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서 ‘취집’이란 단어를 바라보며
출근을 하지 않는 자도,
평일을 시작하는 아침에는
일어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백수라도
나를 누르는 고민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이겠지.
뒹굴거리며 폰을 켜
이런저런 콘텐츠를 보다 보니
‘여성으로서 가장 부러운 상태’라는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 최초 타이틀을 단 임원도 아니고,
유급휴가와 육아휴직이 비교적 잘 보장된 교직원도 아니고,
워라벨이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는 사원도 아니고,
문과 탑 판검사도,
이과 탑 의사도 아니란다.
바로
시집 잘 가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
솔직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수로 바깥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다 보니
떨어지고 광탈하는 서류들에 마음은 아프지만
아프지만,
편하고, 편안하다.
왜 나는 우리 집 안이 이렇게 편안할까.
내 이름이 적힌 책상에 앉아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우리 집 바깥에서 무언가 성취하기를
매일 꿈꾸는데,
왜 나는 집이 더 편안할까.
수세미로 변기를 닦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니까.’
‘애쓰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주니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의 사회생활이 스쳐 지나간다.
그토록 대화하려 애썼지만
무수히 무시당했던 시간들.
눈물로 얼룩졌던 내 사회생활.
훌쩍.
이번 설에는 남편에게 ‘용돈’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의 세뱃돈 말고,
진짜 나만을 위한 용돈.
매일 잔고를 계산하며 눈치 보던 내가 걱정되었는지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었다.
사회에서처럼 성과를 내서가 아니라
백수인데도
우리 집에서는 성과를 내지 않는 사람인데도
우리 남편은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준다.
‘백수인데도 , 성과도 못 낸 사람인데도,
언제나 내 주머니를 채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
그리고 또 하나.
‘예측 가능하다는 것.’
남편이 언제 집에 올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언제 졸릴지.
예측이 된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해줄 수 있거든.
애쓰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고,
성과를 내지 않아도 주머니가 채워지고,
내일이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
그래서 사람들이
‘취집’을 부러워하는 건 아닐까.
나는 이 단어를 옹호하려는 것도,
반대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늘,
이 단어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우리 남편이 고마워서였다.
사회에서는 종종 바보 같았던 나를
집에서는 따뜻하게 안아주고,
아껴주고,
맛있는 것만 먹여주고,
배고플까 봐 용돈까지 쥐여주는 사람.
그래서 오늘따라
‘취집’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집에서 사랑받는 사람이면서,
사회에서도 존중받는 사람이 될테다
나도 사회에서 인정받고 성과를 내어 그에 합당한 재력을 가져서
우리 남편이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나도 우리 남편을 조건없이 사랑해줄테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취집이라는 단어를 보며
백수는 오늘도 다짐을 하며 아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