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다.

자전거로 유럽일주 10번째 이야기, sometimes it happens

by 현존

오늘은 아침부터 조금 이상했다.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가기 위해 구글맵을 켰는데, 분명 우리는 뒤셀도르프로 가는 날이었는데 지도에 찍힌 숙소는 자전거로 30km 더 위, 뒤스부르크에 있었다.


보통 숙소 예약은 백짝꿍 담당이다. 워낙 꼼꼼한 사람이라 몇 개를 추려 나에게 보여주면, 나는 에어비엔비 사진을 보며 “여기 침구가 폭신해 보여.” “여긴 창문이 예쁘다.” 같은 감성적인 기준으로 고르고, 최종 예약은 백짝꿍이 한다. 완벽한 분업이다.


어제 우리는 쾰른에서 퀠시 맥주를 마셨다. 쾰른 사람들의 자존심, 퀠시(Kölsch). 이제 그들의 라이벌 도시인 뒤셀도르프에 가서 알트비어(Altbier)를 마셔보자고 얼마나 기대를 했던가.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두 도시는 오래전부터 은근한 자존심 싸움을 한다. 쾰른에서는 알트비어를 주문하면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고 하고, 뒤셀도르프에서는 퀠시를 찾으면 살짝 무시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맥주로 이렇게까지 진지해질 수 있다니, 독일은 정말 맥주의 나라다.


그런데 우리가 예약한 곳은 뒤셀도르프가 아니라 뒤스부르크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백짝꿍은 다시 확인해보라고 했다.
에어비엔비 주소를 몇 번이나 확인해도 뒤스부르크였다. 백짝꿍은 이를 확인하더니 이름도 비슷하고 위치도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다고 했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 오늘은 일찍 도착해 맥주 한잔하고 푹 쉬자며 조금 비싼 숙소로 예약했는데, 체크인 당일이라 환불은 불가.


오전 9시 20분
졸지에 40km 일정이 70km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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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는 길에 뒤셀도르프를 지나치니 거기서 알트비어도 맛보고 카페에서 여유도 즐기자며 하하호호 출발했다. 우리는 언제나 긍정적이다. 아직은.


조금 달렸을 뿐인데 우리가 절대 그냥 못 지나치는 파머스 마켓이 크게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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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과일과 채소가 빛나고 있었다. 유쾌한 사장님께 오렌지 두 개와 복숭아 두 개를 약 4천 원에 샀다.


구글맵을 따라 도심을 달리다 보니 빽빽한 건물과 분주한 차들에 정신이 없었다.

백짝꿍이 갑자기 말했다. “라인강 따라 달릴래?”

구글맵을 벗어나는 건 늘 불안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강변으로 향했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


라인강은 스위스 알프스에서 시작해 독일을 가로지르고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로 흘러가는 유럽의 대표적인 강이다. 예부터 무역과 전쟁, 전설이 얽힌 강. 그 긴 역사 위를 우리가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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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라인강을 따라 달려보겠는가. 햇빛은 반짝이고, 바람은 시원했고, 나는 그 기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다 계단 오르막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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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구글맵을 따라야 하나..”

다시 돌아갔다가 또다시 강변 자전거길이 나타났다.


그러다 급경사 오르막. 20kg 가까운 배낭을 싣고 달리다 무게 중심이 무너졌다. 쿵..

내 뒤를 따라 오시던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자전거를 세우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Sometimes it happens.”

괜찮아?도 아니고, 그냥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는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따뜻하던지. 세상 모든 실패를 정상으로 만들어주는 한 문장 같았다.


엎어진 김에 복숭아를 꺼냈다.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먹은 복숭아 중 가장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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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통조림보다 더 단 복숭아. 두 개만 산 게 후회될 정도였다.


그 후로는 오프로드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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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는 사라지고 수풀은 무릎까지 올라왔다. 자전거를 끌고 가고, 가시밭길을 헤치고, 또 엎어졌다. 다행히 풀밭이라 폭신했다. 웃어야지 어쩌겠는가.


오전 11시 20분, 출발 2시간 후.
이젠 구글맵을 따라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 큰 규모의 공사장이 펼쳐졌다.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의 도로가 다 막힌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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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공사장 옆으로 난 수풀길이 보였다. 이곳은 차도 안다니고 사람도 안다니는 곳 같았다.

‘길은 어디든 이어져 있다.’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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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끝없이 달려도 길은 안 보였고, 돌아가기엔 늦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다 개울이 나타났다. 정 안 되면 개울을 건너자고까지 생각하던 찰나, 백짝꿍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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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다리!”

