공부 장예준 장관께서 그쪽의 노동력이 싸고 인력이 풍부한 이점을 말씀하시면서 상대적으로 「우리 섬유는 이제 사양 산업이다」했던 것이 섬유 사양론의 발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다. 그때 이미 노동집약적인 봉제분야가 동남아의 값싼 노동력을 찾아 옮겨 가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그러나 그렇게 공개적으로 사양 산업이라는 낙인을 찍어 놓고 나면, 사회적 인식이 굳어져서 발전의 가능성조차 간데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섬유산업연합회 회장으로서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우리는 매일 밤 11시 넘어까지 회의를 계속했다. 섬유는 결코 사양 산업이 아니며 적극 육성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산업이라는 사실을 , 우선 섬유 업계의 많은 종사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섬유산업연합회에서 펴내게 된 책이 ≪섬유 산업 재도약의 길≫이라는 제목의 섬유백서(纖維白書)였다. 섬유 산업이 점차 노동집약형에서 기술집약형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가까운 예가 바로 일본이다. 한동안 우리나라에게 일거리를 빼앗기고 분해 하던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고급화, 기계화의 길을 택했다.
예를 들면 <타프다>라고 하는 양복 안감 같은 것을 대량 규격품으로 개발하여 무인공장에서 양산해 내니까, 그만큼 원가가 절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디자인이나 컬러 매치도 컴퓨터화하고 새로운 소재를 계속해서 개발하나 결과, 지금은 섬유 분야에서도 실속이란 실속은 일본인들이 다 챙겨 가고 있는 실정이다. 안경을 닦는 특수천 하나만 하더라도 일본제의 수준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섬유는 노동집약적 산업이기 때문에 노동력의 절대 부족 현상과 고임금 시대를 맞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 이상 섬유 산업을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어리석은 단순논리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 가 못내 걱정스럽다.
나는 한때 경찰직에도 종사해 봤고, 아주 잠깐이지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었다. 하지만 의식주의 어느 한 부분일망정 내가 여러 이웃과 국민을 위해 도움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서 섬유 산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국가 경제의 발전과 함께 국민 생활 수준의 향상과 소비 생활의 다양화에도 우리 섬유산업이 기여해 왔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인류가 존속하는 한 이 섬유 산업은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잘먹고 잘 살게 될수록 의생활에 대한 다양한 욕구도 늘어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타잔이 아닌 바에야 옷은 입는다. 게다가 섬유는 의복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자동차 타이어나 수산업용 어망, 건축용 자재, 토목 공사·터널 공사용 자재로도 섬유는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다. 독일, 이태리, 일본,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가 아직도 세계의 섬유 대국들로 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섬유에서 손을 떼야 하느니 운운하는 것은 한때의 단순한 봉제 수준에서 만족하고 말겠다는 얘긴가?
‘84년에 내놓은 <섬유백서>속에 이러한 주장을 펴놓았다. 섬유 산업 육성책으로 섬유전문대를 만들자는 것과 각 도마다 하나씩 섬유연구소를 만들고 패션학교를 만들고 패션쇼도 재개하자고 주장했다. <피에르 가르뎅>이라는 친구가 상호만 팔아 버는 로열티가 한 해 2억 불 수준이어서 국가에서 훈장까지 주었다는 얘길 들었다. 한국에서도 <피에르 가르뎅>같은 브랜드가 나와야 한다.
대기업으로 가는 3대 위기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세 가지의 큰 위기를 맞게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내분이다. 창업공신과 경영주의 가족, 2세의 친척들이 일으키는 내분, 그리고는 둘째는 노사 분규이다. 처음엔 함께 열심히 일했지만 그 성과를 나누는 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이것도 하나의 홍역인 셈이다. 마지막이 세무 사찰. 사업상 여러 중소기업들과 상대해 본 경험에 의하면 지방의 중소기업 같은 경우, 세무공무원들이 사흘들이 한 번씩 들른다고 불평할 정도다. 일본의 경우, 한 중소기업이 성장하기까지 20녀 년을 정부는 자료만 모으면서 줄곧 지켜 본다. 그랬다가 이 정도면 됐다(지불 능력도 있고, 앞으로 계속 성장하겠다)싶을 때 그간 수집해 놓은 정확한 자료를 들이민다는 것이다. 대만의 경우도 세무사가 인정하는 금액만 자신 신고하게 할 뿐 세무공무원이 직접 업체를 드나드는 일은 없다고 한다. 물론 그들중에도 탈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대만 정부는 그것을 5퍼센트 정도로 추정하고,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중소기업이 가장 발달한 대만의 경우를 가까이서 보면서도 우리는 왜 쉽게 배우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아이들도 홍역을 거치고 감기를 치르면서 보다 더 튼튼하게 자라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홍역의 고자ᅟ겅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모님의 정성스런 강호와 보살핌이 있어야 아이들이 위기를 넘기듯이 중소기업의 홍역에도 정부와 국민 그리고 대기업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황영조와 1억원 그리고 한국 마라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했을 당시 나는 일본에서 아버지의 공장일을 도우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손 선수의 우승 소식은 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인들에게도 무한한 감격으로 다가왔었다. 어떻게나 감격스럽던지, 극장에 가서 뉴스 시간에 보여 주는 그 우승 장면을 보고 또 보며 눈물흘렸다. 해방 후, 우리의 손 선수와 서윤복 선수는 또다시 보스턴 올림픽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었다. 당당히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서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겐 마라톤을 잘할 수 있는 저력이 있다.
