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한, 유나이티드의 상징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부 리그 우승 20회. FA컵 우승 11회. 챔피언스리그 3회. 잉글랜드 구단 최초 트레블. 리버풀과 함께 잉글랜드 역대 최고 구단 1순위를 다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상징이 된 그들의 이야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편은 네 포스트로 나눠 쓸 것이다. 첫 번째 포스트는 <버스비의 시대와 암흑기>, 두 번째 포스트는 <"캡틴 마블"과 퍼거슨 연대기의 시작>, 세 번째 포스트는 <퍼기의 아이들>, 마지막 포스트는 <"퍼기의 아이들" 이후>다.
1958년 2월 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잃었다. 하늘로 떠난 별의 이름은 던컨 에드워즈(Duncun Edwards). 18살에 잉글랜드 대표팀 역대 최연소 데뷔 기록을 세우고 21살의 나이에 맷 버스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중심으로 활약한, 어쩌면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를 넘을 수도 있었던 선수였다.
뮌헨 참사가 일어나기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맷 버스비와 "버스비의 아이들"을 앞세워 구단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막강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세 번의 리그 우승과 한 번의 FA컵 우승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찬란했던 버스비의 유나이티드에서 유독 빛난 선수가 있었는데, 에드워즈가 그 주인공이었다. 공격수로도, 미드필더로도, 수비수로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자랑한 에드워즈는 압도적인 피지컬, 킥력, 주력, 무게 중심, 시야, 노련미를 선보이며 전성기가 오려면 아직 한참 먼 나이에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골 기록만 보면 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없다. 이유는 이와 같다: 미드필더로 주로 출전한 에드워즈는 버스비의 요구에 따라 종종 풀백으로도 출전했다. 또, 지금과는 달리 몇몇 클럽이 큰 점수 차이로 상대 팀을 지배하는 경기가 많지 않아 미드필더로 주로 출전한 에드워즈에게 골을 넣을 기회조차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골 결정력이 좋았던 그는 득점 기회가 오면 확실하게 결정을 지었고, 간혹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파괴해 골을 넣어 매 시즌마다 약 다섯 골 정도를 넣었다.
"베스트, 펠레, 마라도나 모두 훌륭했다. 하지만 던컨 에드워즈는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 토미 도처티"
에드워즈의 별명은 "붐 붐"("Boom Boom")이었는데, 이유는 그의 슈팅이 워낙 강해서였다. "탱크"("The Tank")라는 별명은 에드워즈의 피지컬이 너무 막강해서 붙여졌다 -- 초대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잉글랜드의 영원한 레전드 스탠리 매튜스 경은 에드워즈가 "분노한 바다 안에 있는 돌"이라고 표현했고, 웨스트 햄 등번호 6번 영구결번의 주인공 바비 무어는 에드워즈를 지브롤터 암벽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기술이나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에드워즈의 가장 큰 장점은 미친듯한 활동량과 기술과 파워를 앞세운 플레이였다. 한마디로 말해 축구 선수가 가져야 할 기술, 멘탈, 피지컬 면에서 모두 완벽했다.
바비 찰턴 경의 말이 던컨 에드워즈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던컨은 내가 열등감을 느끼게 한 유일한 선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QF66wL-8Bzs
https://www.youtube.com/watch?v=VPP7b_DKbvM
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뮌헨 참사 후에 몇 년 동안 심하게 흔들린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에드워즈의 죽음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버스비의 아이들'에서도 최고의 재능을 자랑하고 팀 헌신도가 높았던 에드워즈가 사망하자 유나이티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애도를 표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만약 에드워즈가 뮌헨 참사 때 생존했더라면 잉글랜드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을 세우고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을 것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수십 개의 트로피와 그 어떤 클럽도 넘볼 수 없는 명예를 주었을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재능 던컨 에드워즈를 포함한 여덟 선수들이 뮌헨 참사 때 세상을 떠난 후, 유나이티드는 혼란기를 맞이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최고의 재능을 포함한 다수의 주축 선수들이 세상을 떠나고 생존자들도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영웅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있던가. 수년간의 암흑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선수를 만들어냈다.
1966년 발롱도르의 주인이자 1966년 월드컵의 주인공, 바비 찰턴(Robber "Bobby" Charlton)이다.
만들어진 영웅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찰턴은 데뷔 때부터 남다른 실력을 뽐냈다. 버스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1956년에 데뷔한 찰턴은 그 시즌에 17경기 12골을 기록했는데, 그는 아직 10대 선수였다. 이미 던컨 에드워즈 같은 선수들이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었던 데다 프로 무대 경험이 전혀 없어 기죽은 플레이를 펼칠 수도 있었지만 찰턴은 너무 뛰어났다. 그렇게 인상적인 데뷔 시즌을 치른 찰턴은 유나이티드의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다.