진짜 길이 있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사실 많이 힘들었다.)


백짝꿍은 자신의 에고가 박살났다며 뭐든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교훈은 나 자신의 길을 믿어라, 길이 안 보여도 결국 나타난다.. 같은 멋진 말들을 쏟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몰랐다. 진짜 시련은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아침부터 다양한 어드벤처를 한 우리는 화장실도 가고 싶고, 슬슬 배도 고파서 근처 마트에 들러 빵과 인스턴트 커피를 샀다.

마트 주차장에서 빵과 커피를 허겁지겁 먹고 다시 출발.


그런데 평소보다 내가 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혜인아!! 자전거 이상해!!”

백짝꿍의 뒷바퀴 바람이 다 빠져 있었다. 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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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급하게 자전거를 끌고 근처에 유일하게 영업 중인 자전거 샵에 갔지만, 오늘 수리해야 할 자전거가 너무 많다며 원맨쇼를 강조하신 할아버지께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다른 샵은 걸어서 2시간 20분.


한참 예민해진 우리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각자 해결방법을 찾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결국 선택지는 세 가지.
1. 걸어간다.
2. 트럭 렌트(외국인은 불가).
3. 버스 타고 기차역으로 간다.

버스는 자전거를 못 싣는다는데.. 어떻게든 기사님께 부탁해보자.. 마침 우리가 가야하는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어서 우리는 전력 질주했다.


통하지 않는 언어로 백짝꿍이 기사님께 설명했고, 기적처럼 자전거를 실을 수 있었다. 정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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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30분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뒤스부르크 행’ 열차를 검색했다.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백짝꿍 자전거 펑크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자전거 앞바퀴가 좌우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까 그 수풀길, 그 가시밭, 그 오르막에서 속도라도 더 냈다면?
큰 사고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늘 하루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 처음 실감했다.


곧 우리가 탈 Rhein-Ruhr-Express, 줄여서 RRX 라인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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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을 빠르게 연결하는 광역열차로, 쾰른·뒤셀도르프·뒤스부르크 같은 주요 도시를 쭉 이어준다. 깔끔한 빨간색 차량이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독일 지역 열차는 자전거 탑승이 가능하다. 다만 자전거용 추가 티켓을 따로 구매해야 하고, 열차 안 ‘Fahrrad’ 표시가 있는 칸에 세워야 한다. 접이식이 아니라면 지정된 공간에 고정해야 한다.


열차가 출발하자 창밖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도심과 공장지대, 초록 들판이 교차했다.


오후 4시 50분, 뒤스부르크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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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에 발을 딛는 순간, 묘하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잘못 예약한 도시였지만, 오늘 하루를 구해줄 도시가 되었다.

역 바로 근처에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Lucky B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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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유럽을 달리며 본 자전거 샵 중 단연 가장 큰 규모였다. 내부에는 자전거가 층층이 진열되어 있었고, 정비 공간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수리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너무 비싸면 어떡하지”


조심스럽게 들어갔는데, 직원분이 상황을 듣더니 원래는 이렇게 빨리 못 해주지만 긴급 상황이니 봐주겠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어깨가 내려앉았다.
빠르게 타이어를 교체해주었고, 펑크 수리 비용은 결코 작은 돈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의 안전값이라고 생각하니 고마운 금액이었다.(영상으로 확인해주세요!)


오후 6시 20분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잘못 예약한 목적지의 숙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하루를 위로해주듯 너무 좋았다. 깔끔하고 따뜻하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도 부드러웠다. 오늘은 꼭 맥주를 사서 마시고 싶었지만, 이미 체력은 바닥. 장 보러 나갈 힘도 없었다.

그때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 안에 병맥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König Pilsener. 뒤스부르크가 속한 루르 지역을 대표하는 필스너 맥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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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호스트가 투숙객을 위해 비치해둔 것이었고, 한 병에 1.9유로. 이건 마셔야지.


부풀어 터지기 직전이던 종갓집 김치를 꺼내 칼칼한 돼지고기 김치찜을 끓였다.

맥주 한 모금, 김치찜 한 입.

매콤하고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하루 종일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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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길을 잃었고, 엎어졌고, 펑크가 났다.
하지만 다치지 않았고, 결국 도착했고,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다.


오늘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운 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라서 버틸 수 있었다는 걸 다시 느낀 밤이었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kGDuF8Yw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