5공화국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마라톤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육성책이 없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나는 「만약에 10분대를 깨면, 상금 1억 원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우리 마라톤은 2시간 15분 벽도 못 넘고 있을 때였는데 내가 그렇게 발표를 하자, 기자들이 나름대로 첨가를 해서 「10분대를 깨면 1억원, 15분대를 깨면 5천만 원」이라고 기사를 썼다.
‘84년, 이홍렬 선수가 드디어 15분 벽을 뛰어넘었다. 나는 비록 내가 약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선수의 쾌거가 하도 대견스러워 5천만 원의 상금을 쾌히 내놓았다.
한데 지난 2월 2일,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리의 황영조 선수가 드디어 2시간 10분 벽을 넘었다. 코오롱 소속인 황영조 선수가 이번엔 2시간 08분 47초로 숙원의 10분 벽을 돌파한 것이었다.
때는 마침 설날 연휴 기간이어서 가족 친지와 함께 모여앉아 있던 우리 국민들 모두에게 황 선수의 쾌거는 좋은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일본에서 걸려온 정 감독의 전화를 받았는데, 오랫동안 남이 잘 알아주지도 않는 종목에 함께 투신해 오고 투자해 온 한 가족으로서 코오롱의 감회는 더욱 컸다. 나는 드디어 약속한 상금 1억 원을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은 내가 전부터 해오고 있는 일 중에 <코오롱 구간 마라톤 대회>가 있다. 이 대회는 다음 올림픽의 유망주를 가려내기 위해서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펼치는 구간 마라톤인데, 일본의 최우수 고교 선수들도 참가하고 있다. 시합은 각 학교의 교장선생님과 코치선생님이 학교에서 선발한 7명의 선수들과 함께 대구로 와서 치른다. 그리고 그 일행은 경주에 있는 코오롱호텔에 묵고 시합이 끝난 뒤에는 경주의 유적지 관광도 하게 된다. 이 모든 행사 비용은 우리 그룹이 부담하는 대신 성적이 좋은 선수를 우리가 우선 스카우트한다. 그렇게 선발해 키운 선수가 김완기, 황영조 선수들인 것이다.
장사꾼 눈으로 본 사회주의, 자본주의
소련이 망했다. 사회주의는 그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속성 네 가지를 무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첫째는 <자유>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개성 교육을 시킬 수만 있다면 본인이 정말 하고 싶어하는 분야를 맘껏 하도록 해서 각자의 재주를 살려 주어야 한다. 그래야 교육문제도 해결되고, 이 사회 역시 다양한 사회로 구성될 것이다.
둘째로 사회주의가 무시한 속성은 <이기>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를 위해 일한다. 확장해 봤자 제 가족을 위해 뛴다. 우리나라가 그나마 최근 40년간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것도, 나와 내 자식을 배불리 먹이고 옷 입히고 방 따로 쓰고 교육시키자는 소시민들의 원천적 욕심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소유욕>이다. 일제 때 학병에 갔더니 담배를 하루 여섯 가치씩 배급했다. 그 당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눈치챈 일본군들이 서로 달라고 하자 내가 피워 버렸다. 그렇잖아도 미운 놈들ㅇ니데담배일망정 내 것을 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좌우간 주기 아까워서 억지로 피우다 오늘에 이르렀다.
넷째로 <경쟁의식>의 쇠퇴를 꼽을 수 있겠다. 이길 필요가 없으니 경쟁심이 점차 없어질밖에. 나보고 기업 총수치고 평범한 성격이라고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경쟁심 하나는 남달랐던 것 같다. 어쨌든 사회주의는 빛을 잃었다. 이론과 관계없이 현실이 증명한다.
