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하루가 건네는 어른의 위로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를 읽고

by 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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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여백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아침 지하철은 늦지 않고 역에 도착했고

회사 일은 별다른 이슈 없이 여느 때처럼 순탄하게 지나갔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무난한 날씨에 야근 없이 집에 도착한 날.

그런 날이면 문득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다.


“아… 행복하구만.”


- 태수,『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중 -




2025년 소비 트렌드를 이끄는 단어 중 하나였던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것이 있었다.

화려한 이벤트나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평범하고 별 탈 없는 하루를 의미한다.

태수 작가의『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에 나오는 글을 보며 이 단어를 떠올렸다.

작년 한 해는 개인적으로 몹시 힘든 시간이었다. 특별히 아픈 곳 없이 건강했던 내가 몸이 많이 아파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손발이 붓고 계단을 오르내릴 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체력도 많이 달렸다. 통증 때문에 밤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고, 원인을 알 수 없어 정형외과, 신경외과, 통증의학과,… 병원 순례를 다녔다.

피곤하고 부스스한 얼굴로 통증과 함께 눈을 뜨는 아침이면, 별 일없이 건강하게 보통의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곤 했다.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도 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안 좋은 일도 겪기도 한다.

본인 혹은 가족 중 누군가 아플 수도 있고, 회사에서 잘리거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큰 사건사고 없이 그저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다.


상사로부터 깨지거나 추진하던 일이 미루어지는 등의 불상사가 없었던 하루.

지하철은 복잡했지만, 다행히 자리가 나 앉아 올 수 있었던 퇴근길,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가족들과 먹는 따뜻한 저녁.


어른이 된다는 건 거창한 철학이나 깨달음을 얻는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의 행복에 감사할 줄 아는 게 아닐까? 세상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노~오력한다고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아끼며 애써도 다른 사람과의 격차를 좁힐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평범한 보통의 하루에 더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용한 날들 속에 나름의 조용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소소한 성과를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간다. 그런 평범한 날들이 모여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르는 화려하고 멋진 삶이나 대단한 승리는 아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기에 삶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평범한 날들은 삶의 소중한 여백이 된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이 조용한 하루들은

우리 인생의 공백이 아닌,

여백이니까.

- 태수,『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중 -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누군가 길을 물을 때, 업무로 누군가와 통화를 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났을 때, 나는 대체로 무뚝뚝하다. 길을 묻는 이에게는 손가락으로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무뚝뚝한 얼굴로 내 길을 간다. 통화를 할 때는 업무의 핵심만 이야기하고 간단한 안부 인사도 없이 통화를 끝낼 때가 많다.

대부분 배가 고프거나 피곤할 때이다. 체력이 달려, 더 이상의 에너지를 쓸 힘이 없을 때, 나는 한 마디면 될 것은 한마디만 한다. 상냥한 표정이나 친절한 말투는 나오지 않는다. 사무적이고 건조하다. 힘들다고 표정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내향적인 내게 상냥한 웃음과 친절한 얼굴도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

이미 모든 체력을 밖에서 소진하고 돌아와 더 이상 내 사람들에게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달달한 사랑이나 찐한 우정도 결국 다 건강해야만 가능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에겐 부모도 부부도, 결국은 남이다.

- 태수,『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중 -



좋은 아침이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며 출근하기, 동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주기, 뒷사람을 생각해 유리문 잡아주기 등 나의 친절과 배려 역시 체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라는 저자의 이야기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왔다.

다정한 목소리로 상대의 안부를 물어주거나,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길을 알려주는 친절함도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의 불친절, 무뚝뚝함이 성격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요즘은 저녁마다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한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팔은 덜덜 떨리고 자세는 엉망이지만, 체력도 마음도 여유 있는 친절한 어른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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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도망치지 않는 용기


어린 시절 부모님 외에 가장 가까운 어른은 학교 선생님들이었다.

개학 첫날 “〇〇아”라고 다정하게 이름 불러주시고 항상 웃는 얼굴로 오늘 하루도 열심히 놀고 열심히 공부하라 격려하시던 중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어른이라고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든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린 시절에는 어른은 다 그렇게 항상 웃으며 친절하게 누군가를 다독여주는 존재인 줄 알았다. 졸업 후 삼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어른에게도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 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 앞에 어른이라고 불안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힘들 땐 외면하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공들여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상사와 관계가 힘들어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출근한다. 삶이 주는 고통과 시련이 때로 맵고 고되어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주어진 삶 앞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일임을, 삶을 대하는 어른다운 태도임을 이제는 안다.



삶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넌 모르지.

앉을 자리가 없는 역에서 매일 출근하는 것과

간신히 생긴 자리를 할머니에게 양보해드리는 것.

상사가 튀긴 끈적한 침도 매일 새것처럼 세수하고 털고 일어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모니터를 켜고,

신발 끈을 묶고 출근 도장을 찍는 그 삶이

사실 얼마나 굉장한 인생인지 넌 모를 거야


- 태수,『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중 -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특별하거나 화려한 행복보다는 평범한 일상이 감사하고 소중함을 우리는 안다. 크고 작은 일에 지나치게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삶의 본질이나 의미를 돌아볼 줄 안다. 그래서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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