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 삶 2

by 이순미

8. 이영자. 8.24. 오전

73세(44년생)

아들 하나, 딸 둘 두었다. 나는 일본에서 났다. 엄마가 8살 많은 오빠와 나를 낳고 병을 얻어 돌아가고, 두 남매 데리고 아버지가 내 젖봉지 가지고 귀향했다 한다. 초등 1년 때 6.25 난리가 났다. 신광초등학교 폭격 맞아 불에 탔다. 엄마는 19살에 재혼으로 아버지한테 시집왔는데, 우리 남매가 엄마한테 괄세 많이 받았다. 동생들 5남매 태어나자 나는 동생들 보라고 며칠도, 1주일도 때로는 한 달도 학교를 안 보냈다. 부친은 나를 귀히 여기셨다. 3학년에 다시 올려보내 주셨는데, 결국 3학년 다니고 못 다녔다. 9살 때까지 토성에 살았다. 9살 때 거랑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엄마가 나를 내보냈다. 요강 비우고, 걸레 빨아오라고.


우물에 물 길러 보내서 담아 오면, 가득 담아 오라고 시켜서, 다음에 가서 엄마 말대로 가득 담아 이는데, 허리가 뒤로 꺾여 넘어갔다. 추운데 홑치마 입고 학교 갔는데, 너무 추워서 오금이 붙어 일어나지를 못하니 선생님들이 나를 교무실에 안고 가서 녹여준 적도 있다. 학교 가려고 하면, 설거지해놓고 가라고 했다. 또, 엄마가 어디 갔다가 동네 들어오면서 ‘아무것이야’ 부르면,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엄마가 하도 맘대로 하고 우왁을 지기니, 나는 기가 죽어지냈다. 평화댁 큰엄마가 나를 많이 거두었다. 맛있는 것 먹을 때가 있어도 횟배가 자주 아파서 잘 먹지도 못하고, 몸이 약해 빠졌었다.


아버지는 한 번씩 기센 엄마를 잡았지만, 개도 잡아 먹이고 엄마한테 잘했다. 이안어른이 면장을 하셨는데, 부친과 친구로 지냈다. 부친도 책 보고 공부하다가 나락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는 옛 선비스타일이었다. 동네 제문, 축문도 쓰셨고, 날 받아주기도 하셨다. 청년들 글 배우러 왔고, 부친은 나 보고도 글을 가르치셨다. 부친은 이안어른댁에 가서 지냈고, 안 가면 그 댁에서 불러서도 갔다. 술고래가 돼서 집에 돌아오셨다. 엄마가 내 16살 때 나를 포항 사는 자기 사촌언니집에 보냈다.


19살에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 나는 조밥 먹기 싫으니 산골에는 시집보내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나를 죽장에 시집보냈다. 신랑은 나보다 7살 많았는데, 사람은 좋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5형제 중 넷째였다. 아버지가 딸 시집 데리고 가서 천정 쳐다보신다더니, 우리 부친이 그러셨다. 나도 아무 철이 없었다. 시집은 식구가 13명이었다. 감자도 맏동서가 삶아 솥이 절먹하도록 삶았다. 여자들은 정지에서 밥을 먹었는데, 질녀들 3명에 양푼에다 밥 푸고 맏동서가 돌나물 뜯어온 것 담고 거기다 시금장 넣어 비벼 먹는데, 처음에는 못 먹겠더니만, 동서가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해서 먹게 되었다.