그럼, 자본주의는 어떤가? 이상형인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자극하고 활용했다는 상대적인 이점을 갖고 있을 뿐일 게다.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폐단은 <부익부 빈익빈>현상이다. 무엇이든 한 쪽으로 편재되면 불만이 생기는 건 정한 이치리라. 그럼? 덜 편재되도록 제도를 정해야 하고, 또 그 제도를 세웠으면 그대로 집행해야만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세금만 제대로 내면 된다. 있는 사람의 돈을 걷어서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장기적인 사회 발전을 위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간접투자를 제대로 실행하는 것---얼마나 분명한 얘기인가? 그게 조세 정책이다. 크게 세 가지 세금만 정확히 걷히면 좀더 나은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열심히 물건 만들어 팔아서 큰 소득을 올리면 누진적 <소득세>를 걷고, 누구에게 재산을 건네려면 <증여세>를 걷고, 죽을 때 넘기려면 <상속세>를 정확히 걷으면 된다. 제때 안 내려고 미적거리면 나중에 눈덩이처럼 커지고, 걷어야 할 자와 짜고 납부하지 않으면 더 지저분한 세상이 되지 않던가?
특히 증여세와 상속세는 불로소득이므로 더 잘 내야 한다. 회사가 커지면 주식회사가 되고, 주인도 주식 배당을 받게 마련이다. 창업주에서 3대째 정도 넘어가면 주인의 소유 지분이 저절로 희석되어 몇 퍼센트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자연히 그 기업은 종업원 전부의 것이랄 수도 있고, 이른바 국민 기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기업이 크기까지는 물론 소유주가 더 많이 피땀 흘렸겠지만 다수의 종업원들과 정부 정책 그리고 국민의 지원이 따르게 마련 아닌가? 그러므로 세금을 정확히 내고, 국민 기업화되어 가는 과정을 세월이 갈수록 국민이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요샛말로 가시화시켜야 한다. 가시화하지 않으면 재벌은 항상 욕먹게 되어 있다. 실제로 나는 금융실명제와 주력업종제를 적극 지지해 왔다. 그래야 불로소득이 없고, 각 기업이 특성화를 이룰 것이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결국 지도층의 철학이 문제이다. 언제 평범한 백성들이 이데올로기 찾았던가? 지도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공연히 피해들만 봤다. 우리는 리더를 잘 선택해야 하고, 또 평소에 키워야 한다.
작은 것에서 행복이
나는 사람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짜다」는 소리를 듣는다. 농구협회장을 할 때였는데 한 번은, 어느 경기에선가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자네들이 이번 시합에서 이기면 먹고 싶은 것 실컷 사주겠네.」 마침 우리가 시합에서 이겼고 그래서 나는 선수들을 태릉에 있는 갈비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내가 먼저 「갈비탕」하고 시켰던 것이 탈이었다. 나는 생각없이 갈비탕이 먹고 싶어서 시켰던 것이니데 선수단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회장인 내가 갈비탕을 시키자 그 이상을 시키기가 어려워진 그들은 결국 갈비를 못먹고 갈비탕이나 냉면으로 대충 때웠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듣고야 아차 싶었던 나는 미처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즈음부터 <짜장면 회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전에도 중국집에 함께 가서 짜장면을 먼저 시키는 바람에, 청요리 한 번 실컷 먹어 보나 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된 적이 있었다나!
하지만 짜장면 회장이면 또 어떤가? 나는 누가 뭐래도 절대 돈의 노예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돈을 아낄 줄 몰라서도 안 된다. 나는 돈을 올바로 벌고 제대로 쓰는 것이 우리 시대 기업가의 공동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기업의 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될지 모르지만, 기업가인 나 자신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행복지수가 될 수는 없다. 실제로 ‘내가 돈이 많기 때문에 행복한가’ 자문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돈이 많아서 편리한 점은 있다. 그러나 우선은 가정이 평화로운 것, 부부 금슬이 좋은 것, 자식이 두루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런 것들이야말로 개인적인 행복의 조건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좀 덜해졌지만 나는 양말은 하루에 한 번씩 벗어 놓고, 등산복은 몇 번 입어서 더러워졌다 싶어야 내놓는다. 옷들을 한 번밖에 안 입었는데 빨면 내가 가만있지 않기 때문에 집사람도 이젠 뭐라 하지 않는다. 속으로는 <고집불통>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생활의 이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내 나름의 절제와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감사와 자비의 정신을 잃지 않고 싶다. 세상엔 별별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이 사회를 좀더 평화롭고 윤택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나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자비심과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치자면 손등에는 감사를, 손바닥에는 자비를 동시에 품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요즘 사회에 팽배해 있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심리나 상대적 박탈감은 사라질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최근에 돌아가실 때까지 웬만한 희비사(喜悲事)에도 별 내색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고, 필요한 말 외에는 말씀도 별로 없으셨던 분이다. 충격적인 일 앞에서도 묵묵히 염주를 굴리시는 게 전부였고, 속상할 땐 담배를 태우시다가 긴 담뱃대를 재떨이에 탁탁 떠시는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처럼 한 집안에 소실들이 따로 둘씩이나 동거하는 꼴을 보신 분은 드물 것이다. 그런 경우 얼굴 표정 어디에도 싫은 기색이나 질투를 드러내지 않는 여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남편을 입 밖에 내어 탓하지 않음은 물론, 누가 그 남편을 흉보면 근엄한 표정으로 지아비를 감싸고 도는 지어미는 더욱.
