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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수 Apr 19. 201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상징들: 퍼거슨 연대기의 시작

"퍼기의 아이들" 등장 전부터 팀을 이끈 유나이티드의 상징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부 리그 우승 20회. FA컵 우승 11회. 챔피언스리그 3회. 잉글랜드 구단 최초 트레블. 리버풀과 함께 잉글랜드 역대 최고 구단 1순위를 다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상징이 된 그들의 이야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편은 세 편으로 나눠 쓸 것이다. 첫 번째 편은 <버스비의 시대와 암흑기>, 두 번째 편은 <"캡틴 마블"과 퍼거슨 연대기의 시작>, 마지막 편은 <"퍼기의 아이들" 이후>다.




바비 찰턴,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를 비슷한 시기에 떠나보낸 유나이티드는 깊은 암흑기에 빠졌다. 1964/1965 시즌부터 두 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 풍겼던 극강의 포스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강등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 된 팀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실패한 유나이티드는 1974년에 강등까지 당하며 팀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다. 물론 한 시즌 만에 다시 1부 리그로 승격했지만 "버스비의 아이들"과 잉글랜드를 제패하고 찰턴, 로, 베스트를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맷 버스비 감독까지 팀을 떠났다. 팀의 중심, 팀의 골잡이, 팀 최고의 스타, 그리고 최고의 감독을 떠나보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70년대, 모든 것을 잃은 유나이티드는 고작 FA컵 하나와 커뮤니티 실드 하나밖에 우승하지 못 했다. 그렇게 초라하게 70년대를 마친 유나이티드는 재기를 꿈꾸며 영국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내고 1981년에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으로부터 선수 한 명을 영입했다. 그의 이름은 브라이언 롭슨(Bryan Robson). 아직 25살도 되지 않은 젊은 중앙 미드필더였지만 유나이티드는 그에게 조지 베스트의 등번호였던 7번을 주며 팀의 중심이 되기를 기대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롭슨은 훌륭한 중앙 미드필더였다. 유나이티드에 오기 전에 이미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른 그는 경기를 읽는 감각과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당대 최고였다. 공을 사이드로 벌려 주어야 할 때는 뛰어난 볼 컨트롤과 정확한 킥으로 원하는 위치에 공을 보냈고, 좁은 공간에서 패스 플레이가 필요할 때면 세밀한 패스로 볼 소유권을 내주지 않았다. 득점 감각까지 좋았던 그는 팀이 필요할 때마다 중요한 골을 터트리며 팀의 승리를 직접 이끌기도 했다 -- 1982/1983 시즌과 1983/1984 시즌에는 각각 10골, 12골을 넣었다.


롭슨은 좋은 볼 컨트롤을 자랑했고, 결정적인 태클을 할 줄 아는 선수였으며, 패스를 잘했다. 또, 엄청난 스태미나와 경기를 읽는 능력을 보유했던 그는 순간적인 움직임을 가져가 상대의 위협 지역 안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감독


하지만 롭슨의 진가는 리더십에서 드러났다. 별명 "캡틴 마블"처럼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끊임없이 동기 부여했던 그는 이견 없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주장이었다. 팀이 지쳤을 때는 "힘내"라는 말을 외치며 동료들을 응원했고, 많은 활동량을 가져가 팀 플레이어의 표본을 보여주었으며, 뚜렷한 목표 의식을 심어주며 목표 없이 헤매던 팀을 바로잡았다. 언론 [The Telegraph]는 롭슨을 이렇게 설명했다: "브라이언 롭슨은 주장이라는 자리의 가치를 부정한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롭슨 없는 유나이티드를 상상하기 무서웠을 만큼 주장 롭슨은 유나이티드에게 꼭 필요했던 존재였다 -- 롭슨은 최악의 성적을 거두던 유나이티드를 이끌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맷 버스비 이후 많은 감독들이 실패를 경험하고 팀을 떠났지만 롭슨만은 팀을 굳건히 지키며 진정한 리더 역할을 했다. 만약 그 당시 유나이티드에 롭슨 같은 주장이 없었다면 뚜렷한 목표와 동기부여가 없었던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모래알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흩어져 팀의 붕괴를 자초했을 것이다. 롭슨은 어쩌면 뮌헨 참사 이후 붕괴되던 팀을 잡은 바비 찰턴보다 더 리더다운 리더였다.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브라이언 롭슨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을까? - 벤 웰치, [FourFourTwo] 칼럼니스트