그리 3년 살고, 과수원이 많은 시삼촌 기계 사방 과수원에 가서 몇 년 살고, 다시 죽장 큰집 근처에서 살다가 흥해 가서 신랑이 과수원관리를 하고 살았다. 여기서 애들 초등학교 다니고 밥 먹고 살았다. 흥해 한신 통조림공장도 있었고, 사료공장은 용천에 있었는데, 모래땅이었고, 고기를 쌓아놓기도 했다. 과수원 우물에서 점차 썩은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어느 방학 내 나이 38살에 아저씨가 우물 치러 들어갔다가 가스중독으로 돌아가셨다. 맏이는 고등학생이었다. 애들 데리고 먹고살아야 하니, 여자용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해서 화장품을 싣고 다니며 팔았다. 때로는 울퉁불퉁한 길에서 자전거 타다가 곤두박이칠 치기도 했다. 아들은 공부도 그림도 잘했다. 둘째 딸은 꾸준히 공부를 잘했고 회장도 하고 했다. 이 딸은 결혼하고 나서 대학공부를 했다. 아들이 처음에는 제철에 들어갔는데 교통사고 나서 골탕이 들었다. 직장에 들어가서 진득하게 배겨내지를 못한다.


우각에 다시 들어온 것이 10년도 넘었다. 엄마가 나한테 다시 큰소리로 야단을 치며 우왁을 지키는데, "엄마 내 얼라 아니고, 그런 소리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니 다음부터는 말을 안 하시더라. 아들이 모셔갔다가 요즘은 딸 집에 가서 잘 지내신단다. 이제 나는 큰딸이 옆에 와서 사니 내가 편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많이 받는다. 먹을 것도 챙겨주고, 밥도 딸사위가 함께 먹자는 걸 내가 마다한다. 서로 불편하니까.

몸이 하도 약하고 아프고 해서 예전부터 수시로 한의학과 한약등을 공부해 왔고, 보건식의처방사자격을 취득했기 때문에 한약건재상도 할 수 있고, 십전대보탕이나 기타 보조식품도 제조하여 판매할 수 있다. 북부시장에 건강원가게가 있어 몸만 안 아프면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쓰는데, 몸이 아프니 힘을 쓸 수가 없다. 작년에 허리수술을 했는데, 아직도 온전하지 않다. 골격이 자꾸 틀어져서 스스로 돌리는데, 자꾸 틀어진다. 차는 둘째 딸네 타던 것 받아 타고 있다.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해서 편히 살아라. 노후대책도 마련하고. 딸들은 나름 잘 살고 있고, 아들이 걱정이다.


9. 김용복(63)/조성례(57) 8.24.

딸 자매를 두었다. 종교는 없다.

우각에 터를 잡게 된 것은, 땅이 부른 것 같다. 시골생활하려고 16년 전부터 땅을 보러 다녔는데, 2009년도 지금 터 앞 냉수에 터가 있었는데, 너무 비싸게 불렀다. 며칠 뒤, 지금 터를 남편이 계약했는데, 여러 가지로 마음에 들었다. 2010년도에 농가창고로 신고하고 쉼터로 허가를 받았다. 여기 사는 데 이웃이 다 좋다. 이무원 씨, 이채술씨.


그동안은 외따른 집이라 동네 방송도 거의 안 들리고, 소식을 거의 못 들었다. 마을행사참석은 올해 처음했다. 나이 층층이 있는 게 좋고, 그간 나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는데, 나 자신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아,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것 같아 좋다. 지금 마을 생활에 100% 만족한다.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젊은 사람들이 좀 더 들어오면 좋겠다. 애들이 마을에서 뛰어다니면 좋겠다. 시내에서도 주택에서 살았다. 아파트는 답답해서 살 생각을 안 했다. 올해 마을에 출입하면서, 더 재미있어졌다.


올해 건강보험공단 북부지사에서 기체조선생님을 우리 마을에 파견해 주셔서 현재 주 3회 기체조시간을 마을회관에서 진행 중이다. 성례 씨가 마을자체강사양성에 자원해서 기체조시간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마을아지매들과 함께 운동하니 서로 가까워지고 정이 든다.


10. 이일원(78)/최분순(79) 8.26.

두 분 사이에 4녀 1남을 두었다.

