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페리에서 생긴 일...
걱정했던 리클라이닝 시트에서의 잠은 의외로 괜찮았다.
세 개의 시트에 두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깊게 잠들었다.
다만 우리가 발트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배 위에 있다 보니, 새벽이 되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고 그 때문에 몇 번은 깼던 것 같다. 반면 백짝꿍은 꿈까지 꾸고 개운하게 잤다며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페리에서 자는 건 묘하게 비행기에서 자는 느낌과 닮아 있었다.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어딘가 답답하면서도 계속 귓가를 채우는 백색소음 같은 것들.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 배가 흔들리는 감각도 낯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우리가 탄 페리의 안내도를 보니 총 8층 구조였고, 1층부터 5층까지는 차량과 짐을 싣는 공간, 6층부터 8층은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백짝꿍은 아침 해 뜨는 걸 보러 갑판에 나가자고 했지만, 그때의 나는 이불 밖은 위험한 상태라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중에 남겨둔 영상을 보니 구름 아래에서 빨갛고 뜨거운 태양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영상 속 거센 바람 소리를 듣고 나서야 ‘아, 안 나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ㅎㅎ
바닷바람을 실컷 맞고 돌아온 백짝꿍과 함께 카페 테이블에 앉아 따듯한 커피를 주문했다.
유럽에서 마시는 커피는 늘 만족스러웠는데, 이 배도 유럽 배라서 그런지(?) 카페 언니가 내려준 카페라떼가 정말 진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다 보니 휴대폰 신호가 아예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와이파이는 유료였고, 가격은 꽤나 사악했다. 우리는 당연히 결제하지 않았다.
문제는 독일 키엘에 도착해 묵을 에어비엔비였다. 출발 전 미리 예약 요청을 보내두었는데, 아직 호스트의 수락이 없던 상태였다. ‘혹시 우리가 내려서도 답장이 없으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호가 없으니 확인조차 할 수 없어 더 불안해졌다.
오전 9시 30분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위한 줄을 서기 시작했다. 페리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우리는 티켓을 구매할 때 아침과 점심 식사권을 함께 끊어두었는데,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제대로 된 뷔페’였다.
메뉴는 다양했고, 하나같이 정성이 느껴졌다.
먹는 걸 참 좋아하는 나에게 페리에 탄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경험이었는데, 이런 음식을 배 위에서 먹을 수 있다니. 그 순간의 행복은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접시를 한가득 채워왔는데도 아직 못 가져온 음식들이 한가득이었다ㅎㅎ
여유롭게 식사를 마칠 즈음, 이 배를 타기 전 잠깐 대화를 나눴던 독일 아주머니를 다시 만났다.
아주머니는 키엘에 사시는 분이었고, 예전에 홈스테이를 운영하시며 한국인 학생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를 보자마자 정말 반갑게 웃어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주머니는 “겨우 3주(Only Three Weeks)”의 휴가를 받아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겨우 3주’라니. 한국인에게 3주 휴가는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단어라 우리는 동시에 놀랐다. 회사를 다니며 연차 하루 쓰는 것도 눈치를 보는 문화에서 자란 우리에게 그 말은 꽤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가 여행을 하며 유독 독일인 여행자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 대부분이 모험심이 강하고,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상을 받았다고. 그런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하고 여쭤보았다.
아주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인도 독일인으로서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독일 사회의 안정적인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6주 이상의 유급휴가, 노인을 위한 복지, 사고나 질병이 생겼을 때도 보장되는 유급 휴가 제도 같은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다. 실패하거나 쉬어도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확신, 그 안정감이 사람들을 더 자유롭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으며 이게 바로 한국과 독일의 차이가 아닐까 싶었다.
사회보장제도라는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 사람들의 삶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여행을 하며 이렇게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을 엿보는 순간들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분명 큰 자산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인상이 무척 좋은 이탈리아 중년 남성분이 다가와 합석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흔쾌히 자리를 내어드렸다. 이분은 라트비아 리가에서 15년간 사업을 하다가, 아이의 교육을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다시 이주를 결정했다고 했다. 사업 기반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도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묻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족이 더 중요하니까요ㅎㅎ”라고 답했다. 너무 명료해서 오히려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오후 4시
독일 키엘 도착까지 2시간이 남았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점심 뷔페까지 든든하게 먹고 다시 갑판으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휴대폰에 신호가 몇 칸 잡혔고, 급히 에어비엔비 앱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호스트의 답장은 없었다. 다시 신호가 끊기자 나는 괜히 마음이 급해졌지만, 백짝꿍은 숙소는 많다며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 우리 배만 떠 있던 풍경에서, 어느새 다른 배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말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오후 6시 10분, 드디어 Kiel 도착.
신호가 완전히 잡히자마자 우리는 다시 숙소를 찾아봤다. 그러다 발견한 한 곳.
이전에 예약했던 곳보다 위치도 좋고 훨씬 깔끔해 보이는데, 가격은 1박에 6만 원이었다.
바로 예약 요청을 보냈고, 호스트는 오늘 처음 숙소를 올렸는데 이렇게 빨리 예약이 들어올 줄 몰랐다며, 아직 방이 준비되진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해보겠다고 유쾌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이제 남은 건 배에서 내려 숙소로 가는 일뿐이었다.
하선 후, 자동차를 실은 사람들은 페리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자전거들은 버스 뒤를 따라 한 줄로 달리라는 안내를 받았다.
버스를 졸졸 따라 달리는 자전거 행렬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늘 백짝꿍과 둘이서만 달리다가 이렇게 많은 자전거들과 함께하니 괜히 힘도 나고 기분도 들떴다.
독일에 들어오자마자 자전거 도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보행자 도로보다 자전거 도로가 더 넓고, 자동차 도로만큼이나 잘 정비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커플들도 참 많았다.
“그래, 이거지. 이런 자전거 도로를 우리가 원했잖아.”
드디어 우리가 제대로 된 길 위에 올라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 바닥은 또 얼마나 매끈한지,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앞으로 쭉쭉 나갔다. 심지어 그 도로를 오늘 몇 대의 자전거가 지나갔는지 표시되어 있는 걸 보고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독일의 자전거 인프라는 정말 대단했다.
멋진 공원을 지나 에어비엔비에 도착했고, 호스트는 직접 건물 아래까지 내려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 순간의 에어비엔비 영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는 것.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w5fRwIuNMu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