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80km, 신기록을 갱신한 날!

레모네이드를 파는 꼬마아이를 만나다.

by 현존

오늘은 평소의 두 배 이상을 달리겠다는, 꽤나 야심찬 계획을 세운 날이었다.

아침 8시에 눈을 뜨자마자 짐을 싸며 ‘오늘은 진짜 달린다’는 다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게 늘 그렇듯, 출발은 늘 계획과 다른 방향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묵은 에어비엔비는 알고 보니 우리가 첫 번째 게스트였다. 그 덕분에 호스트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길어졌고, 기념이라며 폴라로이드 사진까지 함께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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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는 26살, 직업은 독일 군 항해사라고 했다. 한 번 잠수함을 타면 길게는 3주 동안 바닷속에 머문다고 했다.

3주라니. 햇빛도, 바람도 없는 바닷속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상상만으로도 신기하고 조금은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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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너무 생소한 직업이라, 순간 NASA 대원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집 안 곳곳에 잠수함을 연상시키는 소품들이 있고, 군인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걸려 있어서 궁금했는데, 내가 어렴풋이 짐작했던 그의 직업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괜히 혼자 속으로 놀랐다. 아, 그래서였구나.


보통 독일 킬(Kiel)에서 우리가 찾아봤던 숙소들은 1박에 15만 원 정도였는데, 이곳은 6만 원대에 방도 무척 깔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았던 건, 밝고 따스한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신혼여행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멋지다며, 긴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있냐고 물었다. 여행지 추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질문 같아서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백짝꿍은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정말 여러 가치가 있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 있어요.”


우리는 세계여행을 하면서 보통은 계획을 세우며 움직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날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날마다,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손길이 있었다. 오늘 아침도 그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오늘의 목적지는 독일 킬에서 함부르크까지. 약 1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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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하루에 40~50km를 달리던 우리가 100km라니, 솔직히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독일의 자전거 도로는 워낙 잘 되어 있으니, 조금만 힘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우리가 100km를 달릴 수 있을지는… 끝까지 읽어주길 바란다.


오전 9시 8분, 호스트와 따스한 인사를 나누고 힘차게 출발했다.

재밌는 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달릴 때는 구글맵에 자전거 지도가 뜨지 않았는데, 독일에 오자마자 구글맵에 자전거 도로가 또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독일은 정말 자전거 선진국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100km를 달릴 예정이었기에, 초반부터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 멈춰 동네 마트에 들어가 과일·채소 착즙주스와 빵 몇 가지를 샀다. 역시 유럽답게, 동네 마트 빵은 가격도 착한데 맛은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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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하던 중, 유튜브 쇼츠에서나 보던 장면을 실제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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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레모네이드를 팔고 있는 꼬마아이.
유튜브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아이돌처럼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다..ㅎㅎ

책상 위에는 레모네이드 네 잔이 놓여 있었고, 아이가 직접 적은 ‘LIMO(레몬)’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잔에 1유로,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어떻게 만들었냐고 묻자 수줍게 “물, 시트러스, 꿀, 레몬”이 들어갔다고 설명해 주었다.
왜 파느냐고 묻자, 친구를 위해서라며 스케이트보드를 사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입고 있던 티셔츠에는 ‘Santa Cruz’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캘리포니아에 오래 살았던 백짝꿍은 “너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스케이트보드에 관한거잖아~”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맞아요, 이거 캘리포니아에서 샀어요ㅎㅎ”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루히라는 이 꼬마아이가 만든 레모네이드 두 잔을 2유로에 샀다. 기대 없이 마셨는데, 적당히 시고 달아서 정말 맛있었다.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잠시 멈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괜히 나까지 뿌듯해졌다.

백짝꿍은 길에서 아이가 만든 레모네이드를 처음 마셔본다며 유난히 행복해했다.


덕분에 우리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고 따뜻한 추억 하나를 마음에 간직한 채 출발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자전거 도로 옆으로 열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트에서만 보던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멈춰서 보니 블랙베리였다.


독일에서는 블랙베리가 길가와 숲 가장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라며, 여름이면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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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너무 시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입에 넣고 씹자 마자 놀랐다. 신맛은 거의 없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달았다.
마트에서 돈 주고 사 먹는 것보다 맛있을 수가 있나. 백짝꿍은 이제 과일 안 사도 되겠다며 농담을 했다.

우리는 한동안 자전거도 잊은 채 블랙베리를 따먹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엔 야생 사과나무가 나타났다. 야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탐스럽게 열린 사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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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베리의 달콤함을 잊지 못해 또 멈춰서 따먹은 블랙베리는 엄청 셨다.

블랙베리라고 다 달지는 않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오후 12시, 점심 전에 버스 정류장에 앉아 당을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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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m 정도를 달렸는데 중간중간 많이 쉬어서 그런지 컨디션은 꽤 좋았다.

킨더 초콜릿을 먹으며 버스 정류장에 적힌 시를 읽고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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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크고, 똑같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각자의 개성이 살아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오후 12시 30분, 점심을 먹기 위해 케밥집에 자전거를 세웠다.

케밥이 썩 당기진 않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케밥을, 백짝꿍은 치즈버거를 주문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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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던 팔꿈치의 멍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시 출발했다.


달리다 보니 또 요상한 나무를 발견했다. 아무리 봐도 검은 올리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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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짝꿍은 “이러다 배나무도 나오는 거 아니야?”라고 농담을 했다.
호기심을 못 참고 열매를 열어보니, 포도처럼 초록과 보라색 진액이 나오며 엄청 끈적했다. 올리브는 아닌 것 같았다...ㅎㅎ


초록 들판 위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젖소 무리를 보고, 뉴질랜드에서 보고 깜짝 놀랐던 만화 캐릭터 ‘Shaun’을 닮은 양도 만났다. 백짝꿍이 불러도 풀 뜯느라 정신없는 Shaun을 뒤로하고 우리는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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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꽃밭에서 같은 문구를 여러 번 보았는데, 알고 보니 독일 시골에는 꽃을 직접 꺾고 자율적으로 돈을 내는 ‘셀프 꽃 판매’ 문화가 있었다.

꽃 한 송이에 1유로. 막 자라난 꽃들이라 유난히 건강하고 예뻤다. 참 기발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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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60km를 달렸을 즈음 무지개가 나타났다.
여행을 하다 보니 무지개를 참 자주 본다. 아직 30km가 남았지만, 오늘은 이미 우리의 한계를 넘은 것 같아 마음이 벅찼다. 못할 건 없구나, 하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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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였던 무지개는 곧 쌍무지개가 되었다. 우리를 위한 한 쌍 같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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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말로, 아까 농담처럼 말했던 야생 배나무가 나타났다. 야생인데도 어쩜 그렇게 튼튼하고 탐스러운지.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풍요롭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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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가까워질 무렵, 공원 잔디 위로 아주 낮게 안개가 깔린 풍경이 펼쳐졌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신기했지만, 우리는 소울푸드인 쌀국수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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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출발 후 12시간 만에 쌀국수집 도착.
문을 닫았을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먹을 수 있었다. 가격은 면과 육수만 해당되고 갖가지 토핑은 유료 추가였지만, 지금까지 먹은 쌀국수 중 손에 꼽을 만큼 진하고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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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100km를 달려 함부르크까지 가지 못하고, 80km 지점인 노르더슈테트에 숙소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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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찮았다.

오늘 우리는 기록을 하나 세웠고,
꼬마 아이의 레모네이드,
자연이 내어준 과일,
그리고 스스로를 조금 더 믿게 되었으니까.

80km라는 신기록을 세운 우리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Kt2pcdvoQ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