아저씨는 지금 장섭 씨 사는 그 집에서 태어났고 누나, 여동생, 3남매. 아지매는 일본 고리야마에서 태어나 6.25 지나고 한국에 들어왔고 8남매 중 여섯째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짚더미 위에서 떨어진 후 귀가 어두워졌다. 아지매는 당내(지금 흥곡 실버요양원 있는 그 동네), 엎어지면 코 닿을 데서 21살에 가마 타고 이 집으로 시집왔다. 음력 동짓달에 시집오니, 안어른이 아프셔서 죽 쒀드리고 대소변 받아내고 하다가 이듬해 음력 2월에 돌아가셨으니, 정도 안 든 상태로 가셨다. 시어른이 조실부모하고 4 형제 중 막내여서 여기저기 셋방 살다가 이 집을 59 아님 60세에 마련하셨고 환갑 하시고 그 이듬해 며느리로 나를 보셨다. 시부가 77살에 돌아가심.


결혼해서 딸 둘 낳고 아저씨가 25살에 군대 갔다. 지금 같으면 군대 안 갈 텐데, 그때는 갔다. 군대 갔다 오니, 딸들이 무서워서 도망갔다. 아들 놓을 때까지 호롱불 밑에 살았다. 두 딸은 57, 56살 연년생인데 학교 공부를 못 시켰다. 부잣집 말고는 마을집이 거반 초가집이었다. 초가지붕을 집집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 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때 스레트 기와로 바꾸어주었다. 빈대도 있었다. 숭년지던 때는 논 5마지기에서 쌀 1 가마니가 안 나왔다. 보리죽 쒀먹고살았다. 지금은 가뭄 들어도 물도 퍼올리고 세월이 좋아졌다. 동네 물은 봉계댁 앞에 우물에서 길러먹었다. 길도 대나무사이로 좁은 길로 물동이이고 다녔다. 마을에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


언제 재미있으셨어요?

재미있었던 적이 없다. 95년도에 이 집 지었는데, 논에 모내기는 해야제, 집 올라가는 것도 봐야지, 바빠서 좋은 줄도 몰랐다. 이 집 먼저 짓고, 다음에 사랑채 지었다. 2003년 마을회관 짓기 전에는 우리 사랑채가 마을회관이었다. 동네 남자들, 여자들 다 와서 모여 놀았다. 화투가 4판 열린 적도 있다. 포항서 물가자미 한 다라이 사다가 회 해 먹고, 도산댁 쑤어놓은 묵도 다라이 째 갖다 다 먹고, 우리 집에 술은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그때 참 재미있었다. 봉계댁 아지매 환갑할 때 동네 사람들 많이 올라가서 북두드리고 춤추고 놀았다.

옆집은 10년도 더 전에 포항시내 사람이 샀는데, 마지막으로 2007년도에 오고는 소식이 무소식이다.


우각 동네가 잘 되면 좋겠는데, 사람이 죽고, 나가고, 특히, 남자가 없다. 선미엄마는 우리 딸이 중신해서 잘 산다. 사람이 착하다.


마을회관에는 왜 안 나오세요?

아저씨가 밭에 일하고 돌아오면 밥 챙겨야제, 빨래도 몇 번씩 할 때도 있고, 회관에 놀러 갈 여가가 없다. 영감 없고, 농사 없는 사람들이 놀러 나가는 거지, 나는 애들도 자주 오고 하니, 나갈 여가가 없다. 아들 장가를 못 보내니 또 못 나간다.


아저씨가 나보고, “그 술이 독하고 대단티다”(올 어버이날 기념 마을잔치에 삼양주를 빚어냈다)

“아, 술약 안 넣고, 누룩만 가지고 쌀·찹쌀 합쳐 10킬로 들어가고요, 한 달 걸려서 만드니까 그렇게 독하네요”


11. 중성댁 이순남(85) 8.28.

상옥에서 컸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일제 때 오빠는 일해야 하니 학교 못 갔다. 학교를 다니고, 일본국가라도 불러야 배급을 받을 수 있어서 나를 학교 보냈다. 해방되고 나서부터 학교를 못 갔다.