어머니는 불심이 두터우셨다. 지금도 살아 계실 때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성북동 우리 집의 어머니 방에 있는 낡고 손때 묻은 묘법연화경-어머니는 그것을 천팔백 번은 읽으신 듯싶다. 절에도 물론 자주 다니셨는데 그 거동이 무척 조심스러우셨다. 내가 편히 모시려 해도 마다하시고 나 때문에 주지나 스님들이 각별히 모시려 들면 그 절엔 발을 끊으셨다. 보시도 평범한 아주머니 신도들과 똑같이 하셨지, 당신을 과시하지 않으셨다. 비록 학식은 없으나 난 그분의 심성을 좋아한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들 한다.
우리집 사람은 시어머니 덕 좀 봤다. 내가 재미없게도 평생을 모범생처럼 일관된 행동거지로 지내게 된 까닭은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남편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인고의 일생을 마치신 내 어머니의 처지를 보며 몇 번이고 다짐했던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몇 년 전까지, 환갑을 넘긴 내가 아침마다 요구르트를 들고 어머니 방에 가서 조간신문을 읽어드리곤 했다.
나의 첫 번째 외도
나는 아버지의 숱한 외도를 목격하며 거기에서 역설적인 교훈을 찾았다. 반평생 아버지 때문에 가슴을 앓고 사시던 어머니를 보면서 나만은 결코 아버지처럼 여자를 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고백하지만 나는 이 나이 먹도록 결코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판 적이 없다. 하기야 ‘50년대 중반, 삼경물산 서울 사무소의 사장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서울 생활을 할 때, 한때 친구들과 어울려 저녁마다 춤추러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곁눈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역시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을 본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내에게 「당신은 어머니께 감사해야 한다」고 큰소리친다. 아내도 그 점은 인정한다. 젊었을 때는 나도 보통 한국 남자들이 그렇듯이 집사람에게 큰소리치고, 사사건건 내가 이겨야만 속이 후련했다. 그런데 요사이에는 웬만하면 져준다. 내 생각에는 지위가 높아질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남편이 아내에게 져주게 마련이다 싶다. 요사이 젊은 부부들을 보면 우리 때보다 지혜로워져 그런지 아내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남편들이 많다. 그런 모습이 별로 흉하게 보이지 않는 까닭은 결국은 지는게 이기는 것이라는 진리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딱 한 번 외도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친구들과 가끔 들르던 어느 술집 마담이 자꾸 이 사나이의 자존심을 건드린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마담의 말이 「이 회장은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로라 하는 양반들의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아가씨를 불러내, 이른바 외도라는 걸 하고 그 대가로 돈을 넉넉히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저 다 함께 즐길 때만 왔다가 팁이라고 적당히 내놓고 가니, 그녀들 입장에선 별볼일 없는 손님이었던 것이다.
마담은 은근히 그런 사실을 알리면서 내게 덫을 걸어 왔다. 함께 다니는 친한 친구까지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래?」 하면서 나의 자존심을 긁었다. 그렇게 해서 나도 남들이 간다는 그 코스를 밟았다. 그런데 어찌 그리 한심하게 느껴지던지!…이후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을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사람 관계가 그런 식의 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외도는 씁쓸한 교훈만을 남겨 주었다.
내게 없는 것
명색이 재벌이면서도 이렇다 할 미술품이나 골동품 몇 점이없다. 또 하나, 재벌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부동산이랄 게 없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인들 중에는 부동산 투기 안 하고도 나름의 방법으로 정당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꽤 있다. 물론 부동산으로 해서 돈 번 이들도 많지만.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나도 잘만 됐으면 부동산 투기도 좀 해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땅하고 나하고는 도대체 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 덕분에 지금의 성북동 집을 마련한 일이다. 서울 시내와 가까우면서도 이만큼 공기가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복 받은 늙은이들이 아닌가 싶다. 이렇다 할 부동산도, 골동품도, 미술품도 없지만 나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갈까 한다.
