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65일차:번외 - 청소는 나의 힘(5)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힘 , 신뢰라는 버튼 (26.2.3.화요일)

by Preni

여느 날처럼 청소기를 돌린 후,

필터에서 먼지를 제거하던 중이었다.


평소에는 그저 ‘빨간 문양’으로만 보이던 것이

오늘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단순한 문양이 아닌

작은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이었던 것이다.


눌러보라니, 눌러보았다.


이게 웬걸.

필터가 쏙— 하고 빠지며

필터를 감싸던 통과 필터 자체가 분리되었다.


이건 혁신이다.

결혼 첫날부터 지금까지 함께해 온 이 고마운 청소기님의

딱 하나 아쉬운 점은

필터를 닦을 때마다 늘 작은 불편함이었거든

아쉽게도.

필터를 감싸는 통보다 내 주먹이 컸고,

그래서 청소는 언제나 ‘덜 닦인 채’로 끝나곤 했다.


그런 아쉬움의 시간이

오늘로 끝이 났다.

속 시원함의 시작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손이 한 번에 들어갈 수 없다면

부분적으로 분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더 컸을 텐데,

왜 나는 그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 작은 버튼 하나가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냈다.


어쩌면 이건

믿음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청소기 업체는

판매까지만 생각했을 것이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판매 이후의 사용과 관리까지

고민했을 가능성을

아예 떠올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신뢰의 문제가 아닐까,


설계자가

나와 같은 불편을 상상했을 것이라는 믿음,

그 자체가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신뢰 아닐까.


나의 편견은

이 단순한 신뢰를 눌러왔던 거지.


그럼에도

우리 집 청소기가 지금까지

문제없이 기능해 온 것은,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탄생한

이 설계 구조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을 리 없다’는 불신 속에서 숨겨진 이 구조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신뢰로 드러난거지, 세상 밖으로.


이제껏 내 삶에서 만나온 체계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구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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