6.25 이듬해 20살에 가마 타고 시집왔다. 지금 마을회관 주차장에 고방이 있었다, 그 고방을 사촌시동생과 맡아서 하게 되었고 논 3마지기, 밭 5마지기 타고 살림을 났다. 마을이 새장터와 안 골새 두 패로 나뉘어 매년 줄다리기를 했다. 지금 인하댁을 기준으로 해서 마을안쪽이 안골새, 바깥쪽이 새장터였다. 안골새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얘기가 있었다. 줄다리기 끝나면 머슴들이 줄을 썰어 안골새 반 새장터 반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다. 큰집은 동부댁인데, 지금 오목사님 벌통 놓인 그 자리였다. 엉구자리(새어 나오는 물)가 학림댁이 부치는 밭 근처에 있었는데, 물이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콩나물시루 몇 개 앉혀놓고, 오는 사람들이 물 주고 저녁에 뽑아다 반찬 해 먹고 그랬다. 도토리도 빻아가 자리에 담아 도랑에 담가 놓았다. 거랑이 길이었다. 돌다리로 다니며 물 길어다 썼다.


그때는 제사 때 아니면 이웃마실을 못 갔다. 안골새 종손집이 저 안쪽이라, 섣달그믐에 구세배 드리러 천의(남색치마에 안은 빨간색이고 동정도 달고) 쓰고 갔다. 위패마다 큰 절하고 종손 보고 왔다. 시집와 3년 만에 종갓집 아래채에 불이 나서 옛날책 다 태웠다. 나중에 큰 채가 다시 불났다. 그때는 마을회관도 방송도 없던 때라 동사지기(소사)가 안산에 올라가, 종갓집에 불났으니 마을사람들 불 끄러 오라고 목청껏 욌다. 4대 봉제사를 지냈는데, 우리 대소가에 주손은 야동댁이었다. 야동댁 시집오고 나서, 3대만 놔두고 철천 했다. 갓탕관 쓰고 제사 지냈는데, 철천 하고 위패 태우고 나서 4형제가 제사를 갈라 지냈다.


영감이 젊어서 나한테 '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시숙이 듣고 불러다가 야단을 쳤다. "어디서 댁한테 니라고 말하냐, 동생이가?" 그 뒤로는 절대는 니라고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고 불렀다. 우리 시아버님 형제가 4형제였는데, 아버님 빼고 나머지 형제가 상처를 해서 장가를 2번, 3번 들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시집온 지 8년 만에 강원도로 갔다. 당시에 강원도에 이 동네사람들 돈 벌러 많이 왔었다. 강원도 태백산 못 가 통리.


지차 셋째였지만, 나름대로 시부모님 봉양을 했다. 아버님 64세, 어머님 67세에 돌아가셨다. 아버님 위암이셨는데, 3월에 강원도 우리한테 오셔서 6월 말에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동안 매일 약을 다려드렸는데, 숯 14포를 썼다. 흙풍로에다 다려드렸는데, 단칸방에 애들 다섯 데리고 어른 모셨다. 어머니는 내가 용띠 막내를 낳으려니, 구례 해주시려고 강원도에 오시려고 경주 오셨다가 쇠고깃국 먹고 하혈하시면서 자궁암이 되셨다. 3월에서 6월까지 모셨는데, 6월에 다시 마을로 돌아오시고 동짓달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영감은 회사 총무일도 하고 하다가 간이 안 좋아 세상 버렸다. 그때 내가 쉬흔아홉이고, 큰아이는 취성 시켰다. 사람이 일평생 사는 것 말로 다 못한다. 영감 장사를 이곳 고향에 와서 치르고 삼우제까지 지내고 강원도로 다시 갔다. 영감 보내고, 자식 둘 앞세울 때보다 애들 꼬물거릴 때 배고픈 것처럼 서러운 일 없었다. 통리산에서 도계까지 열무 밤새 시들지 않게 물 주고 50단을 이고 내려가 팔았다. 이틀 굶으니 애들 다섯이 방에 늘어져 누웠다. 먹을 것이 다 떨어졌는데, 영감친구가 국수 1 상자, 쌀 2되, 보리쌀 5되를 가져다주는데, 눈물이 콱 쏟아지더라.


