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면 싸지고 귀하면 비싸진다는 말인데, 물건 뿐 아니라 돈(화폐)에도 통하는 말이에요. 관련하여 최근 한 정치인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어요.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건 20세기 경제학이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요즘 세상에는 돈을 아무리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뜻처럼 들려요. 그래서 마치 정부가 마음껏 돈을 써도 괜찮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죠. 20세기 경제학이 21세기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의미도 있고요.
하지만 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주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황과 맥락이 빠져 있는 반쪽짜리 설명이에요.
돈을 푼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흔히 “돈을 푼다”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하나는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고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에요. 즉, 시장에 돈이 많아지고 유동성이 풍부해지는 상태를 “돈을 푼다”고 표현해요.
경제학의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통화량이 늘어나면 사람들의 소비와 투자가 활발해지고, 이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게 된다고 봐요. 이게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케인즈주의 혹은 화폐주의 경제 이론의 핵심 개념이에요.
그럼 최근에는 왜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았을까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전까지, 미국,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들은 엄청난 규모의 돈을 시장에 풀었어요. 그런데 물가는 거의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저물가와 저성장이 장기화되었죠.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유동성 함정이에요. 사람들이 불안해서 돈을 쓰지 않고 저축만 하다 보니, 아무리 유동성이 많아도 소비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둘째, 고령화와 저출산이에요. 사회 전체의 소비 성향이 낮아지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수요가 늘어나지 않아요. 셋째, 글로벌 공급망의 확장이에요.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세계 시장을 채우면서, 수입물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어요. 넷째, 자산시장으로의 쏠림 현상이에요. 돈이 실물경제로 가지 않고,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으로 몰리면서 자산 가격은 올랐지만, 생필품이나 서비스의 물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어요.
이처럼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의 물가는 오르지 않는 시기가 분명히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이제는 돈을 풀어도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죠.
하지만 최근엔 왜 다시
물가가 폭등했을까요?
2020년 코로나 사태 이후,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대규모로 돈을 풀었어요. 미국은 국민들에게 직접 재난지원금을 지급했고, 중앙은행은 엄청난 양의 국채를 사들였어요.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어요.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어요. 사람들은 억눌린 소비를 한꺼번에 터뜨렸고, 자금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돈을 썼어요. 반면 공급은 제한되었어요. 코로나로 인해 공장들이 멈추고 물류망이 끊기면서 제품 생산과 유통에 문제가 생겼어요.
이처럼 수요는 늘고 공급은 줄어든 상황에서,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실제로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한때 9%를 넘었고, 유럽과 한국도 큰 폭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어요.
이 사례만 봐도, 돈을 푸는 것 자체가 반드시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어요.
결국 무엇이 진실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풀면 무조건 물가가 오른다”는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표현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돈을 아무리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주장도 위험해요.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맥락인데요, 통화량, 소비 성향, 인구 구조, 기술 변화, 공급망 상태 등 수많은 요소들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단일한 법칙으로 해석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어요. 장기적으로 통화량이 계속 늘어나면, 결국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이건 역사적으로도 반복된 패턴이고, 이론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해요.
이 정치인의 발언이
왜 위험할 수 있을까요?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건 옛날 경제학이다”라는 발언은 듣기에 따라 달콤하게 들릴 수 있어요. 국가가 돈을 마구 써도 괜찮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돈을 푸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며, 그 대가는 화폐가치 하락, 부채 증가, 세대 간 불균형, 자산시장 왜곡 등으로 돌아오게 돼요.
우리가 2020년대 초반에 겪었던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생활비 부담 증가도 결국은 그 ‘부작용의 청구서’였어요.
경제학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생물이에요.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진보해도, 경제의 기본 원리와 균형은 여전히 중요해요. 돈을 푼다고 해서 언제나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돈이 어디로 흐르고, 어떻게 쓰이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시각이 필요해요.
우리는 단순한 슬로건보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을 길러야 해요. 그래야만 다음 세대에게 지속 가능한 경제를 물려줄 수 있어요.