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신혼 vs 70대 부부의 여행 방식
오늘은 독일 Duisburg에서 머물렀던 정말 멋진 숙소를 최대한 오래 누리고 싶어 체크아웃 시간인 오전 11시에 맞춰 천천히 짐을 쌌다. 내일이면 드디어 독일을 떠나 네덜란드로 간다.
그 전에 어제 예상치 못하게 무리를 했던 터라, 오늘은 약 32km 떨어진 작은 마을 Willich까지만 가기로 했다.
출발하려는데 하늘의 먹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페달을 밟는 것뿐.
오전 11시 30분
거센 바람을 뚫고 라인강이 흐르는 다리를 건넜다.
백짝꿍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고 한다.
나도 그 말이 이해된다. 강 위를 가로지르는 그 짧은 순간, 양쪽 세상이 분리되고 우리는 공중에 잠시 떠 있는 기분이 든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직 앞으로만 가는 상태. 충분히 자유로운 순간이다.
라인강을 따라 달리던 중, 맞은편에서 자전거 한 대가 다가왔다.
그런데 분명 사람은 두 명인데 자전거는 하나였다. 게다가 자전거에 가방이 정말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분들은 스위스 취리히에서부터 우리가 탈 예정인 유로벨로 15를 따라 쭉 올라오다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었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분들은 뉴질랜드에서 온 70대 부부이다.
은퇴 후 커플 자전거로 유럽을 일주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약 900km를 달렸다고 한다.
70대에, 커플 자전거로, 유럽 일주라니.
그 자체로 이미 멋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참을 대화했다.
백짝꿍은 자전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주셨다.
자전거 뒤쪽에는 세 개의 가방이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 옷, 하나는 할머니 옷.
그리고 나머지 하나에는 수리용품과 간식.
중간 가방에는 텐트와 커버.
앞쪽 가방에는 침낭과 취침용품.
앞바퀴 양쪽 가방에는 조리도구와 식료품.
특히 식료품은 꼭 챙겨 다닌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독일은 일요일에 슈퍼가 다 닫아서 식료품을 꼭 가지고 다녀야 해.”
정말 그렇다. 독일은 법적으로 대부분의 상점이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노동자의 휴식을 보장하기 위한 문화다. 한국처럼 언제든 장을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게 바로 워라벨인가 싶었다. 우리는 실제로 일요일에 마트가 전부 닫아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식료품 이야기를 한참 하시던 중, 뒤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말했다.
“난 독일 음식 안 좋아해!”
우리는 빵 터졌다.
할아버지가 “독일은 길에 온통 케밥과 피자집이야”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더 크게 말했다.
“I don’t like it!!!!! 나 진짜 싫어 그거!!!!”
할머니께서 정말 유쾌하시고 솔직하셨다ㅎㅎ
생각해보니 독일에는 케밥과 피자집이 정말 많다.
독일은 터키 이민자 인구가 많아 케밥 문화가 깊게 자리 잡았고, 유럽 전역에서 피자는 거의 기본 옵션처럼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입맛은 아니셨던 것 같다.
그 대신 할머니는 한국 라면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전거 여행 중에도 꼭 챙겨 다니며, 밥과 물을 넣어 같이 끓여 먹는다고 했다. 뉴질랜드 분이 이 조합을 아신다니. 이분은 진짜 맛잘알이다.
그들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매일 텐트를 치고, 매일 캠핑을 한다고 했다.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텐트 옆에 작은 건조대 같은 것에 옷이 가지런히 말려 있었다.
“옷 직접 빨아서 말리세요?”
“그럼ㅎㅎ 바이커 쇼츠가 두 개라서 매일 빨래해야 돼. 하나는 입고 하나는 빨고 이런 식으로.”
그러더니 할아버지께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어떻게 빨래 하는 줄 알아? 그냥 옷 입고 샤워해~ 비누칠해서 같이 씻는 거지~”
우리는 또 웃었다.
그 방법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그게 삶의 지혜처럼 느껴졌다. 불편함을 불평하지 않고, 방법으로 바꾸는 태도.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유튜브를 꼭 찾아보겠다고 하시며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멋진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20대 신혼과 70대 노부부의 여행 방식의 차이일까.
우리는 자전거로 유럽 일주를 하며 매일 어디에서 잘지 고민하고, 체력을 계산하고, 효율을 따진다. 조금이라도 덜 힘든 방법을 찾고, 더 편안한 선택을 한다. 아직은 젊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계산하며 움직인다.
그런데 그들은 달랐다.
오늘 달리고, 오늘 텐트를 치고, 오늘의 하늘 아래에서 잠든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하루를 온전히 자기 방식으로 살아낸다. 여행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을 ‘살아내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이는 숫자라지만, 여행 앞에서의 태도는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그들에게서 배웠다. 체력보다 중요한 건 마음의 방향이라는 것, 그리고 편안함보다 중요한 건 계속 나아가는 힘이라는 것을.
그날 우리는 길 위에서 처음으로,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서 여행의 방법이 아니라, 여행을 대하는 자세를 배운 기분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우리는 라트비아 리가에서 봤던 그 세균덩어리 같은 열매를 또 발견했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보니 이게 밤이었다!!
찾아보니 이것은 서양 밤, 즉 마로니에(horse chestnut) 열매였다. 겉은 아주 단단하고 뾰족해서 잘못 밟으면 타이어가 펑크 날 것 같은 공포를 준다.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식용 밤이 아니라 관상용 마로니에 열매라 먹을 수 없는 종류라고 한다.
백짝꿍은 깨보겠다며 이로 물었다가 바로 포기했다.
나도 시도했다가 이가 부서질 것 같아서 포기했다..ㅎㅎ
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백짝꿍이 카메라를 켜며 말했다.
“여행은 목적지를 가는 게 아니라,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즐기는 거야.”
우리가 좋아하는 류시화 작가의 문장이다.
세계여행을 하며 우리는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오늘처럼 예기치 않은 만남이 생기는 날이면 특히 더 실감한다. 목적지는 결국 지도 위의 점이지만, 그 사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의 시간이 된다.
오후 2시 10분
이제 25분만 더 가면 숙소다. Willich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 멀리 귀여운 감자 모형이 등장했다. 마치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 들어가면 특산품 조형물이 반겨주는 것처럼.
이곳은 감자가 유명한가 보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로컬 마트가 보이길래,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은 카레로 결정.
입구에는 다양한 생김새의 개성있는 미니 호박들이 놓여 있었고, 내부에는 지역에서 재배한 유기농 과일과 채소가 다채롭게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는 카레 재료와 소시지, 요거트까지 장을 보고 숙소로 향했다.
오후 3시, 출발 후 약 4시간 만에 Willich 숙소 도착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아늑하고 따스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 우리는 각자 개인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는 아까 사 온 재료로 카레를 끓였다.
로컬 유기농 재료로 만든 카레라 그런지 더욱 신선하고 맛있었고, 독일 소세지는 역시 배신하지 않는다며 끊임없이 감탄을 하며 먹었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3kPhsE4NsbY?si=dP-scflF3_W1xaj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