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쾰른에서 퀠시(Kölsch)맥주를 맛보다.

자전거로 유럽일주 9번째 이야기, 쾰른에선 이 맥주만 취급한다.

by 현존

오늘 아침은 꽤 부지런하게 시작했다. 이른 오전에 마트에 다녀와 장을 보고, 아침 겸 점심으로 먹을 요리를 준비했다. 내가 부엌에서 해산물 오일 파스타를 만드는 동안, 백짝꿍은 우리의 가방을 모두 열어 바닥에 소지품을 꺼내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우리의 짐을 보며 문득 웃음이 났다. 세계여행 1년을 하는 부부치고는 소지품이 참 적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니멀한 삶을, 생각보다 잘 살아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줄여야 할 것들은 있었고,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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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를 마친 백짝꿍과 함께 내가 만든 파스타와 샐러드, 요거트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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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정말 유제품이 맛있는 곳이다. 요거트 하나만 먹어도 ‘아, 여긴 다르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

자전거로 유럽을 일주하는 동안 요거트를 자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헬멧.

말도 안 되게, 헬멧이 없었다. 어제 저녁 늦게 쾰른에 도착해 급하게 숙소로 오느라 헬멧을 썼는지 벗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상이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숙소를 아무리 뒤져봐도 헬멧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어제 버스에서 좌석 뒤 공간에 넣어둔 헬멧을 그대로 두고 내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큰맘 먹고 안전을 위해 꽤 비싼 헬멧을 샀는데, 유럽 자전거 일주 초반에 이걸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백짝꿍은 그래도 FLIXBUS가 큰 회사니까 홈페이지를 통해 분실물 문의를 해보자며 나를 다독였다.

자전거는 결국 가져가지 못하더라도, 헬멧만큼은 한국까지 가져가고 싶었는데 이미 잃어버린 걸 어쩌랴. 그때,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백짝꿍은 갑자기 비틀즈의 Let it be를 부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그냥 내버려 둬”라는 가사가 왜인지 모르게 위로처럼 들렸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고, 노래를 유난히 잘 부르는 백짝꿍의 목소리가 괜히 더 좋게 들렸다. 이건 꼭 영상으로 확인해주시길.


비를 맞으며 달리다 보니 방수커버를 씌우지 않은 가방 속 전자기기들이 걱정돼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괜찮다며 달리던 백짝꿍은 길가에 kiosk가 보이자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독일에서 말하는 키오스크(kiosk)는 신문, 음료, 간단한 간식이나 맥주를 파는 작은 구멍가게 같은 곳이다. 길가나 공원 근처에 하나쯤 꼭 있고, 현지인들의 짧은 쉼터 같은 공간이다.


안 그래도 독일이 맥주로 유명한데, 우리가 도착한 쾰른은 퀠시(Kölsch)라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맥주 스타일로 유명한 도시다. 퀠시는 쾰른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맥주로, 이 스타일을 기반으로 여러 양조장이 각자의 브랜드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이 키오스크에서 다양한 퀠시를 맛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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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는 현재 1,50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맥주 종류를 가진 나라다. 연간 맥주 소비량도 엄청나서, 독일인 한 사람이 1년에 평균 약 90리터 이상의 맥주를 마신다고 한다.


처음 손에 든 맥주는 쾰른에서 유명한 퀠시 브랜드, 가펠(Gaffel)이었다. 하나는 그냥 왠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조그만 키오스크의 야상 아래서 맥주를 마신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낭만적이었다.
퀠시는 상면발효로 만드는 에일이지만, 라거처럼 맑고 깔끔하게 숙성시키는 맥주다. 그래서 맛은 가볍고 청량하지만, 에일 특유의 은은한 풍미도 남아 있다.

쾰른 사람들은 이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다른 지역 맥주를 잘 취급하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처음 맛본 가펠 퀠시는 달달하면서도 맑았고, 탄산이 기분 좋게 톡톡 튀었다.

독일 맥주가 맛있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한 모금 마시자마자 한국 맥주와는 깊이부터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 뒤쪽에서는 우리처럼 자전거를 타다 잠시 들른 아저씨 한 분이 비를 그대로 맞으며 병맥주를 마시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본 백짝꿍은 “이게 낭만이지”라며 따라 비를 맞으며 맥주를 마셨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에도 없던 이런 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Let it be를 무한 반복으로 들으며, 빗소리를 배경 삼아 맥주를 마셨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 키오스크로 들어갔고, 사장님이 추천해준 퀠시가 아닌 헬레스(Helles)라는 맥주 하나와, 퀠시 중 가장 유명하다는 프뤼(Früh)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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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스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에서 유래한 라거 맥주로, 퀠시보다 더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 특징이다.