남의 밭일해주면 하루 6,000원 받는데, 산에 약초 캐면 10,000원은 벌었다. 산에 약초 캐는 일을 20년 했다. 사촌시동생이 ‘형수요, 누가 학력 묻거들랑 태백 약대 나왔다 카소’. 영감죽고 4년 뒤 큰 아들내외가 안양에 돈 벌러 가니, 손자 셋을 강원도서 키웠다. 다음에는 서울 가서 8년 있다가 칠 신(칠순)해줘 먹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금 대나무숲 앞에 버섯 하던 헛간 안에 작은 방을 고쳐 3년 살았다. 타지에 가서 잘 돼 갖고 온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이 고향으로 왜 오냐는 이도 있었다. 돈 벌어서 우리 엄마 집 지어드려야 한다던 아들이 일하다 먼저 갔다. 그 보상금 나와 애들 나눠주고 이 집 지었다. 지금도 집에 있다가도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다. 씨라도 남겼으면 좀 나았을 텐데.


자손들한테 남기고 싶은 말씀은요?

내 수의도 다 해놓았고, 상주들 입을 옷도 다 해 놨다. 내 죽거든 느이 아버지 파서 함께 화장해서 그 재는 웅이 사촌시동생묘 근처에 뿌려라. 아니면 수목장을 하던가.


마을회관에서 아주머니가 음식물쓰레기도 갖다 내고, 청소도 제일 부지런히 많이 하시던데, 전체를 살피는 마음이 아지매가 제일 많으신 것 같아요.

더러운 거를 못 보겠으니까 그냥 하는 거지. 요즘 두 명이 1주일씩 청소당번하기로 정했다 하대. 그런데, 맥주 먹으면, 먹은 사람이 바로 재활용하는 데다 꼽아놓으면 되는데, 왜 그걸 회관 한쪽에 밀어두나 몰라.

저도 이번에 8.15 잔치하고 상품 돼지 받아다 먹으면 되지, 왜 돼지를 미리 사서 돈을 많이 쓰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근데, 돼지 한 마리 사기로 한 것은 마을회의에서 결정한 일이거든요. 아지매들도 뭔가 일처리가 잘못됐다고 느끼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마을회의에서 의견을 내시면 좋겠어요.


2023년에 돌아가심. 돌아가셔서 아쉽다. 좋아하는 아지매였다.



12. 감로사. 8.29

손진욱 지관스님(68)/보살 최두리(55)

스님은 죽장 미제, 보살님은 경남 고성 출신. 지관스님은 팔공산 토굴스님으로 미륵부처 앞에서 2년 기도하고 득도하심. 원래는 수곡댁 앞에 점 잘 보는 보살님이 계셨다가 마을에서 밀려나 이곳에 자리 잡았고, 그 뒤로 스님이 세 번 갈렸다. 감로사란 이름은 절 뒤로 천곡사 물줄기로 감로수가 흐른다 하여 감로사로 불렸다. 지금 절 뒤에 우각동네물이었던 옹달샘이 있었다. 1980년대 말 스님이 이곳에 처음 와서 보니 오막살이절이었다. 하지만 건강에 도움이 되겠고 기도처는 되겠다고 보았다. 그때는 소나무가 키가 나지막했다. 30년이 되니 이렇게 울창해졌다. 마을주민으로서 정착하는 과정에 초기에 텃세를 좀 겪은 셈이다.


전이장 집에서 절까지 오는 길이 경운기 다니던 길이었는데, 차 다니는 길로 만들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협조도 해주고 해서 이만큼 나아졌다. 대웅전 지을 때 자재를 경운기로 실어 날랐다. 들어와서 3년 만에 대웅전을 지었다. 당시 49재가 많이 들어왔다.


보람 있는 일은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절을 이만큼 넓히고 반듯하게 키운 것이다.