즐기되 빠지진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한 수의 시로 읊지 못하고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누군가 했던 이 말이 재주 없는 나에게 위안을 준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에 흥미가 많았지만 음악, 미술, 문학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그것을 시로 옲거나 화폭에 담아 낼 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러다 나도 이젠 나 자신을 위해서 투자할 때가 됐다 싶어 나이 50에 미술선생을 한 분 초빙했다. 매주 한 번씩, 보통 때는 회장실 옆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정이 허락하면 산이나 들로 그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게 취미로 그린 경력이 어느새 10년째다. 선생은 늘 내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로 섬세하다고 지적한다. 내 그림은 도무지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인 것이다. 똑같은 풍경을 놓고 그려도 바로 곁에서 선생이 그린 것과 내가 그린 것은 내 눈에도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타고난 내 성격이 이성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때문일 게다. 나는 어떠한 것에도 깊이 빠지지 않는다. 그림 그리는 것 외에도 등산, 낚시, 바둑, 서예, 골프…등 취미는 무척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지나치게 깊이 빠져 본 적이 없다. 나는 자기 일이나 사업을 하는 데는 철저한 승부사의 기질이 필요하겠지만 취미 생활에 있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느그 껍질 집에 있나?
내가 어렸을 적 고향에서 살 때다. 집 앞에서 놀고 있으면, 어른들이 오시다가 나보고 「느그 껍질 집에 있나?」 하고 물으셨다. 아버지 계시냐는 말씀이다. 참 묘한 말이다. <껍질>이라. 부모는 역시 껍질이다. 자식을 낳고 길러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때까지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이 껍질의 의무이다. 껍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식이 성장한 뒤에 껍질은 기운이 다하고 얇아져서 그냥 껍질로만 남고 말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성장한 자식이 다시 두텁고 탄력 있는 껍질이 되어 자기 자손에게 훌륭한 울타리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한 세대의 삶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거쳐 오면서, 진정 이 사회에 필요한 인간이 되었는짖 또 자기 성취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필요한 인간이 못 되었거나 자기 성취 의욕 한번 변변히 불태워 보지 못한 채 남에게 못할 일만 많이 저질렀으면 죽을 때 고생한다.
아무리 잘났어도 경영주가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내가 응열에게 항상 이르는 말이 있다. 「항상 현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아. 네가 먼저 결정하지 말고 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들어라. 또 여러 중역들의 자문을 구하고나서 그 뒤에 판단해라. 지도자는 사람들이 따르도록 처신해야 한다. 제가 혼자 잘난 척하면, 주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맡기는 것도 용기다. 혼자 설치느니 직원들이 신나서 일하게 해라. 회장은 약해 보여도 실무자는 강해야 기업이 튼튼해진다.」
<껍질>한테서도 가슴 여미고 배워야 할 바가 있을 게다. 할아버지의 개척 정신과 추진력, 그리고 사업을 확장하며 코오롱 정신을 심으려 한 아버지의 노력도 찬찬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한테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아비에게 버림받다시피 하고도 그 지아비에 관한 험담을 막아내며 자식을 바르게 키우신 할머니, 그리고 그런 한을 품은 시어머니를 50년 가까이 모시면서 가화(家和)을 이룬 어머니의 정신과 기품을 배워야 한다. 집안 방 벽에 흔히들 귀여운 자식 사진들만 걸어 놓는데, 늙으신 부모 사진을 가운데 모셔 놓으면 어떨까 한다. 그것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역시 자기가 가정을 이루면 부모의 사진을 걸게 될 것이다. 그것이 교육이요, 그것이 가정교육의 뼈대이다. 잔소리가 필요없다.
회사도 한 개인의 능력으로 움직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경영인 한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회사의 전통과 제도가 그 기업을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경영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껍질>의 철학이 중요하다.