"버스비가 나에게 와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당시 나는 발목 인대가 손상된 상태였지만 이를 말하지 않았다 - 찰턴이 프로 무대 데뷔전을 기억하며. 찰턴은 데뷔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그런데 뮌헨 참사가 일어났다. 때는 1958년, 찰턴이 프로 무대에서 이제 막 2년을 보낸 때였다. 찰턴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찰턴은 그때까지 팀의 주장도, 가장 중요한 선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뮌헨 참사가 여덟 핵심 선수들의 목숨을 뺏어가자 찰턴은 어느새 팀에서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 찰턴의 진정한 스토리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팀의 중심이 된 찰턴은 휘청이는 유나이티드를 굳건히 지지하며 클럽 최대의 암흑기를 동료 선수들과 함께 이겨냈다. 이렇게 헌신적인 찰턴의 모습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드러났는데, 그는 주로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지만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팀의 살림꾼 역할을 했다. 또, 자기중심적인 플레이가 아닌,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는 플레이를 펼쳐 기량과 분위기 모두 다운되어 있었던 유나이티드에서 진정한 리더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는 찰턴을 이렇게 설명한다: "바비 찰턴 경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정신을 더 뛰어나게 가지고 있었던 선수는 없었다."
던컨 에드워즈와는 달리 찰턴은 자신의 커리어 대부분을 유나이티드의 암흑기 때 보냈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였다. 득점력은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 수준이었고, 기술적으로도 완성돼 있었다. 173cm 정도의 키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무게 있는 몸으로 파워풀한 공격을 즐겨 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할 때에는 창의성마저 뽐냈다.
기록도 완벽에 가까웠다. 1958/1959 시즌에는 무려 리그 29골을 기록한 찰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커리어 통산 249골을 넣었고, 이는 아직도 구단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잉글랜드 대표로는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고도 모자라 총 49골을 넣어 웨인 루니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대표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었다. 경기장 안에서 보여주는 존재감과 그 존재감을 바탕으로 기록한 기록 둘 다 역사에 남을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리베로 포지션의 창조자 프란츠 베켄바워는 말했다: "모두가 찰턴의 창의성을 인정했습니다. 또, 그는 90분 내내 움직였고, 말의 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1O2vagV_cs
https://www.youtube.com/watch?v=39eScEkGdlw
그러나 찰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나이티드의 암흑기는 이어졌다. 한 마디로 말해 팀의 부활이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버스비는 팀을 어떻게 리빌딩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고, 찰턴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기량이나 경험이 부족했다. 하지만 1962/1963 시즌부터 상황이 긍정적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4/1965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팀의 부활을 알렸다. 무려 일곱 시즌 동안 리그 우승이 없었던 유나이티드가 드디어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부활에는 당연히 바비 찰턴의 공이 컸다. 그러나 찰턴 혼자만이 이끌었던 것은 아니다. 유나이티드가 부활을 알린 그 시즌, 찰턴의 양옆에는 두 명의 선수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의 이름은 데니스 로(Denis Law)였다.
1962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 합류한 데니스 로는 이미 프로 무대에서 일곱 시즌이나 뛴 선수였다 -- 1960/1961 시즌에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총 25골을 기록했었다. 유나이티드는 로를 토리노에서 영입하기 위해 £115,000를 지불했는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 최고 기록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로는 유나이티드가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야심 차게 영입한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던 셈이다.
로는 유나이티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나이티드 데뷔 시즌에 리그 23골을 기록한 로는 팀의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그다음 시즌인 1953/1964 시즌에는 리그 30경기 30골이라는, 경기당 평균 1.0골의 경이로운 득점력을 보여주며 팀의 리그 준우승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가 매 시즌 40, 50골을 넣어 경기당 평균 1.0골이라는 기록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호날두와 메시의 시대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록이었다. 1964/1965 시즌에도 무시무시한 득점력으로 리그 28골을 넣은 로는 1964년 발롱도르를 가져갔다.
"데니스 로는 달걀 껍질 위에서 춤을 출 수도 있었다 - 빌 샹클리, 리버풀 역대 최고의 감독"
로의 최대 장점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골을 넣는 능력이었다. 그는 에드워즈나 찰턴의 강력한 킥력을 자랑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슛으로 자유자재로 골을 넣을 수 있었다. 헤딩 능력은 유나이티드 역사상 역대 최고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은데, 그는 체구와 키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점프와 정확한 헤딩으로 수많은 헤딩골을 넣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금발 선수가 공을 향해 점프를 할 때, 관중들은 어떻게서든 골이 터진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데니스 로의 별명은 "킹"이었다 -- 그만큼 유나이티드에서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선수였다. 또, 환상적인 득점력과 헤딩 능력으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한 그는 금발에다 잘생긴 외모까지 갖추어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비 찰턴의 상징성과 기여도가 더 컸지만, 로가 찰턴보다 몇 배는 더 인기 있었다는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HGsqQvJ_xo
찰턴이 팀의 중심을 잡고 로가 골을 넣을 때, 그들 옆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상대 수비를 사정없이 파괴하기 좋아했던 그 사내의 이름은 조지 베스트(George Best).