처음에 텃밭이 있던 곳은 지금 연못이고, 초가집은 공양간으로 바뀌었다. 산신이 센 삼태산이라 사업번창과 잉태를 원하는 사람들이 산신각 기도하러 많이 온다.


바라는 바는 동네 안의 골목길에 나뭇가지들이 나와 차가 긁히기도 하는데 나뭇가지를 정리해 주면 좋겠고, 골목길이 차 한 대 다니기에도 비좁은 데, 차가 편안하게 다닐 만큼 개선되면 참 좋겠다. 우리도 마을주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또, 젊은이들이 마을에 많이 들어오면 좋겠다. 30대 40대들이 농촌에 들어오면 돈이 없다고 해도, 본인들이 부지런하고 정보를 잘 활용하면 같은 노력으로 도시보다 잘 살 수 있다.


13. 상읍댁 김미순(69) 9.2. 집

고향은 상읍, 종교는 남녀호랭교.

24살 때 시집왔는데, 산 만당에 큰집이 있었다. 신랑은 기성댁 일꾼으로 일하고 있었다. 딸 셋을 낳았다. 큰 아이 5살 때 추풍령 이원달 씨 농장에서 약 1년간 일하다가 안강 와서 5년 살고, 다시 이 동네로 들어왔다. 처음에 밭 몇 마지기 있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남의 밭 빌려 농사짓는다. 이 구적에 가도 풀, 저 구적에 가도 풀, 여기 집적거리다가 저기 집적거리니 밭은 안 깨끗하다. 막내딸은 마라 일 자꾸 하나? 하지만, 일도 습관이 돼서 계속한다. 계속 밭에 간다.


오늘 비가 오니까, 아지매 밭에 안 가실 테니까 아지매 얘기 들으러 왔어요.

영감 돌아가고 나니, 여름에는 새벽 5시에 밭에 나가 일하다 보면 9시고, 낮에 쉬다가 저녁에는 오후 5시에 밭에 나가 어두워지면 돌아온다. 남자 없으니 밥 해주랴, 빨래해 주랴 신경 안 써서 일을 더 한다. 남의 밭 부쳐 콩 심고, 콩이파리 따서 팔고, 고추농사 지어 팔고, 콩 40되고 50되고 장작불 때서 메주 쑤어 판다. 작년 늦가을에는 무 뽑아와 씻어다가 거실에 부어놓고 틈나면 썰고, 피곤하면 잠시 쉬다가 썰고, 또 씻고 또 썰고 썬다. 무오그락지 만든다고. 밤낮으로 무 썰어 말려서 죽도시장에 낸다. 일하는 게 겁 안 난다. 사람들이 그 돈 벌어서 다 뭐 하냐고 하는데, 작년에 고추건조기 130만 원 주고 사고, 뒤에 무시래기 건조대 만들고 해서 돈 없다.

곡식 농사 잘되면, 고추가 벌겋게 잘 달리면 보기 좋고 기분 좋아 힘든 줄도 모른다.

평생 집도 절도 없이 살았다. 논밭이 있나, 평생 남의 집에 살았다. 따님 들 결혼식 사진이 다 예쁘다. 딸 셋이 지금은 다 흥해에서 산다. 지금은 조카집에서 살고 있는데, 정부에서 고쳐주고, 조카가 또 나머지 공사해 줘서 집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상읍댁은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 잘 사귄다고 한다. 부산댁 하고 영애새댁하고 친하게 지낸다. 밭에서 일하면서 땅 보러 오면 주께고, 밭 일구면서 주께고 했다. 우각 아지매들 중에서 젊으셔서 그런지, 일도 정말 열심히 하신다. 이 밭에 아지매, 저 밭에 아지매. 밭일이 우선이라 집은 좀 어지럽지만,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상읍댁 아지매.

내 이렇게 일하고 살다가 죽으면, 또 이 밭으로 저 밭으로 일하러 가고 싶어서 어쩔라나 모르겄다.


14. 이춘구(84)/이생이(75) 9.2. 집

고향은 아저씨는 평생 이 마을, 아지매는 기계 계전. 우각교회 다닌다.