사장님 추천 맥주는 퀠시와는 다르게 약간 퀘퀘한 향이 났고, 확실히 더 무게감 있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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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링글스 어니언 맛을 안주 삼아 프뤼를 마셔보았다. 이 맥주는 호불호가 거의 없을 것 같은, 정말 깔끔하고 가벼운 맛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늘 마신 맥주 중 프뤼가 제일 맛있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맥주를 마시다 보니 맥주의 매력에 점점 더 빠지게 된다. 정말 같은 맛이 하나도 없다. 백짝꿍은 와인은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아 품종과 토양, 날씨에 따라 맛이 달라져 와인 애호가들이 생기고, 맥주는 자연보다는 사람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라 맥주 애호가들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말이었다. 기네스를 좋아해 아일랜드에서 양조장을 갔을 때, 맥주 하나에 들어가는 정성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러다 백짝꿍은 독일 맥주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일에는 약 500년 동안 맥주는 물, 맥아, 홉 세 가지만 사용해 만들어야 한다는 ‘맥주 순수령(Reinheitsgebot)’이라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맥주의 품질을 지키기 위한 법이었는데, 지금까지도 독일 맥주가 신뢰받는 이유 중 하나다.


맥주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가, 문득 잃어버린 헬멧이 다시 떠올랐다. 헬멧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헬멧을 썼는지 안 썼는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막상 헬멧이 없으니 자전거 타는 사람들 머리만 보였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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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자 백짝꿍은 맥주병을 들고 또다시 Let it be를 부르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헬멧을 잊기 위한 노래였을까. 그렇게 한동안 Let it be가 독일 쾰른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3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프뤼 브루어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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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가까워질수록, 저 멀리서 엄청나게 웅장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쾰른의 상징, 쾰른 대성당이었다.

프뤼 브루어리로 가는 길에 마침 대성당이 있어 잠시 멈춰 섰는데, 영상으로 보면 알겠지만 이 부분만 합성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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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대성당은 13세기에 짓기 시작해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완성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중세 시대에 이걸 어떻게 지었을까 싶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다.

대성당 안에 들어가면 고딕 양식의 정수를 볼 수 있다지만, 우리는 무교이기도 하고 세계여행을 하며 여러 대성당을 봐온 터라 원래 목적이었던 프뤼 브루어리로 발길을 옮겼다.


프뤼의 상징인 빨간색이 눈에 띄는 이곳은 1904년에 설립된 브루어리로, 지금도 퀠시를 직접 생산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잔이 비면 주문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새 맥주를 가져다주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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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자마자 사람 수대로 200ml 생맥주가 놓였다. 한 입에 마시기 딱 좋은 양이다.

가격도 한 잔에 약 2~3유로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마시다 보면 꽤 큰 금액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잔이 좋아서인지 짠 하는 느낌도 참 좋았다.


병맥으로 마셨던 프뤼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물 탄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밍밍하지 않고, 알코올 맛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한국의 소맥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쾰른에 간다면 병맥과 생맥 모두 꼭 마셔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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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을 비우자 정말 말하지 않아도 바로 새 맥주가 나왔다. 테이블마다 전담 웨이터가 있어 계속 지켜보다가 잔이 비면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코스터를 맥주잔 위에 올려두면 “이제 그만”이라는 신호가 된다.


맥주만 마시기엔 아쉬워 독일이 소시지로 유명하다는 말에 감자튀김과 삶은 소시지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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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자를 때 나는 뽀도독 소리부터가 다르다. 한 입 먹자마자, 독일에 오면 소시지는 꼭 먹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유튜브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담당했던 웨이터가 계산할 때 팁을 강요하며 독일에서는 팁이 예의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를 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돈을 휙 가져가버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고 보니 독일에서는 팁이 필수가 아니고, 만족했을 경우 소액을 남기는 정도라고 한다.


원래는 프뤼 다음으로 가펠 브루어리까지 가려 했지만, 오늘의 맥주 할당량을 모두 채운 우리는 한인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4711 오리지널 오 드 쾰른 향수 매장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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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부터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오 드 코롱 향수로, 쾰른이라는 도시 이름이 향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촬영은 불가했지만 향이 너무 좋아 결국 하나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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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K-만둣국으로 해장을 하고, 그렇게 쾰른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헬멧은 사라졌지만, 맥주와 노래, 그리고 비 오는 쾰른의 공기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백김밥로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BLeAoTYqQ9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