베스트는 축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해 찰턴과 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공격 삼각편대를 이루고 은퇴 후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찰턴과 로보다도 화려한 선수였다.
"Maradona good, Pele better, George BEST"
1963/1964 시즌에 데뷔한 베스트는 첫 시즌부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리그 17경기에 출전해 네 골 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베스트의 진가는 득점력에서 보이지 않았다. 베스트의 최대 장점은 드리블이었는데, 그는 아직도 스탠리 매튜스와 함께 영국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로 기억된다. 역대급 테크닉으로 상대 수비를 농락하며 상대 수비를 아름답게, 자유롭게 파괴한 베스트는 BBC로부터 "뷰티풀 게임과 함께한 뷰티풀 보이"로 불렸다. 그의 재능을 보고 쇼크를 받은 조니 자일스는 베스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조지 베스트는 펠레보다 더 재능 있었고, 요한 크루이프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루이프보다도 나았다."
베스트는 마치 공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몸싸움이나 거친 태클이 들어와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고 공을 컨트롤하는 능력과 칩샷 등으로 아름다운 골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우아하기까지 했다. 유나이티드에는 이미 인기 있는 선수가 두 명이나 있었지만 -- 로와 찰턴 -- 베스트는 그야말로 영국의 스타였다. 90년 대에 데이비드 베컴이 있었다면 60-70년 대에는 조지 베스트가 있었다.
"그를 보고 생각했다. '오, 특별한 일이 일어나겠군.' - 데니스 로"
찰턴과 로 둘 다 대단했지만 베스트는 그들을 뛰어넘는 임팩트를 보여주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드리블 능력은 가린샤나 매튜스의 경지에 있었고, 프로 두 번째 시즌부터는 준수한 득점력까지 뽐냈다. 1964/1965 시즌에 처음으로 리그 10골 고지를 밟은 베스트는 1967/1968 시즌에 리그 28골을 넣어 스코어러의 기질도 최고 수준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1968/1969 시즌에도 그 기세를 이어가 리그 19골을 넣은 베스트는 1968년 발롱도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실 베스트의 사생활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단 알코올 중독자였던 그는 나중에 병까지 걸려 60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여러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고, 유나이티드를 떠난 후 심한 부진에 빠졌다. 찰턴과 로와는 분명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베스트는 여전히 유나이티드의 레전드이자 상징이다. 팀을 암흑기에서 구해낸 것과 찰턴, 로와 함께 "The United Trinity"를 형성한 업적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또, 그는 무엇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7번 전설의 시작이었다. 스티브 코펠, 브라이언 롭슨, 에릭 칸토나, 데이비드 베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모두 유나이티드의 전설적인 7번이지만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7번이자 그 전통을 시작한 인물이 바로 조지 베스트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uJWWA-h_-5g
https://www.youtube.com/watch?v=Zg-du9sqNvg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70년대부터 다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찰턴, 로, 베스트의 부재였다. 물론 그들은 70년대 초중반까지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지만, 유나이티드에는 선수 생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그들을 대체할 자원이 없었다.
만약 70년대 유나이티드에 던컨 에드워즈 같은 선수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로, 찰턴, 베스트 같은 선수들이 유나이티드를 이끌었으면 어땠을까. 70년대 유나이티드의 부진은 상징과도 같았던 선수가 없었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나이티드는 80년까지 이어졌다. "캡틴 마블"이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던컨 에드워즈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Manchester_United_F.C.
http://blog.daum.net/meticulous/2128518
http://srw.kr/68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soccer&no=46297
http://www.goal.com/kr/news/1063/hit-goalcom/2009/07/11/1375835/goalcom-%EC%84%A0%EC%A0%95-%E8%8B%B1-%EC%97%AD%EB%8C%80-%EB%B2%A0%EC%8A%A4%ED%8A%B8-50%EC%9D%B8-8%EC%9C%84%EB%8A%94-%EC%97%90%EB%93%9C%EC%9B%8C%EC%A6%88
바비 찰턴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Bobby_Charlton
http://www.manutd.com/en/Players-And-Staff/Legends/Sir-Bobby-Charlton.aspx
http://srw.kr/747
http://www.biography.com/people/bobby-charlton-20882921
데니스 로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Denis_Law#cite_note-3
http://www.dailymail.co.uk/sport/football/article-3380041/Manchester-United-Scotland-great-Denis-Law-describes-CBE-New-Year-Honours-list-lovely-surprise.html
http://srw.kr/205
http://www.manutd.kr/ko-KR/NewsAndFeatures/FootballNews/2010/Feb/Happy-70th-Lawman.aspx?pageno=3
조지 베스트 소스:
http://srw.kr/65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Best
http://www.georgebest.com/about-george/
글: 프리사이스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