아저씨는 9살 때 부모 잃고 남의 집 살이 했고, 우리 시숙도 남의 집살이 했다. 아지매는 여섯 살에 친정어머니 돌아가셨고, 18살에 시집와서 딸 2, 아들 3 낳았는데, 큰 아들 먼저 보내고, 6살, 4살 손자를 데려와 키웠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았다. 고생을 끝도 한도 없이 하고 살았다. 5남매 키우면서 밥도 실컷 못 먹여 키웠다. 두 끼 굶긴 적도 있다. 옛날에는 다 힘들었고, 자수성가하는 것은 특히 더 힘들었다.


시집와 곁방살이 하면서 처마 끝에서 눈, 비 맞아가며 밥 해 먹고살았다. 남의 집 품팔이 해서 먹고살았다. 딸들은 중학교도 제대로 못 시켜 내보냈고, 아들들은 고등은 시켰다. 손자들 대학 시켰다. 우각에 안 해본 일 없다.(고개를 절레절레) 애기낳고, 다음날에 일하러 간 적도 있다. 신에 피가 흘러 고였다. 애기 낳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때도 있었다. 눈도 안 떠지고, 젖도 안 나오고. 00 집에서 쌀 한 주발 보내줘서 밥 하니, 아들이 학교를 안 갈라 해서 먹이고 학교 보냈다.


아저씨가 남의 집 일하다가 1년 일 다 못하고 관두면, 일한 만큼 품삯도 못 받았다. 중간에 영감이 많이 아프셔서 아지매가 더 힘들었다. 친정아버지가 개만 한 송아지 7,000원 주고 사주셨다. 그걸 키워가 새끼 빼고 또, 키우고 해서 지금 이 집 15만 원 주고 샀다. 막내아들 돌을 여기 와서 해 먹었다. 논 7마지기도 농협대출받아가 샀는데, 그 빚 갚는다고 악착같이 일하고, 소먹이고, 남의 일도 많이 하고, 한때 우리 내외 둘이서 남의 논 6,70마지기 농사를 지었다. 논 마련할 때도 자식들한테 손 안 벌렸다.


이제는, 몸에 골탕이 들어 굶어 죽어도 남의 일은 안 한다. 하도 일을 많이 해서 골이 빠지고 몸이 아프다. 몸이 골탕 들어 지금도 속에 화가 올라오고 열이 차서 잠 안 오는 밤에는 담배 서너 대를 피운다. 그리 일은 많제, 손자들은 키워야제, 하루는 손자 한 놈이 돈 250원 가져간 걸 알고, 가져간 놈이나 안 가져간 놈이나 회초리로 종아리가 까지도록 팼다. 내가 남의 거 도둑질하려면 밤에 잠 안 자고 고추 도두 키고, 나락 도두 키지, 왜 이리 밤낮으로 고생하며 남의 집 일하러 다니겠냐? 맏손자가 내가 자는지 보려고 내 얼굴 위에서 손을 흔들어보더니, 동생 종아리에 약달러 주더라. 그 뒤로는 아무리 집에 돈이 보여도 돈에 손을 안대더라. 애비에미 없이 크는 데 나쁜 길 나가지 말라고, 품팔이해서 용돈 조금이라도 주었다. 애들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얼마나 힘들었겠능교? 다행히 애들이 엇길로 안 나가고 착하고, 독하게 여물어요. 둘째 딸은 나 같으면 못살았을 텐데, 엄마가 우리 고아 안 만들어준 것 만해도 고맙다고 한다. 9.25일 맏손자가 대전서 결혼하는데, 손부 될 아가씨가 손자보다 더 자주 전화한다. 직장 생활하는데, 오래는 안 할 것 같다. 손자가 TV도 사주고, 전화기도 사주고 주전자도 사주고 아들보다 더 만만하다.


