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악재 속에서 자전거로 넘은 첫 번째 국경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by 현존

오늘은 유럽 자전거 일주 2일차다.


어제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고,

50km를 6시간이나 달린 여파는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여유롭게 달려보자며 7~8시에 일어나자고 했는데,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9시 반. 무려 11시간 반을 잤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잠이라도 푹 잔 게 어디냐 싶어서 괜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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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는 라트비아 옐가바에서 리투아니아 요니슈키스.

즉,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국경을 넘는 날이다.

오늘도 무리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약 48km만 달리기로 하고, 미리 요니슈키스에 숙소를 잡아두었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숙소를 미리 잡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오히려 그 반대였다.

숙소를 잡아야 힘이 난다. 목적지가 없으면 어디서든 멈춰버릴 것 같았고, “여기까지 가자”라는 약속이 있어야 페달을 계속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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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마르지 않은 축축한 짐을 어떻게든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는데, 오늘도 하늘은 먹구름 가득.

언제 소나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였다ㅎㅎ;;


오전 10시 30분, 출발.

어제보다 몸이 한결 가볍고 컨디션도 좋았다.

사실 유튜브에는 안 적었지만, 어제 딱딱한 안장 위에서 오프로드를 몇 시간 달렸더니 엉덩이와 가랑이가 너무 아파서, 오늘은 안 입을 티셔츠를 접어 엉덩이 밑에 깔고 출발했다. 이게 바로 자전거 일주 생존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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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기찻길 옆 자갈길,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대형 트럭과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이어졌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장면들이 계속 나왔고,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자전거는 휘청거렸다.

그래서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자갈밭 쪽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도로와 자갈밭 사이의 좁은 턱에 바퀴가 걸렸다.

드르르르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고, 나는 그대로 자전거와 함께 차도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느낌과 동시에 뒤에서 들려온 경채의 비명, “혜인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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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다행으로 그 순간 차들이 지나가지 않고 있었고, 큰 자전거와 입고 있던 룰루레몬 자켓이 충격을 대부분 흡수해줘서 큰 부상은 피했다.

꽤 크게 넘어졌는데 순간에는 아프다는 느낌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서야 시퍼런 멍으로 변해갔다.

경채는 많이 놀란 얼굴로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다.

도로 한복판, 아직 목적지는 한참 남았고 선택지는 없었다. 그냥 가는 수밖에.


솔직히 아직도 그 질문을 했던 경채가 어떤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궁금하다. (자전거 버리고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려고 했던 걸까.)

“방법이 뭐가 있는데? 가야지.” 그리고 솔직히 너무 배가 고팠다...ㅎㅎ

아무것도 안 먹고 출발한 상태라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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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말자, 정신 차리자 다짐하며 다시 달리는데, 자전거에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가 보였다.

멈춰서 확인해보니 가방 안에 있던 올리브유 유리병이 깨져 있었고, 그 기름이 전자기기, 책, 물건들 위로 다 흘러내려 있었다.

아마 넘어질 때 같이 깨진 것 같았다. 최대한 음식 안 사 먹고 해먹으려고 리가에서부터 챙겨온 건데..

물티슈도 휴지도 없는 상황에서 자전거 설명서를 찢어서 기름을 닦아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웃는 경채를 보며, 나도 결국 웃었다.

그래, 웃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다시 출발. (이날의 몇 번째 출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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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너무 배가 고파서 음식점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기로 했다.

오후 12시 50분, 열심히 달리다 보니 햄버거를 파는 작은 푸드트럭이 나왔다.

메뉴 고를 힘도 없이 사진만 보고 감자튀김, 샌드위치, 햄버거를 시켜 허겁지겁 먹었다. 라트비아식 햄버거에는 절인 오이가 들어간다고 설명해줬지만, 솔직히 그게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맛있게 먹었다.


그날 깨달았다. 자전거 탈 땐 절대 배고프면 안 된다. 에너지바, 초콜릿, 견과류… 앞으로 무조건 챙기자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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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탄 지 4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30km나 남아 있었고,

이번에는 자갈길 나뭇가지에 바퀴가 걸려 넘어졌다.

왜 이렇게 자꾸 넘어지나 싶어서 아픈 것보다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무서워져서 잠시 자전거를 끌고 걷자고 했는데, 그 순간 또 먹구름이 몰려왔다.


오후 4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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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고, 이건 달릴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급하게 나이아가라 크루즈 우비를 꺼내 입고, 도로 한복판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피할 곳도 없었다. 차들은 쌩쌩 달리고, 우리는 워터파크에 온 사람들처럼 물을 뒤집어썼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정말 한없이 작다는 걸 다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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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멈출 기미가 없어 자전거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경채는 원래 비 맞는 걸 좋아하고, 나는 그렇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쏟아지는 비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몸은 다 젖었지만 기분은 묘하게 상쾌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국경이 나타났다.


오후 5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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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생 끝에 첫 번째 국경 통과.

국경을 넘자마자 하늘이 맑아지고 따뜻한 햇살이 쏟아졌고, 심지어 무지개까지 떠올랐다. 환영 인사 같았다.


오후 6시

아직 10km 남은 상황. 비를 많이 맞아서 몸이 점점 식어갔고 하루는 끝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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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요니슈키스 숙소. 건물 전체가 공사 중이라 순간 ‘여기서 자는 게 맞나?’ 싶었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힘이 다 빠져서 오는 길에 산 컵라면 세 개를 사와서 숙소에서 허겁지겁 먹고, 따뜻한 물에 반신욕을 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건넌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들고 위험하고 엉망진창이었던 이 하루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아마 이 여행이 끝나고 가장 많이 떠올릴 장면들도, 이런 날들이겠지.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bePUYz_LF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