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B형 간염 보균자이기도 하고 마시면 잠이 쏟아져 이내 잠들어 버린다. 대학생 때 조교 형이 주신 소주 한 잔 받아먹고 테이블에 머리 박고 잔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조금씩 먹으면 술이 는다는 말이 있지만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수식어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기가 꺼려진다. 간염은 간암의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침묵의 장기가 손상되어 피를 토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차라리 안 마시고 말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
담배 역시 피우지 못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에서 담배꽁초 하나를 호기심 삼아 피어본 기억이 있다. 빨아들였을 때의 그 독함은 마치 내 목에 있는 지옥 불에 석탄을 마구 때려 넣은 기분이랄까.. 엄청난 기침과 함께 혼이 나갈 뻔 한 의식을 가까스로 부여잡았었다. 알고 보니 그 독하디 독한 말보로 레드였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르신다. 나의 소심하지만 나름 대담했던 비밀스러운 일탈이었다고 할까.
술과 담배를 못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많은 희생을 필요로 했다. 군대에선 담배를 통해 선임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쌓고 대인관계를 만든다. 담배를 핑계로 쉬는 시간도 얻을 수 있다. 담배를 못 피우면 선임이 부를 일도 없다. 당연히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한다. 엄청 서럽진 않지만 그래도 약간의 설움은 있다.
사회생활에선 술이 추가된다. 모 건설회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국 회사는 회식의 연속이라는 말이 현실임을 제대로 깨우친 날들이었다. 처음에 업무에서 실수를 좀 했고, 회식자리에서 나에게 술을 주는데 내가 술을 못한다고 정중히 거절한 적이 있다. 담배는 피우냐고 묻기에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할 줄 아는 게 뭐니? 라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기억한다.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나름 멘탈이 조금 강했던 터라 쿨 하게 무시했다. 감사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시고 싶은 사람들만 모여 회식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참여하지 않을수록 이상하게 소외감이 드는 이유는, 강압적이던 분위기 속에서 무조건 참여해야 했던 과거의 잘못된 행태들이 마치 옳았던 일인 것처럼 뇌리에 박혀버렸기 때문이리라.
가끔은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해소할 수 있는 도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음악을 듣거나 운동하는 것이 전부였던 나에겐 내심 부러운 것이었다. 나도 담배를 피우면서 알게 모르게 니코틴과 타르가 주는 몽롱함에 취해보고 싶었다. 서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싶었다. 삼겹살에 소주의 맛도 알고 싶었고, 치킨에 맥주의 맛도 느끼고 싶었다. 갈증 날 때 시원한 생맥주의 맛도 알고 싶었고, 소주에 라면 하나를 끓여 쓸쓸함을 술로 달래보고 싶었다. 수입맥주를 마트나 편의점에서 구입해 간단한 주전부리와 함께 조촐하고 소박한 혼술도 즐기고 싶었고, 와인을 잔에 따라 향을 음미하고 포도의 숙성된 맛을 느끼며 분위기도 잡아보고 싶었다.
나는 오늘 와인을 한 잔 따랐다. 한 모금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던 나를 잘 알지만 오늘만큼은 와인 잔을 가득 채웠다. 가끔씩 찾아오는 기분 안 좋은 날 때문에 아침부터 더러운 기분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름의 큰 결심이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주저함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침대 위에서 와이프와 함께 영화를 보며 홀짝홀짝 모두 들이켰다. 얼굴이 붉어지고 이내 잠이 쏟아졌다. 이불을 덮었는데도 한기가 느껴져 새우 자세로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신음소리를 내며 이내 잠들었다. 깨어보니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거실로 나가 잠시 멍하니 서있었더니 밖에서 느껴지는 무언가에 창문을 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열한 시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숨 푹 잔 느낌이었다. 속이 좋지 않아 차를 한잔 끓여 마셨다.
내리는 눈을 보며 마시는 와인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의 맛은 어떨까? 오늘도 술과 담배에 대한 상상 속에 또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