논도 집도 우리는 이제 없다. 두 사람 몸뚱이만 있다. 논은 두 아들에게 넘겨주었고, 이 집은 맏손자에게 준다. 아저씨 편찮다. 순한 치매가 6년 2개월 되었다. 내 혼자 1년 거느리니 안돼서, 아줌마가 5년 2개월째 우리 집에 온다. 아저씨가 처음 갔을 때는 누워계셨다. 나중에 일어나 텔레비전에 6시 내 고향 재방송인가를 보시다가 “잘한다, 잘한다” 하신다.


느그아버지 돌아가시면 화장해서 바다에, 나도 바람을 온몸에 받도록 해서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나는 속에 열이 차서 바람을 온몸에 맞고 싶다. 너희들은 몸 건강하고 이혼한다 소리만 하지 말고, 재미있게 살아라.

이춘구 할아버지는 올해 2025년 돌아가심.



15. 이태섭(79)/이상인(78) 9.3. 댁

아저씨는 이 방에서 태어났다. 아지매는 기계 현내가 고향. 할머니, 어머니 대대로 다니던 천곡사에 다닌다. 아들 3, 딸 1. 아지매 23살, 61.3.15일에 결혼해서 가을에 시집왔다. 아저씨는 경주중고 나와 그때 포항댁 아제가 경주중고 3년 선배였다. 59년 성균관대 다니다 어른 편찮으셔서 귀향해서 집에 있었다. 군대 갔다 와 애 2 낳고, 늦게 경북대학교 문리대 국어과에 입학해서 다녔다. 초임은 강구중에서 시작해서 봉화중, 포항중, 신광중학교에서 근무했다. 여기저기 이사 다니는 것이 싫어서 74.3.15. 신광중 그만두고, 대구 코오롱회사 갔다가 실업학교가 생기면서 근무했다. 교감을 거쳐서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공장이 기계화되고 학교가 폐교되면서 육십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지매는 강구중 시절이 재미있었다. 선생 각시들이 단체로 오징어사고, 돌아가면서 밥 1끼씩 해 먹고 신나게 살았다. 친정에서 배운 대로 엿을 고아갔더니 맛있다고들 했다.


25년 전, 둘째 아들 27살에 위암 2기 진행형 판정받고 서울대학 병원에서 위수술, 장수술, 기흉 수술을 하며 5년간 병투병을 했는데, 지금은 건강을 회복했고, 그때 갓난 아이던 손자가 대학 4학년이다. 아들 병치료하느라 돈을 자갈같이 썼다. 풀무원 무공해식품에 물에, 좋다는 것은 다 했다. 이제는 우리 용돈도 준다. 큰아들은 쉬흔다섯인데 유기고분자전공을 했다.


아지매가 후회스러운 것은 운전을 못 배운 것이다. 아저씨는 여름에 5시에 일어나 밭에 나가면 기분이 참 좋다. 고추며, 녹두며, 감나무 20그루 있고, 때로 냉수 마을회관에 가서 고스톱 좀 치는데, 상시로 오는 사람이 5~6명 정도고 소주 1병 가지고 둘이 나눠먹고 한다. 아지매, 나는 깜찍 맡게 일을 잘하지는 못한다.

6.25 때 마을에 천석꾼집, 우리 뒷집과 이안댁집이 폭격 맞았다. 안쪽으로 종갓집은 근년에 불이 났다. 우리 뒷집에 이사 온 신랑각시 손체가 맞아서 일을 잘한다. 어려운 일이 없고, 칠칠맞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좋다.


원래 이 마을사람들이 생활력이 강하다. 자식들 공부시키는 것보다 토지사고 하는데 관심이 더 많았다. 74년도에 오의정을 현 위치로 옮겼다.

마을에 바라는 바는 부유한 농촌이 되어야 한다. 농사도 교육을 받아가면서 하는 것이 좋다. 죽성 학마을보다 우리가 못하다. 자식들 건강하고 정직하게 남 피해 입히지 말고 살아라. 자식들 건강하고 제압 닦고 정 있게 사는 것이 부모로서 바라는 바이다. 자식들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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