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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수 Sep 01. 2016

프란체스코 토티: 로마를 위해

이 시대 진정한 로맨티스트

27년 전, 내가 살았던 로마의 아파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문을 열었다. 문에 노크를 한 사람은 나의 축구 인생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엄마가 문을 열었을 때 축구 디렉터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블랙과 레드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AC 밀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밀란에서 뛰길 바랐다.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엄마가 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나?




로마의 소년에게는 오직 두 개의 선택이 있다: 블루 혹은 레드. 라치오 혹은 AC 밀란. 하지만 내 가족은 하나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셨다. 할아버지는 로마의 엄청난 팬이었고, 이 덕분에 나의 아비지가 로마의 팬이 되었으며, 이 덕분에 나도 로마의 팬이 될 수 있었다. 로마에 대한 사랑은 전통과도 같았다. 로마는 단순한 축구 클럽이 아니었다. 로마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피, 우리의 영혼이었다.



80년 대에는 로마 경기를 많이 중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경기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일곱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티켓을 손에 얻었고, 나는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I Lupi를 볼 수 있었다.

눈을 감고 그 기분을 기억할 수 있다. 그 색깔들, 응원가, 연기. 내 주위에 있던 로마 팬들은 내 안의 무언가를 점화시켰다. 어떻게 그 경험을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Bellissimo.

오직 이 단어만 그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살았던 지역, 산 조반니에서 내가 축구공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거다. 나는 어디서든 -- 거리, 성당, 골목 -- 축구를 했다.

어렸을 때도 축구에 대한 나의 사랑은 평범하지 않았다. 나는 축구 선수를 꿈꾸고 있었다. 나는 로마의 캡틴, 주세페 잔니니의 포스터와 신문 기사를 방에 붙였다. 그는 아이콘이자 상징이었다. 그는 그냥 로마 출신의 소년이었다. 우리 같이.



그리고 내가 13살이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AC 밀란 사람들이 나를 영입하려고 했다. 이탈리아의 빅클럽에 입단할 수 있는 기회. 나의 결정은?

당연히 내 결정이 아니었다.

나의 엄마가 보스였다. 그녀는 아직도 보스다. 엄마는 모든 이탈리아 엄마들처럼 약간 과잉보호적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내가 집에서 떠나는 것을 막았다.

"안돼요, 안돼요," 엄마가 디렉터들에게 말했다. 그게 엄마가 한 말 전부다. "Mi dispiace. No, no."

그게 끝이었다. 보스가 나의 이적을 거부했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나를 경기장에 데려다주셨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엄마가 보스였다. AC 밀란을 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에게 큰 돈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 엄마는 나에게 중요한 레슨을 주셨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집이다.

몇 주 후, 나의 경기 하나를 본 로마가 나에게 제의를 했다. 나는 노란색과 레드를 입게 됐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커리어에 큰 도움을 줬다. 맞다. 그녀는 보호적이었다 -- 아직도 그렇다! -- 하지만 내가 경기장에서 매일 뛸 수 있게 많은 희생을 했다. 커리어 초반이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 알고 있다.



나를 훈련장에 데려다준 사람은 엄마였다. 경기장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엄마는 두, 셋, 가끔씩은 네 시간씩 나를 기다렸다. 비와 추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꿈을 펼칠 수 있게 기다렸다.

나는 내가 데뷔한다는 것을 경기 90분 전에 알았다. 경기장에 가기 위해 버스에 앉았을 때 흥분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잠이 준 평화는 없었다. 로마 팬들은 다른 팬들과 다르다. 그들이 거는 기대는 엄청나다. 반드시 가치를 증명받아야 하고, 실수는 적어야 한다.

처음으로 경기장에 발을 딛였을 때 나의 집을 위해 뛴다는 긍지에 압도됐다. 나의 할아버지를 위해. 나의 집을 위해.

그리고 25년간 그 긍지는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실수들은 있었다. 심지어 12년 전,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기 위해 로마를 떠나는 생각도 해봤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강한 팀이 제의를 하면 집을 떠나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나는 로마의 회장과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는 나를 변하게 했다. 하지만 결국은 가족과의 대화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줬다.

집이 전부다.



39년간 로마는 나의 집이었다. 25년간 로마는 축구 선수 토티의 집이었다. 그게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것이든 챔피언스리그에서 뛰는 것이든, 나는 내가 로마의 색깔을 최대한 잘 상징해 왔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당신을 자랑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나만의 길이 있다고 말해도 된다.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 집에서 산 사람이 나다. 따라서 나는 매일 하는 것들을 그리워할 거다. 트레이닝, 드레싱 룸에서의 수다. 가장 그리워할 건 동료들과 커피를 같이 마시는 거다. 내가 디렉터로 돌아오면 그 순간들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평생 로마에서 사냐고.


사진: WALTRAUD GRUBITZSCH/PICTURE-ALLIANCE/DPA/AP IMAGES


로마는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로마는 바다, 산, 기념물이다. 로마는 당연히 로마인들이다.


로마는 노란색과 레드다.

로마는 나에게 세상이다.

이 클럽, 이 도시는 나의 인생이었다.

Sempre.

원본: http://www.theplayerstribune.com/francesco-totti-as-roma-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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