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20시간짜리 페리를 타다!

자전거로 유럽일주 5번째 이야기

by 현존

오전 8시

잠에서 깨자마자 백짝꿍은 이미 노트북을 켜두고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제 자기 전, 모처럼 찾아온 여유 시간에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3일간 직접 자전거를 타본 결과 이곳의 도로는 말 그대로 ‘목숨을 내놓고 달리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차와 트럭 바로 옆을 달리는 구조, 보호 장치 하나 없는 자전거 도로, 그 위를 달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은 계속 긴장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방식으로는 자전거를 탈 수 없겠다고 판단했고, 결국 꽤 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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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로벨로(EuroVelo)’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로벨로는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장거리 자전거 전용 네트워크로, 국가와 국가를 잇는 공식 자전거 루트 시스템이다. 자동차 도로와 분리된 안전한 자전거길, 표지판, 숙소 접근성, 풍경까지 모두 고려해 만들어진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유럽의 인프라’ 같은 존재다.

사실 이게 우리가 꿈꿨던 유럽 자전거 일주였다. 풍경을 볼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고, 달리면서도 삶을 느낄 수 있는 길.


그렇게 우리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 계획은 라트비아에서 시작해 발트 3국을 지나 동유럽을 거쳐 이탈리아까지 가는 루트였지만, 우리가 머물고 있던 곳은 리투아니아의 시아울리아이.

여기서 리투아니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클라이페다로 이동한 뒤, 독일 키엘(Kiel)까지 페리를 타고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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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일 베젤(Wesel)에서 시작해 여러 국가를 거쳐 스위스 취리히까지, 유로벨로 15번 루트를 따라 자전거로 달리는 새로운 유럽 횡단 루트를 짰다. 말만 들어도 숨이 트이는 계획이었다.

루트를 바꾸는 데 돈도 들고, 시간도 꽤 소요되지만, 백짝꿍은 말했다. “나는 괜찮은데, 혜인이가 너무 걱정돼서...”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오전 9시, 클라이페다행 버스를 확인하고 짐을 싸서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지, 유아용 안장이 달린 자전거라 규정에 걸리지 않는지 불확실해서 표는 미리 예매하지 않고 현장 구매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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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는 기사님께 직접 물어보라고 했고, 시간은 촉박했다. 터미널 옆 마트 ATM에서 현금을 뽑아 기사님께 다가갔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기사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셨고, 우리의 무거운 자전거 두 대는 버스 뒤에 안전하게 실렸다.


휴... 가장 걱정했던 클라이페다행 버스 탑승 완료.

급하게 떠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안전한 곳으로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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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4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우리가 달렸던 도로와 비슷한 풍경이 계속 보였다. 트럭과 차량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자전거로 달렸다는 사실이 새삼 아찔했다. 그 길 위에서 마음 졸였던 우리도 우리였지만, 우리를 스쳐 지나가던 트럭 기사님들은 얼마나 더 아찔했을까 싶었다.


그때 백짝꿍이 말했다. “더 좋은 길이 있으면, 찾아가는 것도 여행이지.” 그 말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예전엔 계획이 바뀌면 모든 게 망가진 것 같고, 실패한 것 같고,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더 나은 방향이 보이면, 더 안전한 길이 있다면, 과감하게 바꾸는 용기도 여행의 일부라는 걸.


오후 1시, 클라이페다 도착.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배가 너무 고팠다. 혹시 자전거가 떨어졌으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내려왔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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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픽업해 공원을 지나 미리 봐둔 라멘집으로 향했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공원에서는 나무 향이 진하게 올라왔고, 그 공기를 들이마시니 뇌와 폐가 같이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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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을 먹고 나서는 밤 11시 페리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근처 카페로 갔다. 백짝꿍이 시킨 카페라떼에는 견과류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었는데, 한국의 율무차에 에스프레소를 탄 것 같은 묘한 맛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탈 페리를 예약하려고 웹사이트에서 카드 결제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했다. 아직 시간은 많았지만 불안한 마음에, 백짝꿍은 직접 매표소에 가보자고 했다.


오후 5시 40분

우리가 탈 페리는 DFDS. DFDS는 덴마크에서 시작된 북유럽 기반의 해운 회사로, 발트해와 북해를 중심으로 여객선과 화물선을 함께 운영하는 대형 페리 회사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바다 위의 기차역’ 같은 존재라고 한다. 매표소에 갔더니 시스템 마비로 잠시 후 다시 오라고 했다. 밤 11시 배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라 근처 KFC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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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C는 나라별로 정말 맛이 다르다. 치킨 크기, 냄새, 튀김 정도, 바삭함, 짠맛까지 전부 다르다. 그래서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라를 옮길 때마다 KFC를 하나의 문화처럼 먹어보게 된다. 참고로 우리의 인생 KFC는 페루 리마, 그리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와, 드디어 독일 키엘행 표를 끊었다.


오후 8시, 체크인이 시작됐다.

캠핑카, 트럭, 자동차, 자전거, 사람들까지 모두가 줄을 서 있었다. 우리의 자전거는 차량으로 분류돼 거대한 캠핑카들 사이에 끼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괜히 귀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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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에서 독일 키엘까지, 발트해를 가로지르는 20시간의 항해. 밤 11시 출발, 다음 날 저녁 7시 도착. 바다 위에서 20시간을 보낸다는 건 인생 첫 경험이라 설렘이 컸다. 어떤 밤이 펼쳐질지, 어떤 풍경이 있을지, 어떤 시간이 흐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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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인은 생각보다 늦어져서 밤 9시 30분쯤 여권 검사를 마치고 페리를 향해 달렸다. 체크인하면 바로 배가 있는 줄 알았는데, 한참을 달려야 거대한 페리가 나타났다. 뻥 뚫린 도로 위를 둘이서 자전거로 달리는 그 순간, 마치 뮤직비디오 속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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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나타난 페리는 건물 같았다. 배에 들어간다기보다 거대한 건물에 입장하는 느낌. 자전거를 주차하는 공간에는 이미 많은 자전거들이 있었고, 우리처럼 자전거 여행자들이 많다는 게 느껴졌다.

올라가니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진짜 백화점 같았다.

객실층, 카페, 샤워실, 바, 카페테리아. 페리 안에 샤워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시설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고, 규모는 압도적이었다.(영상으로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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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페리 티켓만 구매한 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리클라이닝 시트 공간으로 들어갔다. 시트 세 개에 한 사람이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편했다.


그리고 자기 전, 시원한 공기를 쐬기 위해 갑판으로 나갔다. 배는 분명 움직이고 있었지만, 너무 커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바다 위를 이렇게 편안하게 달릴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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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저 멀리 불꽃놀이가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었다. 여행이 건네주는 작은 선물 같았다.

우리는 갑판 위에서 콜드플레이의 Yellow를 들으며, 바다 위 물결과 그 위에 반사된 빛을 한참 바라봤다.

계획은 바뀌었지만, 방향은 더 좋아졌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wXlz9MvzW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