롭슨의 실력과 리더십 덕분에 유나이티드의 성적은 점점 더 나아졌다. 1982/1983 시즌, 유나이티드는 여섯 시즌만에 FA컵을 우승하며 오랜만에 큰 기쁨을 맛봤다. 1984/1985 시즌에도 FA컵을 우승한 유나이티드는 롭슨을 중심으로 서서히 재건되었다. 리그에서는 3, 4위를 오가다 1987/1988 시즌에 2위를 기록했고, 그 후 몇 시즌 동안은 부진했지만 1991/1992 시즌에 또 2위를 기록하며 팀의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종합적으로 보면 롭슨은 유나이티드에서 조지 베스트보다 더 적은 경기를 뛰었고, 바비 찰턴보다 더 적은 득점수를 기록했으며, 데니스 로보다 멋있지 않았고, 던컨 에드워즈보다 빛나지 않았다. 또, 그는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에서 오랜 기간 뛰다가 유나이티드로 온 이적생이었다. 그러나 롭슨은 에드워즈, 찰턴, 로, 베스트가 풍기지 않았던 진한 리더의 향기를 뽐냈다. 그리고 그 향기 덕분에 유나이티드는 다시 잉글랜드의 강팀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LTaYWrWFsw

https://www.youtube.com/watch?v=ZBilBa5n2wY


1986년, 롭슨이 유나이티드의 FA컵 우승을 이끈 후, 유나이티드는 알렉스 퍼거슨이라는 사람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당시 퍼거슨은 에버딘에서 엄청난 돌풍을 이끌고 단기간만에 세계 정상급 감독으로 성장한 젊은 감독이었다. 훗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거듭나는 그는 초반에 부진하기도 했는데, 1990년대가 찾아오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클럽을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만들었다.

90년대 유나이티드의 성공에는 롭슨의 몫도 있었지만 선수 커리어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예전만큼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 했다. 대신 퍼거슨이 영입한 선수들과 발굴한 선수들이 경이로운 조화와 경기력을 보이며 진정한 팀을 구성했는데, 그 중심에는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킹"이 있었다.

모두가 짐작했겠지만 프랑스 국적의 새로운 "킹"의 이름은 에릭 칸토나(Eric Cantona)였다. 그는 유나이티드에서 고작 다섯 시즌밖에 뛰지 않았지만, 그때 보여준 포스와 경기력은 그 누구도 범접 못할 수준이었다. 



칸토나는 프랑스에서 데뷔했을 때부터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라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불같은 성격과 넘치는 거만함으로 많은 이슈와 논란을 일으켰는데, 선배한테 화를 낸다거나 판정에 불만이 있어 심판을 공으로 가격하는 등, 그 수준이 상상 이상이었다. 현재 악동 이미지가 강한 선수라면 조이 바튼이나 마리오 발로텔리 정도가 있지만 칸토나는 그들보다 더 심각했다. 결국 칸토나는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의 리즈 유나이티드에 자리 잡은 칸토나를 본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칸토나는 예상을 깨고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 재능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었다. 하지만 칸토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고, 리즈의 구단주가 칸토나를 팔고 싶어 하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1992/1993 시즌 중반에 칸토나를 영입했다. 퍼거슨은 칸토나의 재능과 카리스마를 믿었다. 

결과적으로 퍼거슨의 선택은 완벽했다. 

당시 팀을 리빌딩하고 있었던 퍼거슨에게는 팀의 중심을 잡을 리더가 필요했다. 아직 브라이언 롭슨이 팀에 있었지만 1992/1993 시즌에 그는 30대 중반이었다. 칸토나는 새로운 유나이티드를 이끌 수 있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실력과 재능 모두 최고 수준에 있어 젊은 선수들의 아이돌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칸토나는 패기 넘쳤던 "퍼기의 아이들" -- 데이비드 베컴, 니키 버트, 네빌 형제,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 과 새로 영입된 선수들을 한 팀으로 묶어 유나이티드가 최고의 조직력과 정신력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칸토나는 리더 역할뿐만 아니라 팀 공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맡았다. 주로 중앙 공격수로 뛴 그는 데니스 로가 자랑한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뽐내지 않았지만 경기의 승패가 걸린 순간이나 팀 성적을 바꿀 수 있는 경기에서 득점이나 어시스트를 기록해 완성형 포워드의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3년에 발롱도르 3위에 뽑혔던 이유도 괴물 같은 득점력 때문이 아니라 경기장 안에서 보여준 경기력과 퍼포먼스와 팀 동료들과 함께 펼치는 위협적인 팀 공격 때문이었다.

경기장 밖, 안에서 강렬하고 카리스마 있는 보여준 모습을 덕분에 에릭 칸토나는 "올드 트래포드의 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킹"이라는 별명은 이미 데니스 로에게도 주어졌었지만 진정한 유나이트의 왕은 칸토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는 진짜 그가 "에릭 왕"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깃을 세우고, 허리를 꿋꿋하게 피고, 가슴을 폈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자신이 경기장을 소유하듯 경기장을 입장했다 - 로이 킨


칸토나는 유나이티드에서 고작 다섯 시즌밖에 뛰지 않았다. 게다가 쿵후 킥을 시전해 8개월 출전 정지를 받아 실제 뛴 시간은 5년보다 훨씬 더 적었다. 하지만 에릭 칸토나는 팀의 성공을 직접 이끈 대단한 축구 선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식 잡지 [Inside United]는 에릭 칸토나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았고, 유나이티드는 칸토나의 도움으로 암흑기에서 벗어나 그가 있을 동안 총 네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FA컵 우승을 경험했다. 위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시작에는 칸토나가 있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mOE4AtDRDk

https://www.youtube.com/watch?v=gXTk0Z2oGzM


에릭 칸토나가 공격을 이끌었다면 중원에는 아일랜드 국적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있었다. 에릭 칸토나만큼 악동이었지만 1993/1994 시즌을 앞두고 유나이티드에 합류하자마자 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활약한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황금기를 같이 했다.