[출처] 1992년, 코오롱 이동찬 일흔살의 고백, 책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에서 발췌
자서전 이후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 등산으로부터 배운 이동찬 회장의 인생관이자 경영철학이다. “정상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오르다보면 어느덧 정상에 서게 되고 밀려오는 환희 속에 산정에서의 호연지기를 만끽했다. 그리고 호연지기의 마음을 하얀 화폭에 그려 넣으면 무한한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1996년 48년간의 경영 활동을 마감한 그는 현재 코오롱오운문화재단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살맛나는 세상’ 캠페인 사업을 하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힘쓰고 있다. 2003년 5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운가자비원에 27억 상당의 기금을 투하해 수유종합사회복지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올해 아흔 둘의 나이인 이동찬 회장은 은퇴 후 회사 경영과는 멀리 지내고 있다. 특히 노사 문제에 관한 한 아예 귀를 막으려 한다. 광복 직후나 지금이나 그렇게 해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극도로 말을 아끼는 그는 한 경제지 인터뷰에서 오늘날 노조 문제와 관련 “현대자동차에 악성 분규가 없었더라면 이미 도요타 자동차를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요즘 세상만사 잊고 바둑 두는 것과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1,2월은 강렬한 태양으로 새해의 희망을 그리고, 3, 4월이 되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온 산야를 뒤엎고 나비가 걱정 없이 세상을 나르는 풍경을 그린다. 5, 6월에는 짙은 녹원에 꽃 창포가 우뚝 솟은 모습을 그리고, 7, 8월 여름에는 폭포 아래 매미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그렸다. 9, 10월 가을엔 풍성한 결실을 맺은 농촌의 풍경을 그려 ‘2006년 코오롱 캘린더’에 작품을 기증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이유를 물어 올때면 “그저 마음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라며 그림이나 제대로 감상해 달라고 핀잔한다. 천성대로 고집스러우면서도 소박한 그의 노후생활이 그대로 담겨 있다.
[출처] 한국 섬유혁명의 정상 - 우정 이동찬 회장|작성자 프리덤월드
마지막 모습
2014. 11. 11일 코오롱그룹에 따르면 고인이 별세한 지 사흘째인 10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빈소를 찾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 일행 10여명과 함께 조문했다. 이 전 대통령은 “고 이동찬 회장님은 산업으로 보국하던 분”이라며 고인의 삶을 기렸다. 정·관계에서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 이수성·이홍구 전 국무총리, 박원순 서울시장,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재계에서는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그룹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GS그룹 회장), 한덕수 한국무역협회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강신호 동아쏘시오홀딩스 회장,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 등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효성 조현준 사장과 조현상 부사장은 전날에 이어 조문했다. 김창근 의장은 “경총회장으로서 한국 노사관계 선진화에 큰 역할을 하셨으며 재계의 존경을 받으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윤세영 SBS 명예회장 등 언론계 인사들도 빈소를 찾았다. 앞서 지난 9일에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빈소를 찾아 박근혜 대통령을 대신해 유족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 추모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한승수 전 국무총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등 정관계 인사들도 빈소를 찾았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효성 조현준 사장과 조현상 부사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김윤 삼양그룹 회장을 비롯해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이석채 전 KT 회장,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정성이 이노션 고문 등이 조문했다.
앞서 전국경제인연합회는 9일 추모 논평을 통해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현대화와 노사간 산업 평화를 선도해온 이동찬 명예회장의 별세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이 명예회장은 한국에서 나일론을 최초로 생산해 화학섬유산업의 기반을 다졌고, 국내 섬유산업이 수출산업으로 발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밝혔다.
이 명예회장은 노환으로 8일 오후 4시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96년 일선에서 은퇴한 후 복지사업 등에 전념해왔다. 이 명예회장은 1957년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나일론사(絲)를 생산하며 섬유산업 역사를 새로 쓰는 등 한국 섬유산업 발전을 선도해왔다. 가죽슬리퍼를 50년이나 신는 소탈한 모습으로 존경 받았으며 한국마라톤과 골프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고인은 고 신덕진 여사(2010년 작고)와 사이에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등 1남5녀를 뒀다.
장례는 코오롱그룹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2일 오전 5시, 장지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금릉공원묘원이다
[출처] 2014.11.11. 스포츠서울기사
이석현, 대한민국 2대 의원, 명치대 나와 안강살다가 6.25당시 서울에서 납북, 행불.
이인섭 경찰청장
경상북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 대통령 치안비서관초대, 서울지방경찰청장, 경찰청장.
오의정 14대손, 우헌공의 12세손, 도헌공의 5세손, 죽하공의 손으로 장당 즉 우각 2리에서 태어나셨고, 신광초등학교를 나와 경주중고 졸업후 대구에서 공부. 도헌정은 들판에 있던 서당을 현재 장소로 옮겨놓은 것이다. 지금은 논이 되어있다. 도헌공의 손자가 죽하정 할아버지다. 석송정은 도헌공 할아버지의 손자인 코오롱창업그룹 소유다. 죽하정은 세워진지 8, 90년 가량 되었다. 죽하정할아버지의 주손이 중앙여고교사 이진태선생이다.