그의 이름은 로이 킨(Roy Keane).

아직도 아일랜드가 낳은 최고의 재능이자 "캡틴 마블"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최고의 리더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퍼거슨이 킨을 영입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롭슨의 노쇠화 때문이었다. 롭슨은 90년대 초반까지도 리더의 역할을 했지만 부상이 점점 잦아졌고, 활동량도 자연스럽게 떨어졌으며, 칸토나의 합류로 더 이상 팀의 중심이 아니었다. 중원을 강화하는 동시에 칸토나와 팀을 이끌 수 있는 선수를 필요로 했던 퍼거슨에게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었던 킨은 합리적인 영입 옵션이었다.

킨은 유나이티드에 합류하자마자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탄탄한 몸과 대단한 체력을 자랑한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해 터프하게 상대 공격을 막아내며 포백 라인을 보호하고 중원을 지휘했다. 롭슨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선수가 절대 아니라고 말한 유나이티드 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킨의 터프함과 우직한 플레이에 반해 열광했다. 

킨의 장점 중 하나는 강철 같은 몸이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치고 키가 작았지만 -- 어린 시절, 한 스카우터에게 "너무 작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큰 부상을 쉽게 당하지 않았던 그는 거의 매 시즌마다 40경기 정도에 나오며 퍼거슨의 위대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다. 유나이티드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1993/1994 시즌에는 심지어 50경기 이상 출전했고, 트레블 시즌이었던 1998/1999 시즌에도 50경기 넘게 출전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 특성과 거친 플레이와 왕성한 활동량을 지향하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장기 부상이나 체력 저하로 거의 매 경기에 나오는 것이 힘들었을 테지만 킨에게 그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킨의 최대 장점이라면 역시 투지와 리더십이었다. 롭슨이 전형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킨은 조금 더 전투적이고 강한 리더였는데, 동료 선수가 태클을 당했을 때 주심에게 거칠게 항의하거나 강한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선수단을 거칠게 밀어붙이는 등, 그 만이 뽐냈던 강렬함과 카리스마로 팀을 융화시키고 움직이게 했다. 1997년, 칸토나가 갑작스럽게 팀을 떠났을 때는 주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우리의 캡틴이자 우리의 리더였다 - 대런 플레처


그의 진가는 1999년 챔피언스리그 4강 유벤투스와의 2차전 경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유나이티드는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며 유벤투스에게 지고 있었는데, 킨은 그때까지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팀 전체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런 킨의 플레이를 본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힘을 내기 시작했고, 결국 3:2로 경기를 역전시키며 기적적으로 결승전에 진출했다 -- [BBC]는 유나이티드의 역전을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표현했다. 퍼거슨은 말했다: "내가 축구장에서 본 가장 헌신적인 플레이였다. 경기장에 있는 모든 잔디를 밟고, 지는 것보다 죽을 


https://www.youtube.com/watch?v=e6okbezsjQE

https://www.youtube.com/watch?v=L6jwIHBj1pQ


킨은 분명 유나이티드의 트레블 시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선수였다. 하지만 유나이티드의 트레블을 이끈 것은 킨 혼자가 아니었다. 앤디 콜과 드와이트 요크가 형성한 전설적인 투톱 라인도 있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어, 잉글랜드를 넘어, 전 세계에 기억될 젊은 청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The Class of '92"라고 부른다.


"퍼기의 아이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들의 이름은 게리 네빌, 필 네빌,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이다.          

    



브라이언 롭슨 소스: 

http://srw.kr/261
https://en.wikipedia.org/wiki/Bryan_Robson
http://www.manutd.com/en/Players-And-Staff/Legends/Bryan-Robson.aspx


에릭 칸토나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Eric_Cantona
http://www.dailymail.co.uk/sport/article-3334910/Eric-Cantona-Sir-Alex-Ferguson-s-key-signing-Old-Trafford-new-letter-proves-Manchester-United-boss-admired-Frenchman.html
http://www.manutd.com/en/Players-And-Staff/Legends/Eric-Cantona.aspx
http://srw.kr/205

로이 킨 소스:

https://en.wikipedia.org/wiki/Roy_Keane
http://srw.kr/131
http://www.belfasttelegraph.co.uk/sport/football/euro2016/roy-keane-manchester-united-is-in-my-dna-steven-gerrard-was-good-and-i-wanted-to-play-in-an-old-firm-game-so-snubbed-real-madrid-for-celtic-34428165.html
http://www.theguardian.com/football/roy-keane




글: http://blog.naver.com/kunnom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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