무제(無題)
제(題) 一
한 때는 머릿속에 미래만 있었지 과거는 생각할 여지도, 자료도 없었는데, 좀 살았다고 이제는 미래는 언제 임무를 완수하느냐(자식등 혼사, 분가)만 있고 머릿속은 온통 과거의 회상과 과거의 상황과 현재의 비교(변화)로 꽉찬 것을 보면......글쎄 세월의 무상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제가 어렸을 때의 마을과 지금은 현격한 차이가 나지요.
앞산(안산이라고 불렸음)은 띄엄띄엄 무덤이 있고 땅에 달라붙은 잡목이 듬성 듬성 있는 넓은 공간으로 아이들의 활동무대였고 마을 뒤 큰 소나무 있는 뒷갓은 축구장이었어요.
높이의 차이, 그리고 무덤이 몇 기 있었으나 아쉬운 김에 축구장 역할을 했지 요. 그때의 놀이라야 공차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술래잡기......등 요즈음의 기계로 하는 오락과는 달랐고 움직이는, 자연의 품에 안겨서 즐기는 놀이였지요.
그런데 안산은 거의 대부분이 개간되었고, 뒷갓은 방치되어 잡풀·잡목·소나무 등으로 덮여있으니 허전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피할 수 없네요.
제(題) 二
우리 마을은 한때는 150~200호의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이농현상으로 지금은 빈집이 더 많은 현상이 되었네요.
그렇게 세월은 변화를 달고 다니는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에 이끌려다니는 것보다는 앞에서 효율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어떨런지요.
그 한 예로 매년 쉽게 하는 벼농사에서 좀 벗어나서 남이 하지 않고 판로가 예상되는 새로운 채소 과수를, 처음에는 시험 삼아 해보고 그중에서 토양, 환경(날씨등)에 가장 적합한 것을 골라서 재배하는 방법과 그 생산물을 가까운 도시인들에게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방안(특히 인터넷 판매가 아니더라도)은 없을는지요.
요즈음 도시의 소비자들은 믿을 수 있는 유기농상품이라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선호하는 경향이어서, 주말에 작농현황을 견학하게 하여(소풍 겸) 신뢰관계를 맺게 되면 도시의 아파트단지 또는 기업체와 직거래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간상인이 없어서 소비자나 생산자 모두 다 이익이 될 것이고 특히 소비자는 신선한 식품을 접하게 되어 더욱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재배하는 농작물도 남보다 앞서가며 계속 변화되어야 합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고향을 떠나 각자 나름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는 고마운 분들에게 미력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위와 같이 소비자와 고향의 생산자를 연결시켜주는 일이라 생각하는데, 우선 해결되어야할 문제는 소비자의 생산자에 대한 신뢰관계입니다.
그 신뢰관계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는 없고 조그마한 시작과 많은 시간이 보내어져야지요.
고향을 지키며 농업에 전념하시는 분들, 힘내세요.
그리고 항상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익숙한 이제까지의 생활방식, 생산방식에 대해서조차 말입니다.
2016.10 포항시 북구 용흥동 이동권
약력) 신광초·중등학교, 경북대사대부설고등학교, 고려대학교법과대학, 사법시험합격, 창원·대구지방법원 판사, 변호사개업(대구→포항)
우각... 유년의 고향
내가 태어난 곳, 우각동 79번지, 건너골 입구 남쪽 산밑, 지금은 대나무 밭이 되어 있더라
세 살때 부모님 등에 엎혀 피난 갔다왔을 땐 전쟁 폭격 맞아 불타버린 집
그곳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다듬이돌
반쪽이 동그랗게 움푹 파인 그 다듬이 돌을 오랜 세월 버리지 못하고 이사할 때 마다 갖고 다니시던 부모님
그 집터엔 키 큰 감나무 두어 그루 있었고
가을이면 나무위에 올라가서 감을 땄었지
그리고 유년 시절 살았던 새장터 766번지
집 앞에는 이른 봄엔 미나리, 여름엔 왕골을 키우던 논이 있었고
그 논 머리에 있던 우물은 새장터 집집마다 물동이로 물을 날라 먹은 식수원이었지
동내 아래쪽을 새장터, 위쪽은 뒷각단, 뒷각단 남쪽 골은 안골, 그 넘어 불타버린 옛 우리집터 안쪽은 건넌골이라 불렀지,
동네 앞 동산은 안산
안산에는 밤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고 평평한 잔디밭은 우리들의 씨름터가 되기도 했고
그 밤나무엔 봄부터 가을까지는 몇몇 집에서 낮에는 소를 내다 매 놓았고
아이들은 학교 갔다 돌아오면 그 소를 이끌고 풀 먹이러 다니고
여름 방학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오전에 소를 몰고 뒷각단을 거쳐서 동네 동쪽 묵밭을 지나
바굴통, 이시밭골, 시시밭골 등 산골자기로 풀을 맘껏 먹으라고 올려 보내고 오후에는 소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 다녔지
그때 동네 같이 자랐던 우리 동무들
새해 설날에는 다들 동네 어른들께 종일 세배하러 다녔고
정원 대보름날엔 커다란 박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찰밥 얻어와서 해가 질녁에 새장터 어느집 동쪽으로 머리를 둔 디딜 방아간에서 그 밥 나눠먹었던 추억
이월 초하루에는 집집마다 연등제를 지냈고 아이들은 연을 만들어 안산에서 날리며 놀았지
연초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짚으로 팔 둑 만한 굵은 줄을 만들어 마을 앞길에 펼쳐놓고
위, 아랫동네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한 기억도 있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 인가? 동 회관 방에 글 모르는 아주머니 아가씨를 모아놓고 한글도 잠시 가르쳤던 기억이 나고
우리 아버지는 새장터 개울가 공터에 두, 세평 가까이 되는 삼굿을 만들어서 동네사람들 재배한 삼나무를 삶아주고 삯을 받기도 했는데
한글을 완전 배우지 못하신 아버지는 삼 삶아 준 삯을 외상으로 하여 공책에 서툰 글씨로 적어 두시고 가을까지 나를 앞장 세워 돈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어
논, 밭 몇 마지기 농사지어 자식 키우시던 부모님 도와 드리느라 공부 보다는 농사일 돕는게 우선이었지
우리 엄마 길쌈 솜씨도 좋아서 손수 짠 삼배로 우리집 일 도와주던 일꾼 적삼과 바지를 손수 만들어 주었을때 그렇데 좋아하고 고마워 하던 그 친구
몇 년 전 시내에 산다고 기별이 와서 울 엄마 안부 물으며 옛 추억을 나누었는데.. 이제는 초로의 할아버지가 되어 가겠지
그때 우리 집이나 어느 집이나 동네 몇 집을 제외하고는 전부 초가집이었지
가을 추수가 끝나면 초가지붕 이을 새끼를 이웃집과 품앗이로 하루 저녁씩 꼬곤 했는데
중학생이었던 나도 허리도 아프고 눈도 감길 정도로 밤늦게 까지 함께 새끼를 꼬았고
지붕에 덮을 이엉과 용마루는 어른들이 다 만들었지
겨울이면 논에 물이 있는 곳이나 개울이 얼면 그곳에서 썰매를 타고 나무판자를 구하여 발바닥 모양으로 자르고 바닥에는 앞에서 뒤로 철사를 박고 좌우로 못을 쳐서 고무줄을 매어 스케이트를 만들어 타기도 했지
지금은 소나무 울창하게 커버린 뒤갓에는 그땐 나무도 없고 비탈진 넓은 공터여서 우리 동무들의 축구장이었지
새끼줄을 칭칭감아 공을 만들어 공을 차기도 하고 어느 누가 고무공을 가지고 오면 모두가 축구 선수들이었어
아침 식전 일 하시느라 아침밥을 늦게 해주시는 집안 형편 때문에 아침먹고 책가방 메고 십리길 학교를 매일 뛰어가다시피 해도 지각을 많이 하여 중학교 일학년 때는 지각한 날이 삼십일도 넘었지
그때는 우리 동네가 학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내가 대구로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 아버지는 신작로 가에 위치한 아랫동네인 장당으로 이사를 하셨어
그 후 내가 살던 우리집 766번지는 다른 사람에게 팔았고 지금 찾아가보면 그집은 찌그러지고 마당은 대나무밭으로 변해 버렸더라
구름도 울고 넘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다던
1966년에 오기택이 부른 고향무정이 바로 내 고향이 아니던가
찾아가보면 옛 살던 친구네 집들 없어진 곳이 태반이고 그때 그 어른들 다 저 세상으로 이사 가시고 타향으로 나간 친구들 별로 찾는 이 없으니
이런 걸 두고 옛 사람은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고 했던가,
인생무상이로다
칠순을 한 해 앞두고 옛 고향을 그리며 愚耕 李東潤
약력)
농고를 나와 농촌진흥공무원으로 40여년 근무하며, 주경야독으로 농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으며, 농촌지도관(4급)으로 정년퇴직하고 귀향하여, 2011년부터 여강이씨 오의문회 총무일을 맡아 일을 하고 있음
대한민국 농업과학기술상, 녹조근정훈장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